너무 뻔한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일본 영화 중에서 최고의 감동적인 영화를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1999년작 [철도원]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갓 태어난 딸이 열병으로 죽었을 때도, 사랑하는 아내가 깊은 병을 얻오 병원에 입원하는 날에도 묵묵히 호로마이역을 지키던 정년을 앞둔 늙은 '철도원'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철도원]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너무 뻔한 이야기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철도원]은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회사 책장에서 아사다 지로의 <지하철>이라는 평범한 제목의 소설을 발견한 것은 몇 주전이었습니다. <철도원>에 이은 <지하철>이라니... 평범해도 너무 평범한 이 책을 책장에서 뽑은 이유는 시간여행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정보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뜻 책을 펼치지는 못했습니다. 좀 더 흥미로워보이는 소재의 책들이 저를 먼저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은 시간여행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를 이해 못하던 주인공 신지가 시간여행을 통해 아버지의 고단했던 삶을 목격하고, 결국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는 평범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흥미로운 소재의 책들에게 우선 순위를 내주고 계속 뒤로 밀리다가, 더이상 미뤄둘 수 없다는 생각에 무심코 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단 이틀만에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습니다. 뻔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 때문에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도저히 책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힘들었던 시절, 폭력에 물들어버린 아버지
<지하철>의 앞 부분은 작은 속옷회사의 영업사원 고누마 신지가 밑바닥부터 시작해 세계적인 실업가의 자리에 오른 아버지 고누마 사키치를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남들이 보기엔 입지전적인 인물로 존경을 받지만 신지 입장에서는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결국 형인 쇼이치를 자살에 이르게한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쇼이치의 기일날 지하철에서 신지는 시간여행을 하고 쇼이치가 자살했던 30년전 그날에 가게 됩니다.
형의 자살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현재로 돌아오지만 형의 죽음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신지는 애인 미치코와 함께 아버지인 사키치의 고단한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후 폐허가된 일본에서 암시장을 전전하던 아무르가 바로 사키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불안한 마음에 지하철을 타는 소년 사키치와,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꼬마 사키치를 만나게된 신지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폭력적인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하게됩니다.
저는 폭력이 전염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커서도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 대한 폭력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사키치의 폭력은 무능력한 아버지, 전쟁의 참혹한 기억, 그리고 얍삽빠르고 잔인하지 못하면 살 수 없었던 시절에 거치며 서서히 사키치 스스로를 장악해나간 것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후반 전개
사실 여기까지는 제가 예상했던 <지하철>의 전개입니다. 단, 한가지 의문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지와 함께 시간여행을 하는 미치코의 존재입니다. 그녀는 신지의 부인이 아닌 불륜 상대입니다. 그런 그녀가 왜 하필 신지의 시간여행을 함께 하는 것일까요? 저는 쇼이치가 자살한 것이 30년전이고, 미치코의 나이가 스물아홉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미치코가 쇼이치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습니다.
혹은 미치코가 쇼이치의 딸일지도... 쇼이치가 자살한 이유는 아버지와의 다툼이 아닌, 학생 신분으로 여자친구가 임신한 것에 대한 죄책감, 혹은 책임감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구피는 그러한 제 추리에 대해서 '그러면 신지는 조카와 불륜관계였던가잖아. 너무 막장 아닌가?'라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제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는 점입니다. 쇼이치의 자살 원인과 신지와 미치코의 관계, 특히 소설의 후반부 미치코의 선택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 모든 사건을 겪은 후 신지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보다는,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각각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조금은 뻔하지만 그래도 훈훈한 결말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지하철>의 결말은 가슴이 아릿해지며 먹먹했습니다. 평범해보이는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어내는 기술. 어쩌면 그것이 아사다 지로의 진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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