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이야기들/BOOK STORY

<노서아 가비> - 영화 [가비]보다 훨씬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더라.

쭈니-1 2018. 1. 26. 17:20



어쩌면 나는 한국 소설을 기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어느덧 저는 일곱편의 소설책을 읽었습니다. 내가 이토록 책을 좋아했는지, 이 좋은 책을 지금까지는 왜 읽지 않았는지, 의문일 정도로 저는 무서운 속도를 책을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지금까지 제가 읽은 소설책 리스트를 보니 한국소설이 단 한편도 없더군요. 비단 최근에 읽은 책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가 읽은 소설책들을 기억해봐도 20대 시절 읽었던 김윤희 작가의 <잃어버린 너>와 이문열 작가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정도였습니다. 이쯤되면 제가 일부러 한국소설을 기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봐야할 것 같습니다.

며칠전 집근처 대형서점을 찾았습니다.  베스트셀러가 진열되어 있는 곳을 보니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김진명 작가의 <미중전쟁>,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꽂혀 있었습니다. 구피는 그 중 <82년생 김지영>과 <채식주의자>를 읽었다며 "내 스타일의 소설은 아니었어."라고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더군요. 그건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유쾌하고 새로운 상상력이 가득한 이야기를 선호하는 제게 한국 소설들은 너무 지루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러고보니 집에 있는 김중미 작가의 <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도 읽지 않고 계속 미뤄두고만 있네요.

회사 책장에 섰습니다. 회사 책장에도 여러 권의 한국소설이 있었습니다. 위기철 작가의 <아홉살 인생>, 김려령 작가의 <완득이> 등등... 그 중에서는 저는 김탁환 작가의 <노서아 가비>라는 왠지 익숙한 제목의 소설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노서아 가비>가 영화 [가비]의 원작소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2018년의 제 첫 한국소설은 <노서아 가비>가 될 것임을 직감할 수가 있었습니다.



영화보다 재미있다.


일단 <노서아 가비>는 재미있었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한지 단 몇 시간만에 마지막 책장을 넘길 정도로 이야기의 흡입력도 강했습니다. 사실 <노서아 가비>를 읽기 전에 2012년 3월에 제가 쓴 [가비]의 영화 이야기를 먼저 읽어 보았습니다. 거기엔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노서아 가비>를 읽지도 않았으면서 [가비]가 원작에 대한 생략과 집중에 실패했다고 진단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가비]에 혹평을 한 것은 영화의 주인공인 따냐와 일리치의 캐릭터가 생략되었고, 일리치에게 따냐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비]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노서아 가비>에서는 완벽하게 해소됩니다. <노서아 가비>는 소설의 절반 이상을 따냐와 일리치의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할애합니다.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천자의 하사품을 훔쳐 달아났다는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하자 따냐는 열아홉의 나이에 국경을 넘어 광활한 러시아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따냐는 그림 위조 사기꾼을 돕기도 하고, 어리숙한 유럽 귀족들에게 러시아의 광활한 땅을 팔아치우기도합니다. 그러던중 자신과 같은 사기꾼인 일리치를 만나게 됩니다.

따냐와 일리치가 고향땅 조선을 다시 밟은 이유는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숨긴(아관파천) 고종에게 크게 사기를 치기 위해서입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의 맛에 흠뻑 빠진 고종의 개인 바리스타가 된 따냐.(노서아 가비는 러시아 커피를 뜻합니다.) 하지만 따냐는 힘 없는 나라의 황제인 고종에게 자꾸 마음이 쓰이고, 반대로 일리치를 의심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갑니다.



획일적이지 않은 따냐와 일리치의 관계가 좋았다.


<노서아 가비>는 [가비]와는 달리 따냐가 러시아에서 사기꾼으로 활동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일리치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세세하게 묘사합니다. [가비]에서는 조선계 일본인 사다코가 악역으로 등장하지만 <노서아 가비>에서는 그렇게 뻔한 악역은 없습니다. 그저 고종에 빌붙어 어떻게든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움켜쥐려는 작자들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 가운데 [가비]에서 가장 아쉬웠던 따냐를 향한 일리치의 무조건적인 사랑도 <노서아 가비>에는 없습니다.

<노서아 가비>는 따냐가 화자입니다. 그렇기에 철저하게 따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데, 처음에 따냐는 일리치와의 사랑에 빠져 버립니다. 하지만 점점 그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필요없는 존재는 가차없이 버리는 것이 사기꾼이라는 족속인 만큼 혹시 일리치 역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며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일리치가 아버지의 죽음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그에 대한 의심은 점점 커집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단지 고종을 암살하려는 일리치의 계획을 듣고는 일리치와 고종 중 한명을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빠졌을 뿐입니다.

단숨에 <노서아 가비>를 읽고나니 따냐라는 캐릭터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왜 장윤현 감독은 좀 더 원작에 충실하게 [가비]를 만들지 못했는지 아쉬움이 짙게 남았습니다. 영화보다 재미있는 원작. 그런데 그것이 영화와 소설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은 김탁환이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꾼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한국소설은 지루하다는 제 선입견도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