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7년 영화이야기

[기억의 밤] - 스릴러적 완성도 대신 그날의 아픔을 이야기하다.

쭈니-1 2017. 12. 7. 13:17

 

 

감독 : 장항준

주연 : 강하늘, 김무열, 문성근, 나영희

개봉 : 2017년 11월 29일

관람 : 2017년 12월 5일

등급 : 15세 관람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여유를 만끽했던 그날의 휴가

 

지난 화요일 위내시경 검사를 위해 회사에 하루 휴가를 냈습니다. 이로써 지난 10월에 10년 근속상으로 받은 3일간의 포상 휴가를 모두 소진했네요. 최근 들어서 이렇게 특별한 일없이 자주 쉬었던 적도 없었습니다. 암튼 올 겨울 들어서 가장 추웠던 날, 평소 회사에 출근하는 것보다 일찍 일어나 병원에 도착했지만, 병원엔 올해가 가기 전에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저 역시 그들 중 한명이고요. 일찍 서둘렀지만 위내시경이 끝난 시간은 오전 10시. 의사로부터 내 위는 깨끗하다는 기분 좋은 소견을 듣고, 좋은 기분으로 따뜻한 커피 한잔과 달콤한 빵 한조각, 그리고 보고 싶었던 영화 한 편을 보며 10년 근속상 마지막 포상 휴가를 보냈습니다.

그날 제가 본 영화는 [기억의 밤]입니다. 사실 [기억의 밤]을 본 이후 연달아 [반드시 잡는다]까지 보려 했지만 칙칙한 분위기의 스릴러 영화를 연달아 두 편이나 보기엔 그날의 따스한 햇살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결국 [기억의 밤] 한 편만 본 후 추운 겨울의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천천히 산책을 했습니다. 늦은 점심식사로는 시장에서 산 옛날 통닭에 맥주 한잔 기울이며 느릿느릿 여유를 즐겼습니다. 꼭 무언가를 해야만 의미있는 휴가는 아닐 것입니다. 그냥 이렇게 여유를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휴가는 제게 충분한 의미를 안겨줬습니다.

그날 본 [기억의 밤]은 스릴러 영화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여유를 만끽하며 보냈던 휴가날 본 영화가 하필 잔뜩 긴장하며 봐야 하는 스릴러 영화라니... 분명 그날의 분위기와 조금 맞지 않은 영화이긴 하지만 영화 자체는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반전이 워낙에 대단하다고해서 영화 시작전부터 반전을 맞추겠다며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영화를 봤었는데, 막상 [기억의 밤]은 반전 대신 아픔을 이야기하는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 반전에 의한 쾌감보다 아픔을 겪은 캐릭터들에 의한 먹먹함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감싸 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의 아픔을 극복했다고 자평하는 나 역시도

아직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았거늘...

 

 

미리 깔아놓은 힌트를 잘 조합해보자!

 

[기억의 밤]은 모든 것이 완벽한 형 유석(김무열), 자상한 부모님(문성근, 나영희)과 함께 새 집으로 이사를 가는 진석(강하늘)의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매일 악몽에 시달리는 진석은 새로 이사온 집이 웬지 낯설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형제의 2층 방 옆에는 전 주인이 잠시 보관을 맡겼다는 짐이 쌓여 있는 잠겨진 방이 있고, 그 방에선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던중 유석이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19일만에 집에 돌아옵니다. 그때부터 진석은 자신을 둘러싼 이상한 낌새를 느낍니다.

이 영화의 반전을 풀기 위해서는 장항준 감독이 영화 초반에 깔아놓은 힌트들을 잘 조합해야합니다. 가장 먼저 [기억의 밤]의 시대적 배경은 1997년입니다. 그런데 왜 2017년이 아닌 1997년일까요? 분명 1997년을 배경으로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20년전 과거를 영화의 배경으로 하지는 않았을테니까요. 그리고 두번째 힌트는 진석의 악몽입니다. 진석은 의자에 묶여 누군가에게 고문을 당하는 남자의 꿈을 꿉니다. 고문하는 이들은 남자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강요하고, 진실을 모른다면 죽어야 한다며 도끼를 내리찍습니다. 이 장면은 그저 단순한 진석의 악몽으로 치부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악몽이라면 반복해서 보여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힌트는 새로 이사온 집이 낯설지가 않다는 진석의 독백입니다. 얼핏 그냥 흘러 들을 수도 있지만, 스릴러 영화에선 절대 그래선 안됩니다. 잘 만든 스릴러 영화일수록 장면 하나, 대사 한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습니다. 모두 영화 후반부의 반전을 위해 미리 깔아놓은 힌트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왜 진석은 이 집이 낯설지가 않았을까요? 도대체 이 집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이후 영화의 스포가 마구 남발됩니다.)

 

1997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그리고 진석에게 낯설지 않은 집은

이 영화의 반전을 알아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명탐정이 되어 진석을 둘러싼 비밀을 벗겨내보자!

 

 

힌트를 하나씩 푼다면 정답이 나온다.

 

첫번째 힌트인 1997년이라는 시대적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1997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조금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군사독재 시절을 배경으로 했다면 뭔가 이야기가 되지만 1997년은 군사독재가 무너진 문민정부 시절입니다. [기억의 밤]을 보면서 저는 1997년에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부터 생각해내야 했었는데, 1997년에 벌어진 사건이라고는 IMF 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전 국민을 파산으로 몰고 갔던 IMF 사태. 그렇기에 저는 [기억의 밤]과 IMF 사태가 무슨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영화를 봤습니다.

두번째 힌트인 누군가가 고문당하는 꿈이 사실 조금 헷갈렸습니다. 진석은 고문당하는 남자가 무척 괴로워보인다고 말하지만, 고문당하는 남자는 제 3자가 아닌 진석임은 쉽게 유추해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진석이 민주주의 투사이고, 진석의 꿈은 군부의 고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1997년은 김영삼 정부 시절입니다. 분명한 것은 진석이 무엇인가 비밀을 알고 있고, 상대는 진석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캐내기 한다는 점입니다. 유석은 물론 진석의 부모 역시 진짜가 아니라는 것은 TV 영화정보 프로그램에서 이미 드러난 바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진석에게 캐내고 싶어하는 비밀이 무엇인가겠죠. [기억의 밤]의 시대적 배경이 1997년인 점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IMF 사태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세번째 힌트인 새로 이사온 낯설지 않은 집은 앞선 첫번째, 두번째 힌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진석이 무언가 비밀을 알고 있다면 그 비밀은 새로 이사온 집과 연관이 있을 것이며 직, 간접적으로 IMF 사태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엔 진석이 이 집에 유석 일당이 찾고 싶어하는 무엇인가 숨겨놓은 물건이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했지만, 그렇다면 굳이 2층 형제의 옆방을 봉인할 이유가 없습니다. 봉인된 방에 숨겨 놓았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답은 단 하나, 그들이 찾고 싶어하는 것은 물건이 아닌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과연 진석의 2층 옆방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사실 봉인된 방은 이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진석은 끊임없이 봉인된 방에 관심을 갖고

장항준 감독은 봉인된 방에서 나온 귀신, 봉인된 방에서의 유석의 시체 등으로

끊임없이 관객의 이목을 봉인된 방에 붙잡아 놓음으로써 반전을 숨긴다.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영화의 분위기는 바뀐다.

 

물론 저는 그럴싸한 추리를 하며 영화를 봤지만 이 영화의 반전을 완벽하게 알아맞추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진석이 자신의 가족이 가짜임을 눈치채고 도망쳐 들어간 파출소에서 지금은 1997년이 아닌 2017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은 저로써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입니다. 분명 이에 대한 힌트는 있었습니다. 이삿집 센터의 일꾼이 진석에게 유석을 가리키며 "저 분이 진짜 형이세요?"라며 의아해하는 장면의 의미를 좀 더 관심있게 파고들었다면 쉽게 유추할 수 있었던 반전이었지만, 저는 이 장면이 진석이 아닌, 유석을 향하고 있는 것이라는 오판을 함으로써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진석이 지금은 1997년이 아닌, 2017년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영화는 급속도로 분위기를 전환합니다. 장항준 감독은 이제 더이상 비밀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유석의 입을 통해 지금까지 꽁꽁 숨겨두었던 영화의 반전을 술술 털어놓아버립니다. 그리고 유석의 이야기는 역시 제가 예상했던대로 1997년 IMF 사태로 돌아갑니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진석의 슬픔. 하지만 마지막 남은 가족인 형을 살리기 위해 그는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합니다. 바로 형의 수술비를 받는 댓가로 살인청부를 실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살인청부엔 IMF 사태로 인한 전 국민의 파산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비밀들이 유석의 입이 아닌, 진석이 직접 알아낸 것이라면 영화의 스릴러적 완성도가 더욱 높아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항준 감독은 후반부에 스릴러적 완성도를 포기하는 대신 20년전의 IMF 사태로 인한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IMF 사태에 의한 상처는 진석, 유석 뿐만 아니라

아직도 우리 가슴속 깊이 남아 있다.

[기억의 밤]은 20년전 그날의 아픔을 스릴러라는 장르를 이용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20년전 우리에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지난 2012년 저는 중앙일보와 IMF 시절 제가 겪었던 이야기를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뜬금없이 그런 인터뷰를 한 이유는 제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면 어떨지 궁금했기 때문이고, 당시 제게 큰 상처와 아픔을 줬던 IMF가 이젠 내게 그저 옛 이야기일 뿐이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저는 IMF의 상처가 오히려 약이 되어 지금의 저를 있게 했다고 이야기했지만 막상 중앙일보에 실린 제 이야기는 아직까지 IMF의 상처에 시달리고 있는 가련한 가장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중앙일보의 기획의도에 따라 제 이야기가 편집된 결과였지만, 어쩌면 그것이 중앙일보 기자의 눈에 비친 제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며칠전 저는 SBS 일요특선다큐멘터리 작가로부터 IMF 시절에 대한 인터뷰를 할 수 있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절했습니다. 5년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 대한 안좋은 기억도 있고, IMF 시절의 제 상처가 누구나 볼 수 있는 공중파 TV에 나간다는 것에 그다지 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년이 흘렀지만 이렇게 IMF의 상처는 공중파 방송에서 특집 다큐멘터리로 다룰 정도로 아직까지 국민적 관심이 식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도 IMF의 상처를 완벽하게 극복했다고 자신했지만 사실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상처가 아직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기억의 밤]은 바로 20년전 IMF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IMF가 아니었다면 최교수의 병원은 경영난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고, 병원이 경영난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진석에게 청부살인을 의뢰하지 않았을 것이며, 청부살인을 의뢰하지 않았다면 유석의 복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IMF라는 국가적 재난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서민의 가슴 속에 어떤 상처로 남아 있는지 장항준 감독은 반전에 반전을 반복하는 스릴러의 형태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통해 상처에서 벗어난 진석과 유석의 마지막 모습이 가슴 아팠습니다. 그들은 모두 IMF에 의한 피해자였기에...

 

 [기억의 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수시로 바뀐다.

처음엔 유석이 가해자, 진석이 피해자로 보이지만,

영화의 반전이 드러나면서 진석이 가해자, 유석이 피해자가 된다.

하지만 20년전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면 진석, 유석 모두 피해자가 된다.

20년전 잘못된 국가 운영으로 IMF 사태를 일으켰던 정치, 경제인들이 

그들을 모두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