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 살인] - 옳음과 그름의 경계에 선 사람들

 

 

감독 : 케네스 브래너

주연 : 케네스 브래너, 조니 뎁, 미셀 파이퍼

개봉 : 2017년 11월 29일

관람 : 2017년 12월 2일

등급 : 12세 관람가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

 

사춘기 시절 저는 어머니께서 큰 맘 먹고 사주신 추리소설 전집 덕분에 추리소설에 푹 빠져 살았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도 스릴러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네요.) 추리소설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셜록 홈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은 물론, 셜록 홈즈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괴도 뤼팽을 주인공으로 한 모리스 르블랑의 소설, 그리고 추리소설과 공포소설의 경계에 서있는 듯한 애드가 앨런 포의 소설까지... 그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단연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이었습니다.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불리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은 반전의 묘미가 있었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범인으로 지목되는 마지막 부분에서 저는 묘한 쾌감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소설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1939년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대표적입니다. 외딴 섬의 별장에 초대된 열 명의 손님들. 하지만 별장엔 주인은 없고, 손님들만 외딴 섬에 갇힙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명씩 살해당합니다. 저는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를 하려 애썼지만 열 명의 손님이 모두 죽고, 제목처럼 아무도 없을 때까지 범인을 찾아내지 못한채 패닉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때의 그 충격적인 반전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애거사 크리스티가 1934년에 발표한 동명의 고전 추리소설을 원작으로한 영화로 이미 1974년 시드니 루멧 감독에 의해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었습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소설의 팬으로써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던 저는 지난 10월말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을 미리 봤습니다. 그러고나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보며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과 비교하니 영화가 더욱 흥미롭더군요. 시간이 되신다면 여러분들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을 챙겨보시길 추천합니다.

 

놀라운 회색 뇌세포 명탐정 에르큘 포와르(Hercule Poirot)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헤라클레스 포와르라 부르기도한다.

그때마다 에르큘 포와르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며

"사자를 때려 잡거나 하지는 않는다"라고 재치있게 받아넘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과의 극명한 차이점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은 분명 같은 원작에 비슷한 전개와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결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에서 조금 스케일을 키웠을 뿐, 영화 전체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두 영화는 지향하는 것이 완벽하게 다릅니다. 그것은 영화의 오프닝 장면만 봐도 알수가 있습니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은 암스트롱가의 비극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포와르(알버트 피니)의 활약 보다는 암스트롱가의 비극으로부터 비롯된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발생된 라쳇 살인사건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영화에서 포와르는 그저 명석한 두뇌를 가진 명탐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는 차장을 포함한 오리엔트 특급 열차내 침대칸의 13명의 승객들의 진술을 듣고, 그들의 완벽한 알리바이 안에 숨겨진 거짓들을 찾아내 사건을 해결해내지만 그 뿐입니다. 시드니 루멧 감독은 2시간 8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포와르의 추리에 할애하면서도 포와르의 캐릭터보다는 암스트롱가의 비극으로 상처입은 13명의 용의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와는 달리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포와르(케네스 브래너)의 활약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포와르가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 탄 이후에도 포와르의 캐릭터를 완성해내는데 중점을 둡니다. 그러다보니 포와르의 추리는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과는 달리 치밀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옮고 그름은 명확하다. 그 중간은 없다'라는 신념을 가졌던 포와르가 라쳇(조니 뎁) 살인사건을 통해 세상 모든 것이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캐릭터가 완성된 포와르는 2편을 예고하며 완벽하게 퇴장합니다.

 

포와르는 인간의 영혼에 생긴 균열을 통해 범인을 추리해낸다.

하지만 악마와도 같았던 라쳇을 잔인하게 죽인 범인에겐

그 어떤 영혼의 균열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것이 포와르를 혼란스럽게 했고, 옳고 그름의 중간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스릴러의 반전은 포기, 포와르 캐릭터 구축에 올인

 

분명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 추구한 것은 원작의 완벽한 추리를 영화에 옮겨 놓는 것이 아닌, 에르큘 포와르라는 캐릭터를 하나의 프랜차이즈로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사실 원작이 워낙에 유명하다보니 이 영화의 결말은 거의 대부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너무나도 유명한 원작을 가진 스릴러 영화의 경우, 원작의 결말을 바꿈으로써 영화만의 개성을 드러내려합니다. 1955년 프랑스 스릴러인 [악마같은 여자]를 리메이크한 1996년 영화 [디아볼릭]과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을 원작으로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하지만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정공법을 선택합니다. 그는 모두가 알고 있는 원작의 결말을 고스란히 가져옵니다. 스릴러 영화에서 관객 모두가 알고 있는 반전을 결말로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모험입니다. 당연히 스릴러 영화로써의 재미가 반감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그런 위험한 선택을 했을까요? 그 대답은 명료합니다. 이 영화는 반전보다 포와르라는 캐릭터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에르큘 포와르는 굉장히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163cm의 작은 키에 왁스로 딱딱하게 만든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그는 옷의 먼지 하나를 총알보다 더 큰 고통으로 여기며 질서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며, 지나치게 깔끔한 성격 탓에 집 안의 모든 물건은 모두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고합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도 그의 면모가 드러나는데, 영화의 오프닝에서 그는 아침 식사로 가져온 계란의 크기가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먹기를 거부하고 주변사람의 비뚤게 맨 넥타이를 참지 못합니다. 신발에 말똥이 묻자 다른 한쪽 신발에도 말똥을 묻혀 균형을 잡기도합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벌어진 리쳇 살인사건은 자신의 모든 신념을 뒤엎을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가져옵니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가장 중요시한 것은 바로 이러한 포와르의 변화인 셈입니다.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는 곧 진실이라 믿었던 포와르는

암스토롱가의 비극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통해

진실이 정의가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괴팍하고 냉철한 탐정이 아닌, 가슴 따뜻한 인간적인 탐정이 되다.

 

포와르는 탐정입니다. 탐정이라는 직업은 진실을 캐내는 것이 주업무입니다. 포와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인간 영혼의 균열을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고 스스로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균열을 통해 진실을 파악해냅니다. 그는 라쳇의 살인사건이 벌어졌을 때에도 살인사건은 정의의 저울이 기울어졌음을 의미하며 자신즈이 소명은 기울어진 저울을 다시 평행 상태로 되돌려 놓는것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진실을 감춰야할 때도 있습니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오히려 정의가 해쳐지는 경우입니다. 라쳇 살인사건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그는 2년전 암스트롱가의 어린 딸을 납치해 잔혹하게 살해했습니다. 그 충격으로 인하여 암스토롱 부인과 뱃속의 아기는 죽었고, 슬픔을 견디지 못해 암스트롱 대위도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그 주위의 사람들 역시 슬픔과 괴로움, 두려움의 나날을 보냅니다. 라쳇은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살인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포와르가 마지막까지 갈등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라쳇을 죽인 사람들의 영혼에 그 어떤 균열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상처입고 두려워 떠는 가련한 영혼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포와르가 허바드(미셀 파이퍼)에게 총을 준 것은 그들의 영혼을 마지막으로 시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옳음과 그름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 포와르는 그들을 그렇게 부릅니다. 살인을 했지만 정의로운 사람들. 그들을 어떻게 옳음과 그름의 이중적 잣대로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이전까지 포와르는 진실을 쫓는 괴팍하고 냉철한 탐정에 불과했다면 라쳇의 살인사건 이후 포와르는 진실뿐만 아니라 상처 받은 사람들의 내면까지 어루만질 수 있는 인간적인 탐정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매력적으로 구축된 포와르의 캐릭터는 이후 시리즈에서 좀 더 완벽하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과연 에르큘 포와르는 탐정계의 독보적인 존재 셜록 홈즈를 넘어설 수 있을까?

셜록 홈즈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포와르만의 매력이 있어야한다.

이 영화는 그러한 포와르의 매력을 위한 영화이다.

 

 

2편을 기대해도 될까?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노골적으로 2편을 암시합니다.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내린 포와르에게 한 경찰이 도움을 청합니다. 하지만 포와르는 휴가중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자 경찰은 나일강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음을 알리고, 포와르는 그제서야 관심을 가집니다. 그 순간 저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나일강에서의 살인사건에서 애거사 크리스티가 1937년에 <나일강의 죽음>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실제 이십세기 폭스사는 지난 11월 20일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속편으로 <나일강의 죽음> 제작 계획을 밝혔다고합니다.

<나일강의 죽음>은 이국적인 나일강의 호화로운 유람선을 배경으로 질투와 시기심에 의한 살인 사건을 통해 인간의 추악한 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입니다. 폭설에 갇힌 오리엔트 특급 열차라는 제한된 공간을 배경으로 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비교해서 볼거리가 훨씬 풍부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게다가 [오리엔트 특급 살인]으로 구축된 포와르의 캐릭터가 어떤 활약을 펼칠지도 관심있게 지켜봐야겠습니다. 

셜록 홈즈는 TV 시리즈는 물론 영화로 제작되며 전세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명성으로만 따진다면 에르큘 포와르는 아직 셜록 홈즈에 비할 것이 못됩니다. 하지만 에르큘 포와르는 분명 셜록 홈즈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릴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이를 위한 첫번째 발돋음입니다. 그리고 그 결실은 <나일강의 죽음>을 원작으로한 두번째 영화에서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본 후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전집이 사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습니다. 사춘기시절 그때처럼 또다시 추리소설에 푹 빠지게될지도 모르겠네요.

 

누가 뭐라 해도 옳고 그름은 명확하고, 그 중간은 없다고 믿었던 포와르.

하지만 암스트롱가의 비극으로 상처입은 사람들의 내면을 본 후 그의 생각은 바뀐다.

어쩌면 이 영화가 미셀 파이퍼, 주디 덴치, 페넬로페 크루즈, 윌렘 데포 등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명배우들을 캐스팅해야 했던 이유는

상처입은 그들의 내면을 표현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 고전 추리소설의 풍취를 영화로 즐긴다.

 

디아볼릭(Diabolique) ★★★★

 

[아가씨] - 극적 반전보다 그녀들의 사랑에 집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