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신수원
주연 : 문근영, 김태훈, 서태화
개봉 : 2017년 10월 25일
관람 : 2017년 11월 1일
등급 : 12세 관람가
가끔은 휴식이 필요해.
11월 1일, 오랜만에 회사에 연차 휴가를 냈습니다. 뭐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10월 한달간 회사에서 정신적으로 힘든 사건이 많았기에 10월을 마감하고 하루 정도는 쉬며 머리를 비워야겠다고 결심한 것 뿐입니다. 제가 연차휴가를 냈다는 말을 들은 구피는 저를 부러워하면서도 화장실 청소를 해달라, 어머니께 가서 만두를 가져와달라는 등 이것저것 시킵니다. 하지만 저는 단호하게 "오늘 하루는 나만을 위해 소비하겠어."라고 선언했습니다. 물론 결국 오후에 구피가 시킨 화장실 청소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나만을 위한 연차 휴가의 모든 계획은 결국 영화보기로 귀결됩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미뤘기에 이번 기회에 모두 챙겨보려한 것입니다. 일단 오전에 [유리정원]을 보고, 여유있는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에 [마더!]를 보는 일정으로 미리 계획을 세웠습니다. 조금 더 욕심을 내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까지 보고 싶었지만 구피가 시킨 화장실 청소를 안해놓으면 뭔가 더 큰 재앙이 밀려올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어 두편으로 만족하고 서둘로 집으로 향했습니다.
평소보다 30분 더 자고 일어나니 뭔가 기분도 개운한 느낌이었습니다. [유리정원]을 본 후에는 여유잇게 매운 카레와 맥주 한잔을 들이키고, 천천히 김포공항 롯데몰 주변을 산책했습니다. 그러다가 편의점에서 맥주 한캔과 과자를 산 후 벤치에 앉아 들이키기도 하고,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멍허니 앉아 있기도 하고, 연못의 물고기들에게 말도 걸어보고... 사실 별것 아닌 하루 일상이었지만, 이런 평범한 일상이 제게 얼마나 큰 마음의 휴식을 안겨주던지... 하루만의 짧은 휴가였지만, 다시 기운을 내서 11월을 힘차게 시작할 에너지를 안겨주기에 충분한 하루이기도 했습니다.
나도 연차휴가 내고 싶다... (구피의 실제 표정)
'유리정원'에 숨은 그녀, 소설로 세상밖에 나오다.
[유리정원]은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일찌감치 화제가 되었던 영화입니다. [장호, 홍련], [어린 신부]를 통해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국민 여동생으로 떠오른 문근영이 소녀에서 여인으로 연기 변신을 시도한 영화이며, [명왕성], [마돈나] 등 의미있는 독립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온 여성감독 신수원의 신작이기에 영화의 만듦새에 대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리정원]은 국내 박스오피스를 융단폭격한 [토르 : 라그나로크]의 광풍에 막혀 개봉 첫주 TOP10에 조차 오르지 못하고 12위에 그치며 흥행 참패를 기록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다른 영화들을 제쳐두고 [유리정원]을 먼저 챙겨봐야 했던 이유입니다.
일단 영화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던 과학도 재연(문근영)은 후배 수희(박지수)에게 연구 아이템을 도둑맞고, 사랑하는 정교수(서태화)마저 빼앗깁니다. 그녀는 어릴적 자랐던 숲 속의 '유리정원' 안에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문제는 '유리정원'의 재연이 혼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훨체어를 탄 누군가와 함께인데... 영화는 '유리정원'에 재연을 찾아온 정교수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발을 헛딛어 호수에 빠지는 장면을 영화 중반에 보여주며 훨체어의 그가 정교수임을 관객에게 암시합니다.
자신만의 공간 '유리정원'에 숨은 재연. 그녀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지훈(김태훈)의 소설 때문입니다. 유명 소설가인 이창대와의 불화로 퇴출 위기에 몰린 지훈은 절망적인 순간 재연이 벽에 '나는 나무에서 태어났다.'라고 쓴 글을 읽게 되고, 강한 영감을 얻습니다. 그날 이후 지훈은 재연의 주위를 맬돌며 그녀를 관찰하고, 급기야 그녀의 일기를 훔쳐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그 소설이 대박나며, 재현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세상에 공개됩니다.
창작에 대한 열망 때문에 재연의 일기장을 훔치는 지훈
순수는 어떻게 오염되는가?
비록 영화의 모양새는 미스터리 스릴러이지만, 스릴러의 관점에서 영화를 본다면 낙제점을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그리 깊어보이지도 않는 호수에서 정교수가 빠져 죽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고, 정교수가 실종되었는데 정교수와 불화가 있었던 재연을 경찰이 찾지 않았다는 것도 쉽게 납득이 안갑니다. 지훈은 물론 출판사 사장조차도 단번에 재연을 찾았음을 감안한다면 '유리정원'은 그렇게 숲 속 깊숙히 숨겨진 곳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찰이 정교수 실종 사건 조사를 위해 한번쯤 재연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영화의 반전이라 할 수 있는 훨체어를 탄 의문의 남자에 대한 비밀은 영화 중반 너무 쉽게 노출됩니다. 이것은 신수원 감독이 [유리정원]을 스릴러 영화로 만들 생각이 없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유리정원]은 어떤 관점에서 영화를 봐야 하는 것일까요? 정답은 영화 초반 정교수와 재연에게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된 대사에 힌트가 있습니다. "순수한 것은 오염되기 쉽다." [유리정원]은 제3자의 시선으로 너무나도 순수했던 재연이 어떻게 오염되는가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재연의 일기를 훔치고, 일상을 훔쳐보는 지훈은 관객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입이됩니다.
12살 이후로 한쪽 발의 성장이 멈춰버린 재연. 기형적인 재연의 발은 그녀의 순수함을 대변합니다. 그녀가 나무에 집착하는 이유 역시 지구 상의 모든 생물 중 가장 순수한 것이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순수한 나무의 엽록체를 지구 상의 모든 생물 중에서 가장 사악한 인간에게 주입하려던 재연의 연구는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재연은 사악한 인간들에게 상처를 입고, 그러한 상처는 더욱 나무과 인간의 조화라는 실패를 동반할 수 밖에 없는 연구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러한 집착은 오히려 재연을 오염시킵니다.
나무들은 가지를 뻗을 때 서로 상처주지 않으려고 다른 방향으로 자라나요.
하지만 사람은 안그래요.
어쩌면 우리는 모두 나무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재연의 관찰자 역할을 하는 지훈의 상태입니다. 사실 [유리정원]에서 지훈의 캐릭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포커스를 오염되어가는 순수, 재연에게 맞추기 위해서라면 지훈의 캐릭터는 오히려 특징없이 단순해야합니다. 지훈이 관객의 눈과 귀, 입이 되어주는 캐릭터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신수원 감독은 지훈의 캐릭터를 재연 만큼이나 복잡하게 구축해놓습니다. 특히 그가 뇌의 혈액순환 장애 문제로 점점 몸이 마비가 되어간다는 설정은 나무가 되어가는 현대인에 대한 풍자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인간 사회는 점점 거대해집니다. 그렇게 거대해지면 질수록 인간 개개인의 개성보다는 사회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강해집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획일화된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온 어른들은 조직의 규칙에 맞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갑니다. 결국 그러한 현대인의 모습은 거대한 숲 속의 나무와도 같습니다. 한그루가 베어진다고해도 티조차 나지 않는 숲 속의 나무들. 지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문학가라는 거대한 숲 속의 한그루 나무에 불과합니다.
처음 지훈은 이창대의 표절 의혹을 제기하며 반항합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창대의 표절. 하지만 거대한 숲 속 한가운데 가장 큰 나무인 이창대라는 나무가 훼손되길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알면서도 모르는척 했고, 결국 의혹을 제기한 지훈만 베어집니다. 지훈은 숲 속 아주 작고 보잘것 없는 나무에 불과하기에... 이창대의 표절 의혹을 제기했던 지훈은 결국 재연의 인생을 표절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표절로 얼룩진 문학가라는 거대한 숲의 일원이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몸이 상당 부분 굳은 상태에서 재연의 나무를 찾은 지훈. 어쩌면 나무가 되어버린 것은 재연이 아닌 지훈이 아니었을까요?
몸이 굳어가고 있어요.
제가 나무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다시 쓰기엔 너무 늦어버린 소설의 결말
객관적으로 재연은 지훈의 소설 마지막 부분처럼 광기어린 과학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는 영화를 보며 재연의 몰락이 슬펐습니다. 분명 잘못한 것은 정교수와 수희입니다. 그들은 재연의 연구를 공공연하게 훔칩니다. 그러면서 연구팀을 위해서라고 변명합니다. 조직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킨 그들 역시 거대한 숲속의 한그루 나무였던 것입니다. 특히 수희는 재연의 연구를 훔친 덕분에 승승장구하며 사회적 성공을 이루어나갑니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수희는 그 어떤 죄의 댓가를 받지 않습니다. 재연 입장에서는 억울하지만 이것이 우리 현대 사회의 민낯입니다.
재연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연구에 더욱 집착합니다. 그러면서 그녀 또한 오염되는 것입니다. 순수한 나무는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자연의 순리에 맞게 땅의 양분을 흡수하고, 햇빛을 받아 광함성을 하며 서서히 자라납니다. 몇십년, 아니 몇백년을 기다려야 작은 나무는 큰 나무가 됩니다. 하지만 재연은 기다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스스로도 인정한 100년은 걸릴지도 모르는 연구를 단기간 내에 이루려합니다. 그녀가 광기어린 과학도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재연은 지훈의 소설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마지막 부분만 아니었다면 완벽했을텐데..." 지훈은 재연에게 대답합니다. "소설을 다시 쓸께요. 재연씨를 위해..." 하지만 재연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늦었음을... 완벽하지 못한 소설의 결말은 지훈의 탓이 아닙니다. 순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세상 탓이고, 스스로 자신을 오염시킨 재연 탓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순수로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유리정원]은 오염되어 버린 재연의 모습을 통해 관객에게 먹먹한 슬픔을 안겨주는 영화입니다. 저 역시 언제부턴가 순수함이 오염되어 거대한 숲 속의 한그루 나무가 되어 있기에 더욱더 그 슬픔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순수한 것은 오염되기 쉽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처절하게 순수를 지켜야한다.
모든 순수가 오염되게 내버려두는 순간
우린 이름조차 없는 숲 속의 나무가 되어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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