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대런 아로노프스키
주연 : 제니퍼 로렌스, 하비에르 바르뎀, 에드 해리스, 미셀 파이퍼
개봉 : 2017년 10월 19일
관람 : 2017년 11월 1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이동진 평론가의 글이 도움이 되었다.
사실 제가 저희 집 근처 멀티플렉스가 아닌, 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하는 롯데시네마 김포공항에서 연차 휴가에 의한 영화를 본 것은 [마더!] 때문입니다. 지난 10월 셋째주 개봉작 중에서 제 기대작 1순위였던 [마더!]는 그러나 상영하는 곳이 별로 없어서 보지 못하고 미뤄두고 있었습니다. 연차 휴가계를 낸 다음에도 [마더!]가 상영하는 극장 위주로 영화 보기 계획을 세웠지만 대부분의 극장에서 밤 늦은 시간에만 [마더!]를 상영해서 결국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애초의 제 휴가 계획은 [유리정원]과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였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연차 휴가날 낮에 [마더!]를 상영하는 극장을 찾아낸 것입니다. 어찌나 반갑던지...
[마더!] 보기를 포기했던 몇 일전, 저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쓴 [마더!]에 대한 스포가 가득한 영화평을 읽었습니다. 만약 [마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면 절대 읽지 않았을 글이지만, 당시에는 [마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기에, 영화를 못 본 것에 대한 아쉬움을 이동진의 글로 대신하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동진의 영화평 속 [마더!]는 제가 생각했던 [마더!]와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저는 [곡성]과 비슷한 기괴한 공포 스릴러로써의 [마더!]를 예상했고, 대부분의 언론 매체도 [마더!]를 할리우드의 [곡성]이라고 떠들어댔습니다. 하지만 이동진의 글 속에는 성경을 중심으로한 천지창조 신화에 대한 [마더!]의 해석으로 가득했습니다.
처음엔 "역시 평론가의 글을 어려워."라며 대충 읽고 말았지만, 막상 [마더!]를 보니 이동진의 글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동진의 글을 읽지 않고 [마더!]를 봤다면 제가 생각하는 것과 너무나도 다른 영화의 구성 탓에 "이게 뭐야!!!"라며 어리둥절했을지도... 그렇기에 [마더!]에 대한 제 영화 이야기는 이동진의 영화평 <'마더!' 거대한 이야기를 한 손에 쥐고 폭주하다>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 왜 이래?"
이동진의 영화평을 읽지 않았다면 나 역시도 어리둥절했을 듯.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 (이후 스포가 가득합니다.)
먼저 [마더!]의 이야기를 보이는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외딴 숲 한가운데 시인(하비에르 바르뎀)과 그의 어린 부인(제니퍼 로렌스)이 살고 있습니다. 얼마전 화재로 집의 모든 것이 불타 버렸지만, 부인은 집을 새롭게 꾸며 냈고, 이제 집은 그들만의 안락한 파라다이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완벽했던 그들의 집에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의사인 남자(에드 해리스)는 시인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러한 남자를 시인은 집에서 며칠 쉬었다 갈 수 있도록 친절하게 배려합니다. 하지만 다음날 남자의 부인인 여자(미셀 파이퍼)가 찾아오고, 그들의 두 아들마저 찾아와 재산 다툼을 벌이며 난장판을 만듭니다. 결국 첫째 아들이 우발적으로 둘째 아들을 살해하고, 시인은 자신의 집에서 장례식을 치룰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이 모든 것이 불편한 부인. 그녀는 결국 폭발하고, 집 안의 모든 사람들을 내쫓아 버립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식이 없기 때문이라 여긴 부인은 시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결국 부인은 임신을 합니다. 부인의 임신 소식에 기뻐한 시인은 새로운 시에 대한 영감을 얻었고, 그렇게해서 쓴 시인의 시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문제는 시인의 시에 감동한 사람들이 시인의 집으로 몰려오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감당할 수 없이 수 많은 사람들이 시인의 집에 몰려 오고, 그들은 점점 통제 불능이 되어 집은 전쟁터가 되어 버립니다. 패닉상태가 되는 부인과 달리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즐기며 오히려 여유만만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부인은 아들을 낳습니다.
아들을 자신의 팬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시인. 부인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아기를 지킵니다. 하지만 한순간 잠이 들었고, 그 사이 시인은 아들을 사람들 앞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의 손길 속에서 갓 태어난 시인과 부인의 아들은 죽음을 당합니다.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부인은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부인은 지하의 보일러실 기름 탱크에 불을 지르고, 시인의 집과 불청객들은 모두 불탑니다. 그러나 시인은 죽어가는 부인의 심장에서 신비로운 힘을 지닌 크리스탈을 꺼내 불탄 집을 재건하고, 새로운 부인을 창조합니다. 이제 시인과 부인의 집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파라다이스의 첫번째 불청객은 바로 아담과 이브였다.
시인의 행동이 영화 중반까지는 이해가 되었다.
만약 [마더!]를 보이는 그대로만 보고 평가한다면 정말 이상한 영화가 됩니다. 솔직히 영화의 중반까지는 시인의 행동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인과의 단조로운 삶에 지친 시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열렬한 팬들의 방문은 짜릿한 일탈이었을테니까요. 특히 자신이 쓴 시로 인하여 인생이 바뀌었다며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팬들을 공인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은 외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부인이 불편해도 시인은 부인의 반응을 애써 무시하고 오히려 이 상황을 즐깁니다. 사실 저 역시 신혼 초에 술을 진탕 마시고 그날 처음 만난 동호회 회원들을 집으로 데려와 재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어이없어하던 구피의 표정이 [마더!]의 부인 표정과 어찌나 닮았던지...
하지만 영화가 중반을 지나 후반이 되면 더이상 시인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집안의 물건을 닥치는대로 훔치는 사람들. 경찰이 출동하자 집안은 총격전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됩니다. 시체가 널려 있고, 사람들은 광기에 휩싸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시인은 불청객들을 존중하려합니다. 급기야 시인은 자신의 갓 태어난 아들을 광기어린 불청객들에게 내어줌으로써 죽음으로 내몹니다. 부인의 분노는 당연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오히려 부인에게 불청객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며 헛소리를 해댑니다. [마더!]가 철저히 부인의 시각에서 진행되는 영화이고 관객 입장에서는 부인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마더!]는 시인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영화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상한 이야기를 이동진의 영화평처럼 성경에 갖다 붙인다면 이게 또 말이 됩니다. 시인은 전지전능한 신이고, 부인과 집은 이 세상입니다. 시인의 집에 방문하는 남자와 여자는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입니다. 의사가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는 장면에서 의사의 옆구리에 상처가 있는데 이는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창조했다는 구약성서에 대한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디테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다음날 남자의 부인이 시인의 집에 옵니다. 그리고 여자가 시인이 아끼는 크리스탈을 깨는 장면은 성경 속의 선악과 이야기와 맞아떨어집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갓 태어난 아들을 잃은 부인에겐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파라다이스를 망친 인간,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신
시인이 신이고, 부인이 이 세상이라면 그 다음부터는 [마더!]의 모든 것들이 설명됩니다. 남자와 여자의 두 아들은 카인과 아벨인데 인류 역사상 첫번째 살인자인 카인처럼 영화 속의 첫째 아들은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도망자가 됩니다. 이후 남자의 둘째 아들 장례식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시인의 집을 찾는데, 그 중 한 철없는 커플은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싱크대 위에서 장난을 치다가 물난리를 겪습니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대홍수처럼 말입니다. 물난리 덕분에 장례식의 사람들은 모두 시인의 집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시인과 부인의 집에는 한동안 평화를 되찾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새로운 시가 나오자 이번엔 수 많은 불청객들이 시인의 집을 점령합니다. 이들 불청객들은 지구를 차지한 인간들입니다. 불청객들이 시인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 듯이 인간은 아름다운 지구를 더럽히고,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부인은 아들을 낳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인이 낳은 아들은 예수입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들이 불청객들에 의해 죽듯이 신의 아들인 예수는 인간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이 박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불청객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라합니다. 마치 성경 전지전능한 신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부인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불청객들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지옥의 불구덩이와도 같은 지하 보일러실의 기름 탱크에 불을 지름으로써 불청객들과 함께 집을 불태워버립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신은 또다시 이 세상을 창조합니다. 그것이 창조자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인간이 신의 사랑을 이해하고 용서를 받아 완전한 파라다이스가 완성될 때까지 어쩌면 신의 창조 작업은 계속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옥의 불구덩이와 같았던 지하 보일러실의 음습함
그만의 창조신화
여러 의미에서 [마더!]는 참 신기한 영화입니다. 영화를 있는 그대로 본다면 말도 안되는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가 되고, 이렇게 성경의 이야기와 접목시켜서 영화 속의 은유와 상징을 찾으며 본다면 왜 굳이 이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만약 성경 속 이야기를 영화화하고 싶다면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전작인 [노아]처럼 대놓고 만들면 될텐데 말입니다.
어쩌면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마더!]를 통해 창조주 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영화 속의 시인처럼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역시 창조자이니까요. 그가 창조해낸 세상 속에서 여러 캐릭터들은 울고 웃습니다. 특히 강렬한 분위기 속에 인간의 본능을 끌어내는 영화를 선호하는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취향은 [마더!]의 시인과 교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시인은 내성적인 성격의 부인을 극한의 상태로 몰아부칩니다. 마치 '이래도 폭발하지 않을꺼야?'라며 오히려 분노 폭발을 조장하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한 부분에서는 백조를 꿈꾸었지만 흑조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발레리나의 욕망을 그린 [블랙 스완]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시인은 다시 세상을 창조합니다. 이미 여러번 그러했듯이 불청객들에 의해 무너지면 또 다시 세상을 창조해낼 것입니다. 불에 타 죽어가는 부인에게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녀의 심장 속 크리스탈을 꺼내는 장면에서는 시인의 표정에서 약간의 기대감도 엿보였습니다. 어쩌면 이번엔 진정한 파라다이스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었을까요? 하지만 이번에도 인간이라는 불청객이 파라다이스를 망가뜨릴 것입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만의 창조신화는 이렇게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에 열광한다면 그만의 창조신화는 계속될 것입니다. 또 다른 영화에서 말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하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아무 것도 없는 백지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만들어가는 그들
아마도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이 고난한 창조의 작업 속에서
창조주의 위대함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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