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데이빗 레이치
주연 : 샤를리즈 테른, 제임스 맥어보이, 소피아 부텔라, 에디 마산
개봉 : 2017년 8월 30일
관람 : 2017년 9월 7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베를린 장벽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1945년 5월 8일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합니다. 그러자 독일은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4개국이 분할 점령해 최고 통치권을 이어받았고, 동독 안에 있는 수도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 점거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이 독일 문제에 대해서 사사건건 충돌하며 동, 서독의 분단이 완전히 고착되고, 동독에서 서독으로 월경해 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습니다. 1961년 동독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동, 서 베를린 사이에 40여km에 이르는 길고도 두꺼운 콘크리트 담장을 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서 냉전의 상징물인 베를린 장벽입니다. 베를린 장벽은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붕괴 이후 독일 통일이 추진되면서 1989년 철거됩니다.
[아토믹 블론드]는 영화 시작과 동시에 베를린 장벽 철거에 얽힌 진짜 이야기를 들려 주겠다는 야심찬 선언을 합니다. 영화는 1989년 독일 통일이 임박한 상황을 배경으로 영국의 MI6요원 제임스 개스코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제임스 개스코인을 죽인 범인은 KGB 요원인 유리 바흐친. 며칠 후 MI6의 비밀 첩보원 로레인 브로튼(샤를리즈 테른)이 상부의 호출을 받습니다.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제임스 개스코인이 죽기 전 동독의 비밀경찰 스파이글래스(에디 마산)에게 확보한 소련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파이 명단이 담긴 리스트를 되찾는 것입니다. 제임스 개스코인을 죽인 유리 바흐친에게 리스트가 있을 것으로 파악되지만, 유리 바흐친은 리스트를 KGB에 넘기지 않고 잠적한 상황입니다. 로레인 브로튼에게 임무를 전달한 MI6 간부 C는 아무도 믿지 말라는 충고를 잊지 않습니다.
이렇듯 [아토믹 블론드]는 첩보 액션영화의 전통을 그대로 잇습니다. 한때 첩보 액션영화의 단골 소재였지만 이제는 유물이 되어 버린 냉전체제를 바탕으로 깔아 놓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냉혈한 스파이 세계에 주인공인 로레인을 밀어 넣습니다. 실제 로레인은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KGB에 납치될 위기를 맞이하고, 프랑스 첩보원인 델핀 라샬(소피아 부텔라)의 미행을 당하며, 유일한 아군이라 할 수 있는 MI6 베를린 지부장 데이빗 퍼시벌(제임스 맥어보이)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집니다.
이중첩자 사첼은 누구인가?
로레인에게 주어진 임무는 두가지입니다. 첫번째는 바흐친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리스트를 되찾는 것과 리스트에 명시되어 있는 이중 스파이 사첼의 정체를 밝히는 것입니다. 사첼은 MI6와 KGB에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며 MI6의 고급정보를 KGB에 넘긴 것으로 파악됩니다. 리스트를 확보하면 사첼의 정체를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바흐친은 리스트를 갖고 잠적해 버렸고, MI6는 물론 KGB까지 바흐친을 찾는 상황에서 리스트를 확보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로레인은 베를린에 입국하자마자 자신의 정체가 KGB에게 발각되었음을 눈치챕니다. 이제 로레인은 C의 충고대로 아무도 믿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능력으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첩보 액션영화로써의 [아토믹 블론드]가 가지고 있는 첫번째 영화적 재미가 발휘됩니다. 로레인의 주변에는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분이 애매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첫번째 인물인 퍼시벌은 확실히 수상해도 너무 수상합니다. 로레인이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KGB가 그녀를 납치하려 했던 것과 로레인이 개스코인의 집을 수색하자 독일 경찰이 들이닥친 것은 개스코인이 이중첩자라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개스코인이 사첼일까요? 그런데 이건 쉬워도 너무 쉽습니다. 개스코인은 너무 대놓고 수상쩍어서 저로 하여금 오히려 사첼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들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프랑스 정부요원인 라살은 어떨까요? 그녀는 로레인이 베를린에 도착할때부터 은밀하게 미행했고,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하려합니다. 하지만 라살의 미행이 로레인에게 단번에 들통나듯이 그녀는 베테랑 첩보요원이 아닌 신출내기에 불과합니다. 결국 로레인은 순진해도 너무 순진한 라살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그녀에게 정보를 캐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동성애적 관계(이 영화가 청소년 관람불가인 이유입니다.)를 연출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순진함이 만약 로레인에게 접근하기 위한 라살의 계획이라면? 어쩌면 너무 노골적으로 '내가 사첼이오.'라고 나대는 개스코인보다는 라살이 의외로 사첼일지도 모릅니다.
데이빗 레이치 감독의 주특기가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첩보영화의 전통적인 재미는 이렇게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속고 속이는 진실 게임에 있습니다. 하지만 [아토믹 블론드]에는 이러한 전통적 첩보영화의 재미 위에 한가지 새로운 재미를 포함시킵니다. 그것은 바로 날것 그대로의 액션입니다. 영화의 초반, 온 몸이 피멍 투성이인채로 MI6 내부 조사에 참석하는 로레인의 모습에서 어쩌면 예견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로레인이 KGB에 납치되어 고문을 당해서 저런 상처가 났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고문 장면은 첩보영화에서 흔히 있는 장면이니까요. 하지만 데이빗 레이치 감독은 첩보영화의 틀에 갇혀 있는 저와 같은 관객들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로레인의 육탄전을 보여줍니다. 건장한 수 명의 남성을 상대로한 로레인의 육탄전은 이것만으로도 영화 관람비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선했습니다.
사실 첩보영화의 주인공은 지금까지 건장한 남성 위주였습니다. 첩보영화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물론이고,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새로운 첩보영화들인 '본 시리즈', '킹스맨 시리즈'도 주인공은 건장한 남성입니다. 그런데 [아토믹 블론드]는 로레인이라는 여성 캐릭터를 내세웠고, 샤를리즈 테른을 캐스팅했습니다. 샤를리즈 테른은 최근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를 통해 강인한 여성의 진가를 보여주긴 했지만 [아토믹 블론드]가 여성 캐릭터를 내세운 만큼 액션보다는 첩보에 중점을 둘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제 예상은 여지없이 깨졌습니다. 로레인은 남성 캐릭터 못지 않은 묵직한 액션을 선보였고, 특히 영화 후반 스파이글래스를 서독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KGB 요원들과 육탄전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말 그대로 날것 그대로의 액션이 다이나믹하게 펼쳐집니다. 그러고보니 이 영화의 감독인 데이빗 레이치가 액션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을 받은 [존 윅]의 감독이었음을 깜박했습니다. 데이빗 레이치 감독은 [존 윅]의 성공으로 [아토믹 블론드]의 연출은 물론 [데드풀 2]의 감독까지 거머쥐었다고하니 앞으로의 그의 행보를 지켜봐야 겠습니다.
사첼의 정체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 (이후 영화의 스포 포함)
아무리 로레인의 날것 그대로의 육탄전이 펼쳐진다고해도 [아토믹 블론드]가 첩보영화인 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결국 로레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수행해야만합니다. 하지만 리스트는 이미 퍼시벌의 손에 들어가 버렸고, 리스트를 통째로 외우고 있던 스파이글래스는 서독으로 탈출하던 도중 KGB에 의해 죽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이중 스파이 사첼의 정체를 밝히는 것 뿐입니다. 영화의 중,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퍼시벌이 사첼임을 암시하는 장면은 더욱 노골적이 됩니다. 퍼시벌은 바흐친을 죽이고 리스트를 확보했고, KGB에게 스파이글래스 탈출 작전 정보를 일부러 흘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는 라살을 죽입니다. 이 모두가 자신이 사첼임을 감추기 위한 행동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정말 퍼시벌이 사첼일까요?
영화의 후반부 로레인은 퍼시벌을 죽이고, 그가 사첼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조작합니다. 다시말해 퍼시벌은 사첼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흐친에게 빼앗은 리스트로 사첼의 정체를 눈치챈 퍼시벌은 MI6에 보고를 하고, KGB의 도움으로 사첼을 없애려 했지만 오히려 사첼에게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첼의 정체는 바로 로레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로레인은 스파이글래스의 다리가 차에 끼었을때 적극적으로 그를 돕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스파이글래스가 서독으로 탈출하여 MI6의 손에 넘어가면 자신이 사첼임이 들통날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로레인은 CIA가 MI6에 심어 놓은 스파이입니다. MI6 내부조사에 참가한 CIA요원 에멧 커즈펠드(존 굿맨)와의 관계가 이를 증명합니다. 그녀는 MI6 요원이 되어 KGB와 내통하는 이중 스파이 사첼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로레인은 사첼이 되어야만 했을까요? 왜 CIA는 로레인을 MI6에 잠입시켰고, KGB와의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게끔 만들었을까요? 이 모든 의문은 영화 초반 [아토믹 블론드]의 야심찬 선언과 맞닿아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에 대한 진짜 이야기. 베를린 장벽은 세월이 흘러 세상이 바뀌며 자연스럽게 무너진 것이 아닌, 영국, 미국, 소련의 치열한 첩보 전쟁 끝에 무너질 수 밖에 없게끔 유도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CIA요원이면서 MI6에 잠입했고, KGB에 거짓 정보를 흘러 독일의 상황을 서방 세계에 유리하게끔 이끈 이중 스파이 사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영화의 유일한 아쉬운 점
분명 [아토믹 블론드]는 영화 초반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진짜 이유에 대해서 알려주겠다는 야심만만한 선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로레인은 KGB의 알렉산더 브레모비치를 죽이며 KGB에 가짜 정보를 흘리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수 밖에 없게끔 상황을 이끌었다고 자랑하듯이 고백합니다. 하지만 로레인의 고백에는 '어떻게'가 빠져 있습니다. 로레인이 어떤 가짜 정보를 KGB에 흘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끔 이끌었는지는 영화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막연한 로레인의 자기 자랑이 끝입니다. 이것이 [아토믹 블론드]의 유일한 아쉬움입니다.
물론 잘 압니다. 로레인이 KGB에 가짜 정보를 흘리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끔 이끄는 것들을 세세하게 잡아내려면 한편의 영화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그리고 데이빗 레이치 감독의 날것 그대로의 액션은 사라지고, CIA, KGB, MI6의 치열한 두뇌싸움만 남게 될 것입니다. 만약 제대로만 잡아낸다면 웰메이드 첩보영화가 될 수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흥행성만큼은 확실히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결국 [아토미 블론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진짜 이유보다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며칠 전 급박했던 상황을 잡아냈고,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로레인은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감추기 위해 MI6, KGB와 치열한 정보전과 목숨을 건 격투를 벌인 것입니다. 만약 [아토믹 블론드]가 데이빗 레이치 감독의 날것 그대로의 액션과 더불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각 국 스파이들의 치열한 첩보전을 잡아냈다면 어쩌면 제 인생의 첩보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영화가 끝나고나서 약간의 아쉬움은 남았지만 그래도 1시간 55분이라는 러닝타임동안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고 영화 속에 푹 빠져 즐길 수 있었던 것으로 만족해야할 것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 독일은 그에 대한 책임으로 연합군에 의해 강제로 동서가 분리된다.
하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 10월 공식적으로 통일되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는 전범국도 아니면서 남북이 분리되어야 했고,
독일이 통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전쟁 위협을 느끼며 분리되어 있는 것일까?
이 영화를 보고나니 우리나라의 상황이 더욱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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