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훈정
주연 : 장동건, 김명민, 박희순, 이종석, 피터 스토메어
개봉 : 2017년 8월 23일
관람 : 2017년 8월 23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나는 아직 구피와의 데이트가 설렌다.
제가 모태솔로였던 20대 시절, 저는 여친과 함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영화를 너무 좋아했지만 혼자 영화를 보러 갈 수는 없어서 주로 집에서 혼자 비디오로 영화를 보곤 했었습니다. 그러다 구피를 만나고 사귀면서 제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나니 구피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극장 가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고, 결국 저는 어쩔 수 없이 혼자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 했습니다. 최근에는 웅이가 구피 대신 제 극장 파트너가 되어줍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구피와 단 둘이서 오붓하게 극장에서 영화 보기를 꿈꿉니다.
지난 수요일, 저는 오랜만에 구피에게 극장 데이트를 신청했습니다. 집 근처 멀트플렉스에서 저녁 7시 30분 영화를 보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때마침 웅이와 함께 볼 수 없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 [브이아이피]가 개봉했고, 칼퇴근을 하면 영화 상영시간도 대충 맞출 수 있었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웅이가 태권도를 마치고 집에 오는 시간과 얼추 맞아서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그리고 구피도 그날만큼은 웬일로 제 극장 데이트를 승낙했습니다.
저와 구피는 7시에 만나 극장 근처 중국요리집에서 자장면 곱배기와 냉짬뽕으로 배를 채웠고, 구피가 좋아하는 어포와 과자들로 영화를 보면서 먹을 간식까지 준비했습니다. 모든 것이 계확대로 착착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나서 구피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구피는 "무슨 영화가 이렇게 긴장감이 없어?"라며 영화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고, 그러한 영화에 대한 불만은 제게 불똥이 튀었습니다. "아들과 영화보면 됐지. 꼭 나하고도 영화를 봐야 해? 사람이 왜이렇게 욕심이 많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운함이 밀려오더군요. 물론 [브이아이피]를 혼자 봤어도 되었습니다. 그랬다면 제 용돈은 훨씬 절약되었을테니까요. 하지만 아직도 저는 구피와의 단 둘만의 데이트가 가슴 설레이는 걸요. 그런데 구피는 저와의 데이트가 피곤하고 짜증이 나나봅니다. ㅜ.ㅜ
박훈정 감독의 남자 이야기는 여전하다.
사실 영화 끝나고나서 터져나온 구피의 짜증은 제가 데이트 영화를 잘 못 골랐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분명 [브이아이피]는 데이트 영화로는 낙제점인 영화이니까요. 하지만 달달한 멜로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구피의 영화 취향 탓에 데이트 영화를 고르는 것은 제게 있어서 항상 어려운 숙제였습니다. 제가 [브이아이피]를 고심 끝에 고른 이유는 장동건, 이종석 등 훈훈함이 넘치는 남자 배우들로 인하여 구피의 눈이 호강하라는 의미도 있었고, 구피 또한 [브이아이피]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브이아이피]는 구피 취향의 영화가 아닐 것임을...
[브이아이피]의 박훈정 감독은 지금까지 남성 중심의 영화를 만들어왔습니다. 그가 각본을 쓴 [악마를 보았다]와 [부당거래]는 남자 대 남자의 맞대결을 담은 영화이고, 연출 데뷔작인 [혈투]를 비롯해서 [신세계], [대호], 최근작인 [브이아이피]까지 영화의 중심은 항상 남성 캐릭터들이었습니다. 박훈정 감독의 영화에서 기억나는 여성 캐릭터라고는 [신세계]에서 송지효가 연기한 정청(황정민)의 바둑 선생 신우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우 또한 영화 중후반에 참혹한 죽음을 당합니다.
박훈정 감독의 영화 세계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이며, 비열하고, 잔인합니다. [브이아이피]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브이아이피]를 이끌어나가는 캐릭터는 북에서온 VIP 김광일(이종석)과 그를 둘러싼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 강력계 형사 채이도(김명민), 북한 보안성 요원 리대범(박희순) 그리고 CIA요원 폴(피터 스토메어)입니다. 그들 사이에서 여성 캐릭터가 끼어들 자리는 없습니다. [브이아이피]에서의 여성은 그저 김광일의 범죄에 의한 희생자일 뿐입니다. 그 여성이 일반인이든, 국정원 요원이든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영화에서 여성 관객이 재미를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적 재미보다 김광일에 의해 여성 캐릭터들이 잔인하게 살해를 당했을 때 느끼는 분노가 더 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박훈정 감독이 노리고 있는 것 역시도 그러한 분노였을 것입니다.
정글과도 같은 사회에서 약한 자는 언제나 당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가끔 잔인한 살인마에 대한 섬뜩한 뉴스를 보곤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잔인한 살인마에 의한 희생자는 여성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제사건인 '화성연쇄살인사건'도 그러하고,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강남역 살인사건'도 일면식도 없는 23세 여성을 대상으로한 묻지마 범죄였습니다. 범죄자들은 자신보다 힘이 약한 여성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우리는 현대 사회를 정글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정글에서는 포식자들이 초식 동물을 잡아먹습니다. 나약할수록 포식자들의 타깃이 되기 쉽고, 포식자의 타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만합니다. 그러한 정글의 법칙은 [브이아이피]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김광일은 북한 사회에서 정글의 포식자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 고위 관리이기에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그는 그러한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마구잡이로 살인을 저지릅니다. 범죄의 대상은 주로 나약한 여성이지만, 가끔은 피해자의 가족까지 범죄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가 그렇게 미치광이처럼 날뛰어도 아무도 그의 죄를 물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김광일에게 천적이 나타납니다. 자신의 무소불위의 권력에 불복하며 맞서는 리대범이 그의 천적입니다. 김광일은 잘 압니다. 정글의 포식자로 계속 남으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천적을 없애야 한다는 사실을...
북한에서는 아예 대놓고 범죄를 저질렀다면 아버지의 권력이 통하지 않는 홍콩이나 러시아에서는 은밀하게 여성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국정원과 CIA의 기획으로 대한민국에 온 김광일은 처음엔 홍콩, 러시아에서 그러했듯이 은밀하게 범죄를 저지릅니다. 하지만 그는 깨닫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자신은 포식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대한민국은 정글의 약자이다.
대한민국에서 벌인 김광일은 연쇄살인은 끈질긴 강력계 형사 채이도에 의해 꼬리가 잡힙니다. 그런데 아무리 채이도가 발버둥을 쳐도 김광일을 쉽게 법정에 세우지 못합니다. 김광일의 범죄가 드러날 경우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을 염려한 국정원에서 김광일을 비호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국정원의 뒤에는 김광일의 아버지가 중국에 숨겨둔 거액의 비자금을 탐내는 CIA가 있습니다. 북한에서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마구잡이로 살인행각을 벌였던 김광일. 대한민국에서는 그러한 권력이 통하지 않을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대한민국에서도 자신의 권력이 통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후부터 김광일의 범죄는 대담해집니다. 자신을 감시하는 국정원 여성 요원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질러 놓고 그래도 죽이지는 않았다며 미소짓고, 수 많은 국정원 요원과 CIA 요원이 있는 앞에서 자신의 천적인 채이도를 총으로 쏴버립니다. 그래도 그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내가 아무리 이래도 니까짓거들은 날 잡아 가두지 못하잖아?" 영화 초반, 김광일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여성 캐릭터를 보며 여성 관객들이 분노를 느꼈다면, 영화 후반 그깟 몇푼의 비자금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범죄를 휘두르는 김광일의 모습에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분노의 정체는 약함에서 오는 비애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평등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커가면서 결코 사회는 평등하지 않다는 불편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권력(북한)이 있다면, 돈(대한민국)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위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과 맞서려는 천적을 응징해도 벌을 받지 않습니다. 김광일에게 원리원칙대로 맞서 싸웠던 채이도와 리대범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에 대한 분노입니다.
박훈정 감독, 카타르시스에 눈을 뜨다. (이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언급합니다.)
영화를 보고 속시원한 쾌감을 느낀 관객 중에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라는 표현을 하곤합니다. 카타르시스란 슬프고 비참한 모습이 해소된 이후 느끼는 쾌감을 뜻합니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을 목표로 제작되는데, 영화의 주인공이 온갖 슬픔과 역경을 딛고 해피엔딩을 맞이할 때 관객이 느끼는 행복감이 바로 카타르시스입니다. 그런데 박훈정 감독의 영화는 그러한 카타르시스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박훈정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비열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거나, [신세계]의 이자성(이정재)처럼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또다른 역경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박훈정 감독의 영화는 어둠을 뜻하는 느와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브이아이피]는 조금 다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는 기존의 박훈정 감독의 영화처럼 카타르시스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김광일을 끝까지 뒤쫓은 채이도는 김광일의 총에 맞아 쓰러지고, 끈질긴 집념으로 김광일을 잡아 북으로 이송하던 리대범은 김정일의 죽음으로 북한 정세가 뒤바뀌자 결국 김광일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영화의 카타르시스를 위해서라면 김광일은 벌을 받아야하고, 김광일을 뒤쫓은 채이도, 리대범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하지만 [브이아이피]는 박훈정 감독의 영화가 항상 그러하듯이 정반대의 상황으로 관객을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그런데 마지막 반전은 에필로그에서 벌어집니다. 국정원 요원인 박재혁은 김광일을 납치해 달라는 CIA요원 폴의 요청으로 홍콩의 김광일 은신처에 홀홀단신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박재혁은 예상과는 달리 김광일을 폴에게 데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죽여 버립니다. "내게 이러면 안되는거 아니냐?"라고 항변하는 김광일에게 박재혁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깁니다. 그리고 박재혁에게 '미쳤냐?'라고 윽박지르는 폴에게 멋지게 한방 먹여버립니다. 그 순간 저는 카타르시스를 진하게 느낀 것입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브이아이피]는 프롤로그, 용의자, 공방, 북에서 온 귀빈 VIP, 에필로그 등 5개의 챕터로 나뉩니다. 그 중 우리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롤로그는 뒤에 진행될 본편의 시작을 뜻하는 장면을 말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에필로그는 후일담 또는 영화를 보충하는 마지막 장면을 의미합니다. [브이아이피]의 프롤로그는 2013년 홍콩이 배경입니다. CIA요원 폴에 의해 북의 VIP를 납치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국정원 박재혁이 VIP의 은신처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영화는 곧바로 5년전 김광일이 북한에서 벌인 엽기적인 살인 행각과 이를 뒤쫓는 리대범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프롤로그가 영화의 시작을 뜻하는 만큼 저는 당연히 2013년 홍콩 장면이 김광일을 대한민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국정원과 CIA의 기획 장면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박훈정 감독은 에필로그를 통해 프롤로그의 장면이 영화의 시작이 아닌, 끝의 장면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박재혁의 단죄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영화 후반부에 김정일의 죽음이 언급되었고, 김정일은 2011년 12월에 죽었음을 감안한다면 2013년 홍콩을 담은 프롤로그가 영화의 첫장면인 것은 애초부터 말이 안되는 설정이었던 셈입니다.
솔직히 [브이아이피]에 대해서 평가를 한다면 [신세계]보다는 약했던 박훈정표 느와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피의 투덜거림대로 김광일의 잔인한 범죄는 있지만, 그에 대한 긴장감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카타르시스에 대한 진화는 있었습니다. 에필로그가 없이 영화가 끝났다면 결코 김광일을 처단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며 짙은 여운이 남았겠지만 영화를 보고난 후의 찝찝함도 함께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박훈정 감독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에필로그를 통해 박훈정표 느와르에 카타르시스가 가미되는 진화를 이루었음을 선언한 셈입니다. 다음 영화에서는 카타르시스와 더불어 [브아이피]에 부족했던 긴장감을 좀 더 가미한다면 박훈정의 영화 세계는 더욱 완벽해질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중요한 사람,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중요하고, 누구도 법 앞에서 평등해야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을 뜻하는 V.I.P. 라는 계급은 사라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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