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짧은영화평/2017년 아짧평

[어느날] - 판타지 멜로로 포장된 존엄사에 대한 가벼운 고찰

쭈니-1 2017. 6. 13. 10:52

 

 

감독 : 이윤기

주연 : 김남길, 천우희

개봉 : 2017년 4월 5일

관람 : 2017년 6월 10일

등급 : 15세 관람가

 

 

이윤기 감독식의 멜로... 이번엔 다를까?

 

제가 이윤기 감독의 영화와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여자, 정혜]였습니다. 김지수, 황정민을 주연으로 내세웠던 이 영화는 정혜(김지수)의 답답한 일상으로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매우 잔잔하면서도 독특한 영화였습니다. 이후 이윤기 감독의 영화는 항상 그런 식이었습니다. 전도연과 하정우가 주연을 맡은 [멋진 하루]가 그나마 이윤기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임수정, 현빈을 내세운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전도연, 공유 주연의 [남과 여]도 상업영화와는 거리가 먼 잔잔함을 내세울 뿐입니다.

이윤기 감독 영화의 특징은 멜로 장르에 속해 있고, 스타급 배우를 내세웠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 멜로 영화와는 다르게 아름다운 사랑을 그리기 보다는 잔잔하고 먹먹함으로 영화를 이끌어나갑니다. 지난 4월에 개봉한 [어느날]도 정확히 그러합니다.

사실 [어느날]의 줄거리를 처음 읽었을 땐 이윤기 감독이 이번엔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날]은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윤기 감독의 영화가 잔잔하더라도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여자의 영혼을 보게된 남자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이윤기 감독의 영화와는 다른 특별한 영화적 재미를 안겨줄 것이라 생각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 생각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안보이는 그녀가 내 눈엔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가 죽은 후 삶의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보험회사 과장 강수(김남길)는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시각장애인 미소(천우희)의 사건을 맡게 됩니다. 가해자가 사장 친구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어서 빨리 피해자 가족과 합의를 해야만하지만 미소는 고아이기에 합의 또한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강수는 자신이 미소라고 주장하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녀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소의 영혼이라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처음 강수는 미소의 존재에 당황하지만 그녀에게 측은함을 느끼게 되고,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동행에 나섭니다. 

미소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에서, 그것도 시각장애인 지팡이도 없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에 의구심을 품은 강수는 현장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미소가 교통사고가 났던 날의 진실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린 어머니(정선경)를 찾아갔고, 어머니가 또다시 자신을 거부하자 그 충격에 지팡이도 없이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강수는 미소를 위해 미소의 어머니를 찾아가 미소의 병상을 지켜달라고 부탁합니다.

강수의 끈질긴 설득 끝에 미소의 어머니는 혼수상태가 된 미소의 병상을 지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힘든 모습을 지켜본 미소는 강수에게 마지막 부탁을 합니다. 이미 오랜 투병 끝에 아내를 잃은 경험이 있는 강수는 미소의 마지막 부탁에 힘들어하지만 그녀의 부탁을 결국 들어줍니다.

 

 

 

존엄사... 당신은 찬성할 수 있는가?

 

애초부터 이윤기 감독의 영화의 가벼운 판타지 멜로 영화일 것이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틀렸습니다. 사실 [어느날]은 중반까지 가벼운 판타지 멜로의 길을 걷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처음 본 미소의 천진난만한 표정과 이 모든 것이 귀찮기만한 까칠한 강수의 표정. 그리고 미소의 부탁에 못이겨 미소의 유일한 친구인 선화의 결혼식에 참석하게된 강수의 당황스러움 등, 이윤기 감독의 영화답지 않게 [어느날]은 소소한 재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 미소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강수와 사랑을 이룬다면 판타지 멜로 영화로써 완벽한 마무리를 짓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날]은 그러한 판타지 멜로 영화다운 결말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미소는 강수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합니다. 다시말해 존엄사를 선택한 것이죠. 존엄사란  생명을 연장하는 연명치료를 중단함으로서 자연사를 유도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정서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위입니다. 물론 2009년에 우리나라도 존엄사를 허용한 판결이 있긴 하지만 [어느날]의 존엄사는 가족의 결정이 아닌 타인에 불과한 강수의 결정이라는 측면에서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끝맛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윤기 감독은 강수의 선택에 관객의 공감을 얻기 위해 많은 장치를 해놓았습니다. 강수 아내의 죽음과 미소의 영혼이 강수의 눈에만 보였던 이유도 강수의 선택에 대한 명분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집안일을 하며 간간히 영화를 보던 구피가 "저건 범죄잖아."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강수의 행동은 일반적인 판단기준으로는 엄연한 살인행위입니다. 암튼 가벼운 판타지 멜로를 기대하신 분이라면 영화 후반 존엄사에 대한 이윤기 감독의 뜬금없는 고찰에 많이 당황했을 영화입니다. 가벼운 판타지 멜로 영화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 저 역시 그러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