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스티븐 J. 앤더슨
더빙 : 안젤라 바셋, 폴 버처, 제시 플라워, 할랜드 윌리암스
개봉 : 2007년 4월 19일
관람 : 2007년 4월 22일
등급 : 연소자 관람가
웅이보다 내가 보고 싶었던 애니메이션
"이번 주에 아빠랑 [로빈슨 가족] 보러 가자."
[로빈슨 가족]의 개봉 소식을 들은 저는 웅이와 며칠 전부터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한다면 웅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답니다. 누가 남자 아이 아니랄까봐 [로보트 태권 V]에 흠뻑 매료되어 있는 웅이는...
"[로빈슨 가족]에 태권 V 나와?" 라며 묻습니다.
"아니 그 대신 팔 짧은 공룡이 나와. 재미있겠지?" 라며 웅이가 좋아하는 공룡까지 들먹이고 애써 웅이의 관심을 끌어보려 노력 했습니다. 하지만 웅이는...
"보러가지 뭐." 라며 마치 '아빠가 그렇게 보고 싶다면 내가 함께 가 줄께'라는 표정으로 말합니다.
사실 맞습니다. [로빈슨 가족]은 '웅이를 위해'라는 명분으로 보러간 영화이지만 픽사의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는 저로써는 웅이보다도 제가 먼저 보고 싶었던 영화임에 분명합니다.
게다가 입체안경을 쓰고 보는 3D애니메이션이라니... [슈퍼맨 리턴즈]에서 잠시 맛 뵈기로 입체안경을 경험하긴 했지만 영화 전체를 입체안경을 쓰고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전 어린 아이처럼 설렜습니다.
그렇게 아빠를 위해 억지로 극장에 끌려나온 웅이는 예상대로 중반부터 영화에 흥미를 잃기 시작합니다. 하긴 5살짜리 어린 아이가 보기엔 [로빈슨 가족]의 복잡한 스토리 라인은 쫓아가기에 벅찼을 겁니다. 급기야 어지럽다며 입체안경을 벗어버린 웅이는 그래도 영화에 몰두하는 절위해서 나가자고 보채지는 않고 "영화 언제 끝나?"라며 지루한 표정만 지어 보이더군요.
영화가 끝나고 "영화 재미있었어?"라는 철없는 아빠의 질문에 "재미있었지 뭐."라며 접대성 멘트를 날려주는 우리 귀여운 웅이. 다음 계획은 웅이와 [닌자거북이 TNT]를 보는 것이었지만 아직 웅이에게 무리라는 판단아래 이번엔 제가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3D 애니메이션의 혁명을 이루었던 픽사의 추억
제가 [로빈슨 가족]을 기대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픽사라는 존재 때문입니다. 디즈니의 [인어공주]를 통해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재미에 눈을 뜬 저는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에 이르기까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라면 극장에서 꼭 챙겨보던 열렬 팬이었습니다.
하지만 [라이온 킹]을 기점으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타잔]을 마지막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보는 것을 포기하기에 시작했고요.
바로 그때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바로 [토이 스토리]였습니다. 3D 애니메이션에 익숙하지 못했던 저는 [토이 스토리]의 개봉 소식을 듣고 디즈니가 점차 아이들 취향으로 변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뒤늦게 비디오로 보게 된 [토이 스토리]는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그 이후 [벅스 라이프],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인크레더블]로 이어진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채워주며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즐거움 속으로 절 다시 빠뜨려 놓았습니다.
사실 픽사와 디즈니는 따로 떨어뜨려 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긴밀한 관계입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디즈니가 배급을 맡고 있었으니 신생 회사인 픽사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안정된 배급을 보장받고, 셀 애니메이션의 쇠락과 함께 더 이상 애니메이션의 강자가 될 수 없었던 디즈니는 픽사의 새로운 3D 애니메이션을 통해 드림웍스 등의 거센 도전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카]의 개봉쯤 디즈니와 픽사의 결별 소식이 들려오더니만 어느새 픽사가 디즈니와 합병을 했더군요. 한동안 인터넷 뉴스를 멀리했던 저로써는 이 충격적인 뉴스를 뒤늦게 알게 되었답니다. 저로써는 디즈니는 디즈니대로 픽사는 픽사대로 각각의 개성에 맞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픽사가 디즈니와 합병된 지금 그러한 것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장 픽사와 디즈니가 합병된 후 처음 공개된 픽사, 아니 디즈니의 3D 애니메이션 [로빈슨 가족]이 바로 제 우려를 고스란히 나타낸 예입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이제 없는가?
디즈니의 쇠락과 픽사의 부각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물론 수많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관객의 취향이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에서 3D 애니메이션으로 옮겨간 것도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상상력의 차이가 디즈니와 픽사의 운명을 갈라놓은 가장 큰 이유인 듯 합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기반은 바로 동화입니다. 초창기 디즈니는 [피노키오], [피터 팬], [백설 공주]등 수많은 걸작 동화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붐을 일으켰던 [인어공주]와 [미녀와 야수], [알라딘] 역시 동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디즈니의 기반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소재가 떨어지기 시작한 거죠. 이에 디즈니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으로 실존했던 여성을 소재로 한 [포카혼타스], 중국의 설화인 [뮬란] 그리고 하와이 소녀 릴로와 말썽꾸러기 외계인 스티치의 우정을 다룬 [릴로 & 스티치] 등 새로운 소재 찾기를 꾸준히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영화들은 [라이온 킹]으로 절정에 올랐던 디즈니의 옛 영광을 되찾아주지는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 [토이 스토리]라는 창조적인 캐릭터와 스토리 라인을 들고 등장한 픽사는 매번 새로운 이야기로 관객들을 사로잡습니다. 장난감, 곤충, 옷장 속 괴물, 바다 속 물고기, 한물간 슈퍼 히어로, 경주용 자동차 등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재들은 새로운 상상력이라는 결코 마르지 않은 샘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연인지 픽사가 디즈니와 합병된 후 발표한 첫 영화인 [로빈슨 가족]은 윌리엄 조이스의 일러스트 동화 'A DAY WITH WILBUR ROBINSON'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작을 통해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던 픽사의 이전 작품들과는 약간 다른 양상을 보인 거죠.
픽사여, 제 갈 길을 가라!
당연하지만 원작이 있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보다는 성공이 보장된 안정된 이야기를 선호하는 거대 영화사의 취향을 고려해볼 때 픽사의 창조적인 3D 애니메이션이 디즈니와 합병 후에도 계속 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물론 [로빈슨 가족]이 그렇다고 해서 너무 뻔한 스토리로만 일관하는 그런 영화는 아닙니다. 창조적인 미래의 풍경이라던가,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악당,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캐릭터들의 향연들은 픽사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하지만 디즈니와의 합병 소식을 들은 이후의 선입견 때문인지, 예전 픽사의 애니메이션에서 느꼈던 그 짜릿했던 재미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토이 스토리]를 보며 동심의 세계에 젖어 들 수 있었고, [벅스 라이프]를 보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놀라운 기분이 들었으며, [몬스터 주식회사]를 보며 어렸을 적 제 상상력이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목격했고, [니모를 찾아서]를 보며 원색의 화려함과 부성애의 감동을 함께 느꼈으며, [인크레더블]을 보며 제가 좋아하는 슈퍼 히어로와 애니메이션의 절묘한 만남에 환호했고, [카]를 보며 그 사실적인 스피드에 입을 다물 수 없었던 저는 [로빈슨 가족]에게는 뭐라 딱히 집어낼 수 있는 이 영화만의 특징, 혹은 재미를 찾아내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앞으로 만들어질 픽사의 라인업을 보니 [토이 스토리 3]가 있더군요. 속편 제작이 요즘 할리우드의 트렌드인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설마 픽사마저 [인크레더블 2], [니모를 찾아서 2] 등 속편으로 일관하지는 않겠죠? 부디 제 이런 걱정이 단지 기우이기를 빌며 픽사의 다음 애니메이션을 또다시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