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7년 영화이야기

[석조저택 살인사건] - 가면을 쓰더라도 내 자신의 본모습을 잃지 않으면 된다.

쭈니-1 2017. 5. 15. 16:44

 

 

감독 : 정식, 김휘

주연 : 고수, 김주혁, 임화영, 박성웅, 문성근

개봉 : 2017년 5월 9일

관람 : 2017년 5월 12일

등급 : 15세 관람가

 

 

사회생활을 위해 내 자신을 감추다.

 

저는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행여 거짓말을 하더라도 거짓말이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때문에 스스로 상대방에게 내 거짓말을 고백하는 바보입니다. 그러한 성격 때문에 사회 생활에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제 얼굴엔 싫고 좋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데 직장상사가 싫으면 얼굴에 "난 네가 싫어."라는 반항기 가득한 표정이 고스란히 묻어나 직장상사와의 불화가 많았고, 그로인해 회사를 그만둬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사회 생활을 하다보니 제 단점은 어느정도 보완되었습니다. 직장상사의 비위를 맞출줄도 알게 되었고, 직장상사가 싫어도 얼굴에 티내지 않게 하는 방법도 터득했습니다. 이제 제겐 부양해야할 가족이 있는 만큼 내 스스로 사회생활에 적합하게 진화되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난 금요일은 그러한 제 진화의 결정판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부양해야할 가족이 없었다면, 저는 반항기 가득한 표정으로 제 직장상사에게 반항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꾹 참았습니다. 그리고 제 반항심이 얼굴에 묻어나기 전에 외근을 핑계로 회사를 벗어났습니다. 그날 저는 점심도 굶어가며 거리를 배회했고, 회사로 복귀했을땐 어느정도 평정심을 찾은 후였습니다. 하지만 참기만한다면 병이됩니다. 스트레스는 바로 바로 풀어줘야하는 법이죠. 그래서 오랜만에 영화를 봤고, 밤에는 구피와 술한잔을 했으며, 토요일에는 웅이와 야구장에 가서 목청껏 응원을 하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렸습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법정씬

 

그날 제가 스트레스를 날리기 위해 본 영화는 [석조저택 살인사건]입니다. 사실 제가 봐야할 우선순위 영화는 [에이리언 : 커버넌트]와 [보안관]이었지만 제 속마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회사생활을 해야하는 제 처지와 [석조저택 살인사건]의 주인공들의 처지가 비슷해서 이 영화가 더욱 땡겼습니다. 실제로 [석조저택 살인사건]에는 자신을 감춰야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입니다. 해방 후 경성이 배경인 이 영화에서 경성 최고의 재력가 남도진(김주혁)은 친일파였던 과거를 숨겨야 하고, 남도진의 운전수인 최승만(고수)은 남도진에 대한 복수심을 숨겨야합니다.

[석조저택 살인사건]은 1945년 마술사인 이석진(고수)이 우연히 정하연(임화영)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과 1948년 운전수 최승만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남도진의 재판과정을 교차하며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미스터리한 '석조저택 살인사건'의 진실을 조금씩 밝혀나가는 형식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해서 이 영화의 법정씬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합니다. 

현장에는 시체를 태운 흔적과 핏자국이 있고, 최승만의 잘려나간 손가락이 송태석(박성웅)검사측의 증거로 제출됩니다. 남도진의 변호사인 윤영환(문성근)은 시체가 없다는 이유로 남도진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만약 이 영화가 잘만든 법정 스릴러가 되려면 송태석과 윤영환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윤영환이 주장하는 것은 시체가 없다는 것뿐 다른 무기를 내세우지 못하는 반면, 송태석은 새로운 증거들을 계속 제시합니다. 결국 1948년 재판과정은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석조저택 살인사건'의 최초 신고자의 마지막 반전은 너무 뻔하기까지합니다.

 

 

 

자신을 감춰야만 했던 사람들 (이후 영화의 스포 다수 포함)

 

이렇게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진 법정씬과 너무 뻔한 마지막 반전이 저를 실망시켰지만, 그래도 이석진과 정하연의 사랑을 담은 1945년 장면은 꽤 좋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제가 애초에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자신을 감추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딜레마가 잘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술사가 되기 전 이석진의 직업이 삐에로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삐에로는 진한 분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커스 공연 전에 관객을 웃기는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슬프고, 아무리 괴로워도 삐에로는 항상 웃는 표정을 짓고 있으며, 삐에로의 본모습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삐에로는 결국 이석진이 처한 상황입니다. 그는 정하연과 사랑을 했지만, 정하연은 과거에 쫓기다 살해당합니다. 오랜세월 정하연을 살해한 남도진을 뒤쫓던 이석진은 3년간의 추적 끝에 남도진을 찾아내고, 완벽한 복수를 위해 다시 삐에로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이석진은 최승만이 되어 남도진에게 굽신거리며 삐에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합니다.

하지만 삐에로가 되어야 했던 것은 비단 이석진 뿐만이 아닙니다. 남도진은 물론 정하연도 자신을 감춰야만 했던 삐에로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제의 패망으로 친일파의 과거를 지워야 했던 남도진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며 자신을 감춰나갔고, 과거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정하연은 이석진의 품에서 과거를 감추려합니다.

 

 

 

상대방의 가면속 본모습보다 중여한 것은 내 자신의 진심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정하연의 본모습니다. 이석진이 알고 있는 정하연은 남도진에게 삼촌을 잃고, 혼자 도망친 가녀린 여성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 성마담(박지아)에 의해 밝혀지는 정하연의 본모습은 술집 호스테스이며 남도진의 내연녀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모습을 가장 철저하게 감춘 것은 복수를 위해 최승만이라는 이름으로 남도진의 운전수가된 이석진도,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며 스스로 과거를 지워나가는 남도진도 아닌 정하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정하연의 정체를 알게된 이석진은 한가지 의문을 갖게됩니다. 과연 자신에 대한 정하연의 사랑은 진실된 것일까?라는... 그것만이라도 진실이길 바라는 이석진은 남도진과의 혈투 와중에도 정하연의 진심이 담긴 편지를 움켜잡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 편지를 펼치지 못합니다. 이미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정하연의 본모습이 아닌, 정하연을 사랑했던 자신의 본모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석진의 마지막 선택은 굉장히 의미심장했습니다. [석조저택 살인사건]의 주인공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면 속에 숨겨진 본모습이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이석진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상대방의 가면속 본모습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내 자신의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의 본모습만 잊지 않는다면 아무리 거짓된 세상을 살더라도 자기 자신만큼은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이석진은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을 감추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다.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관객들을 웃겨야 했던 삐에로 이석진은 이후 마술사가됩니다. 이석진은 정하연에게 마술사는 보이는 것을 감추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직업이라고 소개합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관객들은 마술사의 빠른 손돌림으로 보이는 것을 놓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고 착각하며 마술사의 마술에 박수를 보냅니다. 

스릴러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객에게 보이는 것을 감추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함으로써 마지막 반전을 감춰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석조저택 살인사건]은 뛰어난 법정 스릴러영화라고 하기는 힘듭니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석조저택 살인사건'의 진실을 감추려했지만 그러한 의도가 너무 뻔히 보였기 때문에 오히려 보이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하지만 '석조저택 살인사건'의 동기가 된 1945년으로 화면이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석진은 자신을 감추고 있는 가면을 쓴 정하연, 남도진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복수를 위해 스스로 가면을 쓰는 선택을 하지만 결국엔 자신의 본모습을 잃지 않음으로써 최종 승자가 됩니다. 보이는 것을 감추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해야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거짓 속에서도 자신의 본모습만큼은 지켜나가는 것이 아닐까요? [석조저택 살인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회사생활을 위해 본모습을 감춰며 살아야만 하는 내게 작은 위안이 되었던 영화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쩔수없이 가면을 쓰고 내 자신을 감춰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 좌절하지 말자.

비록 어쩔수없이 가면을 쓰더라도 내 자신을 잃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