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정우
주연 : 김남길, 김영애, 문정희, 정진영, 이경영, 김명민
개봉 : 2016년 12월 7일
관람 : 2016년 12월 11일
등급 : 12세 관람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안녕한가?
지난 12월 3일, 저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6차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웅이의 손을 잡고 광화문 광장에 갔습니다. 아쉽게도 하지동맥류 수술을 한 구피는 함께 하지 못했지만 집에서 저와 웅이를 응원해줬습니다. 사실 저는 집회 참가가 처음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매운 최루탄 가스 때문에 데모를 하는 형, 누나들 미웠고, 젊었을 때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IMF를 겪고 나서야 정치라는 것이 제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깨달았고, 투표만큼은 한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가했지만 집회 참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처음으로 촛불 집회에 다녀온 것입니다. 그것도 웅이와 함께 말이죠. 그만큼 저는 현 시국이 심각하다고 느꼈고, 웅이에게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물려 주기 위해서라도 더이상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일찌감치 광화문에 도착했지만 광화문 광장은 이미 발디딜 틈도 없이 수 많은 사람들이 물려 있었습니다. 저처럼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촛불 집회에 참여하신 분들도 많았고, 어린 학생들도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젊은 시절 정치에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형, 누나들을 미워했던 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오후 4시경 촛불 집회 참가자들은 청와대 앞으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날은 법원에서 처음으로 청와대 100M 앞인 효자치안센터까지 행진을 허용했습니다. 당연히 저도 효자치안센터로 행진을 하고 싶었지만, 막상 제 발길은 청와대 200M앞인 청운효자동 주민센터로 향했습니다. 사실 제가 효자치안센터가 아닌 청운효자동 주민센터를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길이 고등학교 시절 등교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1992년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당시만해도 노태우 대통령이 집권하던 군사정권 시절이기 때문에 청와대에서 가까운 저희 학교 등교길에는 권총을 소지한 사복 경찰들과 흔하게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학교 주변에는 그 흔한 분식점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24년이 흘러 추억의 등교길을 다시 찾으니 예전과는 거리 풍경이 많이 달라졌더군요. 상업시설이 많이 들어선 것을 보며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펐습니다. 추억의 이 거리를 찾은 이유가 하필 정권 퇴출을 위한 집회 때문이라니... 웅이와 함께 등교길을 천천히 걸으며 학창 시절의 추억도 이야기하고, 모교도 방문하고 싶었지만, 그날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추억의 거리에서 모교를 눈 앞에 두고, 저는 청와대를 향해 '박근혜 퇴진'을 목청껏 외쳐야만 했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언젠가 꼭 웅이와 함께 행복한 마음으로 이 거리를 다시 찾겠다는 다짐하면서 말입니다.
원전사고에서 우리나라는 안전한가?
2011년 3월 11일 규모 9.0의 대지진이 일본 동북부 지방을 강타했습니다. 그로인하여 후쿠시마 원자로 1~3호기의 전원이 멈췄고, 설상가상으로 대지진에 의한 쓰나미가 발생하면서 원자로를 식혀 주는 긴급 노심냉각장치가 작동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결국 3월 12일 1호기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났고, 14일에는 3호기에서, 15일에는 2호기에서 수소폭발 및 4호기 폐연료봉 냉각보관 수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까지 공포에 떨게 했던 후쿠시마 원전사고입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원인은 결국 대지진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지진으로부터 안전하기 때문에 일본과 같은 원전사고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9월 12일 경상북도 경주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함으로써 우리나라가 더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님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대형 방사능 유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판도라]는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이 발생하면서 원자력 발전소가 원자로가 폭발하는 상황을 담은 재난영화입니다. 지난 여름방학때 방사능의 위험에 대한 교육을 받았던 웅이가 개봉 전부터 꼭 봐야할 영화라고 콕 찝어서 기대했던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감기몸살로 병원에 다녀왔던 저는 [판도라]만큼은 봐야겠다는 생각에 아픈 몸을 이끌고 웅이와 함께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판도라]를 굉장히 재미있게 봤습니다. 솔직히 객관적 완성도를 따진다면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운 영화였습니다. 재난영화의 공식을 너무 충실하게 따랐고, 영화 후반부에는 과도한 신파로 관객의 눈물을 쥐어짜겠다는 의도가 너무 뻔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객관적 완성도와는 별도로 영화적 재미만 놓고 본다면 현 시국에 딱 알맞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지진으로 인한 원전사고라는 [판도라]의 소재 자체가 현 시점에서 아주 적절했습니다. 경주 지진 당시에도 우리 국민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경주에서 약 27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월성원전 1~4호기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라는 부분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정부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다고 발표했지만 언제 더 강력한 지진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국민의 불안감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판도라]는 경주 지진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에 기획된 영화이지만 시기적절하게 문제제기를 한 셈입니다.
그리고 원전사고에 대처하는 정부의 무능함도 세월호 참사 당시 보여준 박근혜 정부의 무능함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물론 재난영화에서 재난 컨트롤타워의 무능함은 이제 공식과도 같습니다. 만약 그들이 제대로 재난을 컨트롤한다면 재난 영화 자체가 형성이 되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도라]를 보며 지금 현재 우리나라를 떠오를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대통령의 무능함이 가져온 비극
지금 현재 우리나라 국민의 최대 관심사는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감춰진 7시간 행적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304명이 희생된 이 끔찍한 참사가 벌어졌던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이 국민으로써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굿을 했다, 미용 시술을 받았다는 등 온갖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지만, 아직까지 청와대 측은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박정우 감독이 의도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판도라]에서도 현 시국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우선 영화 속 강석호(김명민) 대통령과 총리(이경영)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우유부단한 강석호 대통령을 제치고 청와대의 실질적인 권력은 총리가 움켜쥐고 있는 것으로 영화에서는 설정되어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초부터 정윤회, 최순실 등 비선실세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된 것과 맥락이 같습니다.
[판도라]에서 총리는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것들을 철저하게 사전 검열합니다. 그로인하여 원전사고 위협에 대한 평섭(정진영)의 보고서가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영부인(김혜은)을 통해 평섭의 보고서는 대통령에게 전달되지만, 총리는 오히려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해 그러한 문제들은 무시하라며 설교하듯 충고합니다.
지진에 의한 원전사고가 발생했을 때에도 총리는 모든 보고를 대통령이 아닌 자신을 통해 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재난 컨트롤타워를 장악합니다. 결국 무기력함을 느낀 대통령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집무실에서 실의에 빠져 버립니다. 물론 영화에서는 영부인의 따끔한 한마디에 대통령이 정신 차리고 다시 재난 컨트롤타워를 장악하며 원전사고의 대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우리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이 끝까지 입을 굳게 다문다면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한 미스터리를 결국 알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정말 미용 시술을 받았는지, 아니면 [판도라]의 강석호 대통령처럼 망연자실하며 두손 놓고 집무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는지 결코 알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가지만큼은 확실합니다. 대통령의 무능력이 국민에겐 굉장한 비극이라는 사실말입니다.
영부인의 한마디에 정신을 차린 대통령은 평섭에게 이 재난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냐고 묻습니다. 대통령의 전화에 평섭은 "이제서야 관심을 가지셨을까?"라며 묻습니다. 하지만 [판도라] 속 강석호 대통령과는 달리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까지 세월호 참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세월호 참사는 그저 해상 교통사고일 뿐이라는 여론조작과 책임전가로 외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 국민은 원전 사고를 당한 [판도라] 속의 대한민국 국민보다 더 불행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잘 사는 세상보다 안전한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
[판도라]에서 주목해야할 캐릭터는 바로 재혁(김남길)의 어머니인 석여사(김영애)입니다. 그녀는 원전 사고로 남편과 큰 아들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정책을 철썩같이 믿고 따릅니다. 솔직히 저희 아버지도 그러셨습니다. 제가 인공 조미료는 몸에 안좋다고 아버지께 말해도 저희 아버지는 몸에 안좋은 것을 정부에서 허가해을리가 없다며 제게 미원 비빕밥을 해주시곤 했습니다.
어쩌면 한국전쟁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살아야 했던 분들에게는 당연한 믿음일지도 모릅니다. 굶어 죽는 상황에서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는 이유만으로 아직도 독재자인 박정희 대통령을 숭배하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아마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아버지의 후광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석여사의 캐릭터는 지극히 정상적인 우리 시대 노년층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원전 사고가 발생하고 정부가 국민을 내팽겨치자 며느리인 정혜(문정희)는 이 모든 것이 어머니 때문이라며 원망합니다. 진작에 멀리 도망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정부를 믿고 정부가 하라는대로 따랐기 때문에 죽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석여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후회합니다. 지난 촛불집회 당시 보수층이라 할 수 있는 연세많은 분들이 많이 참가했던 것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입니다.
한때 우리나라는 너무나도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 문제만 해결해준다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독재를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적도 분명 있었습니다. 독재자가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 아무 죄 없는 국민들을 탄압하고 죽여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오히려 빨갱이들이라고 손가락질 했던 적도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우리에게 직면한 문제는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이상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이제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한때는 개, 돼지처럼 배불리 먹는 것이 행복이었지만, 이제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어나가야할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재혁은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잘 사는 세상을 물려 줄 것인가? 아니면 안전한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원자력 발전소는 손 쉽게 대량의 전기를 얻을 수 있는 시설이지만, 안전성에서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나라들은 원자력 발전소를 점차 줄여 나가며 친환경적인 시설로 교체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잘 사는 나라에 대한 집착이 강한 우리나라만큼은 원자력 발전소를 늘려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잘 살면 뭐합니까? 안전하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판도라]를 본 후 해맑은 웅이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웅이에게 나는 안전한 세상을 물려 주고 싶다는...
마지막 신파만 잘 조절했더라면...
앞서 언급했듯이 [판도라]는 객관적인 영화적 평가에서는 분명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영화 자체가 너무 예상했던 그대로 흘러갑니다. [연가시]로 재난영화의 흥행을 맛본 박정우 감독은 너무 안전하게 재난영화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간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서 재혁의 모습은 재난영화에 꼭 등장하는 서민적인 히어로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의 신파는 너무 과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판도라]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의 구조를 믿고 배 안에서 기다렸을 희생자들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고, 재혁의 마지막 울부짖음이 세월호 희생자들의 울부짖음 같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에게 조금 더 국민에게 관심이 많고, 능력이 있는 대통령이 있었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그들을 보내지 않았을텐데...
영화의 제목인 '판도라'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이야기에서 따온 것입니다. 인간에게 벌을 주기 내려준 '판도라' 상자. 그 상자 안에는 온갖 질병과 죽음이 담겨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희망도 있었습니다. [판도라]에서의 희망은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원자력 발전소의 평범한 직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의 희망은 누구일까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촛불 집회에 참가한 우리 국민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굳게 믿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희망을 노래한다.
누군가는 청와대에 숨어 끝까지 버티고,
누군가는 그날의 진실에 대해 기억 안난다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대한민국 국민이 있기에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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