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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시간] - 믿기 힘든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힘

쭈니-1 2016. 11. 30. 15:19

 

 

감독 : 엄태화

주연 : 신은수, 강동원, 이효제

개봉 : 2016년 11월 16일

관람 : 2016년 11월 27일

등급 : 12세 관람가

 

 

웅이보다 내가 더 좋아할 영화.

 

금요일 오전에 구피는 하지정맥류 수술을 받고 토요일 오전에 퇴원을 했습니다. 수술 시간이 1시간 가량 걸린 그리 큰 수술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술 후 무리를 하면 안된다고해서 저희 가족의 주말 계획은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주말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웅이한테 미안했는지 구피는 제게 웅이를 데리고 광화문 촛불집회라도 다녀오라고 했지만, 수술로 인하여 다리가 불편한 구피를 집에 혼자 두고 나갈 수 없어서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요일도 이렇게 방에서 뒹굴거리며 보내려고하니 저 역시도 웅이한테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웅이와 맘껏 놀수 있는 시간이 주말 밖에 없기에 오늘이 지나면 또다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12월이 되면 송년회 등 모임 일정이 많아 주말에도 웅이와 제대로 놀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로 없다고 생각하니 더욱더 2016년의 몇 안남은 일요일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저는 구피에게 허락을 받아 웅이와 함께 [가려진 시간]을 보러 극장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사실 [가려진 시간]을 선택한 이유는 웅이와 함께 볼 수 있는 12세 관람가 등급의 영화가 [가려진 시간]과 [형]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가려진 시간]은 판타지를 가미된 영화이기에 [형]보다는 웅이가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영화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 [가려진 시간]은 웅이보다는 오히려 제가 좋아할만한 영화였습니다.

 

[가려진 시간]은 시간을 건너 뛰어 어느 한순간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버린 한 소년과 그러한 소년을 유일하게 믿어준 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사정은 이러합니다. 어머니를 잃은 후 계부와 함께 화노도로 이사를 온 수린(신은수)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유체이탈 등과 같은 이상한 공상에 빠져있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수린에게 고아인 성민(이효제)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수린과 성민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문제가 발생합니다. 공사장의 발파 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성민을 비롯한 세명의 남자아이와 수린이 어른들 몰래 산에 간 것입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비밀스러운 동굴을 발견하고, 둥굴 안에 있는 빛나는 알을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머리핀을 잃어버려서 동굴 안에 다시 들어간 수린을 제외하고 성민과 남자 아이들은 갑자기 사라집니다.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벌어지고, 며칠 후 실종되었던 아이 중 한명인 재욱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그리고 낯선 남자(강동원)가 용의자로 떠오르는데 이 낯선 남자는 수린에게 자신이 바로 성민이라고 주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어찌된 영문일까요? 자신이 성민이라 주장하는 남자는 수린에게 자신들이 가져온 빛나는 돌은 시간을 먹는 요괴의 알이고, 그 알이 깨지자 자신들을 제외하고 세상 모든 시간이 멈춰버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 자신이 어른이 되자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성민. 정말 그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요?

 

 

판타지와 현실 그 어디쯤...

 

판타지는 현실을 기초로 두고 있습니다. 현실의 삶이 힘들수록 사람들은 현실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게 되고, 그것이 판타지의 세계로 구축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영화가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2006년작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주인공인 오필리아(이바나 바쿠에로)가 판타지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파시스트 군인인 계부를 따라 게릴라군과 대치중인 낯선 시골마을로 이사를 오게되면서부터입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서 오필리아는 상상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고, 그녀가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에서 오필리아는 기억을 잃어버린 요정 세계의 공주가 됩니다. 다시 요정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선 기괴한 모습의 요정 판이 제시한 세가지 미션을 수행해야합니다. 결국 현실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가 죽자 요정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오필리아의 집착은 점점 커집니다.

[가려진 시간]에서 수린은 오필리아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오필리아와 마찬가지로 수린은 부모를 모두 잃었고, 계부와 함께 낯선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동화에 집착했던 오필리아처럼 수린은 초현실적인 세계에 심취해 있습니다. 물론 수린의 계부인 도균(김희원)은 오필리아의 계부처럼 무시무시한 파시스트는 아니지만, 수린에게 무심합니다. 결국 수린에게 있어서 갑자기 성인이 되어버린 성민은 오필리아를 요정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판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은 수린의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 시간을 먹는 요정의 알 때문에 아이에서 갑자기 어른이 되었다는 낯선 남자의 주장은 그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허무맹랑한 술책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이 수상한 남자를 성민이라 믿고, 그를 숨겨주기까지 하는 수린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수록 수린은 점점 고립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어른이 된 성민에게 집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가려진 시간]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러한 과정이 깔끔하게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간을 먹는 요괴의 알 때문에 어린 아이에서 갑자기 성인이 되었다는 성민의 주장은 아무리 영화라고는 하지만 저 역시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하지만 엄태화 감독은 그러한 성민의 주장을 관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양한 장치를 구비해놓습니다. 먼저 이 영화의 이야기의 화자를 수린으로 한정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수린에게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을 하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동굴에서 수상한 돌을 발견하자 재욱으로 하여금 할아버지에게 들었다는 시간을 먹는 요괴의 알 이야기를 꺼내게 만듭니다. 그럼으로써 성민의 주장이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야기가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합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시간을 먹는 요괴의 알로 인하여 시간이 멈춰진 장면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꾸며 놓습니다. 그럼으로써 오필리아가 가고 싶었던 요정의 세계처럼 수린이 가고 싶어했던 초현실적인 판타지의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수린의 사랑과 성민의 사랑

 

어쩌면 [가려진 시간]은 수린과 성민의 러브 스토리일지도 모릅니다. 낯선 화노도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성민에 대한 수린의 마음과 수린에게 첫눈에 반한 성민의 순수한 러브 스토리. 그렇기에 갑자기 어른이 되어 납치 살인 용의자로 몰린 성민은 수린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내고, 그러한 성민을 위해 수린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겁니다. 그로인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지만 수린에게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려진 시간]은 잔인한 현실을 탈출하고 싶은 수린의 욕망을 담아냅니다. 유일한 친구인 성민은 실종됩니다. 혼자 살아 돌아온 수린을 마을 사람들은 손가락질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린은 자신이 성민이라고 주장하는 낯선 남자를 믿게 되고, 시간이 멈춰진 세계에 가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수린은 사람들에게 성민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먹는 요괴의 알을 찾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깨뜨리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또 하나의 요괴 알을 찾아냅니다. 

물론 수린이 시간을 먹는 요괴의 알을 깨뜨리려한 것은 사람들에게 성민의 말을 믿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그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먹는 요괴의 알을 깨뜨리면 수린의 시간은 멈춰버릴 것이고, 그렇게 수린이 어른이 되어서야 멈춰진 시간이 풀린다면 성인이 된 수린 또한 성민과 마찬가지로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수린은 성민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시간이 멈춰버린 판타지의 세계에 가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민은 수린을 막아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겪은 시간이 멈춰진 세상은 수린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 영화에서 시간이 멈춰진 세상에서 어린 성민과 태식, 재욱은 그저 신나기만 했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맘껏 먹을 수 있고, 숙제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어른들도 없습니다. 시간이 멈춰진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맘껏 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수린이 원했던 것처럼 완벽하게 아름답고 신나는 판타지의 공간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천식을 가진 재욱이 천식 약을 찾지 못해 죽음을 맞이하며 성민과 태식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수십년동안 멈춰진 시간이 지속되자 그들은 점점 미쳐갑니다. 오필리아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요정의 세계가 결코 아름답기만한 곳이 아니듯, 시간이 멈춰진 세계 또한 그에 합당한 댓가를 치뤄야했던 것입니다.

결국 성민을 수린을 위해 또다시 희생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민의 희생 덕분에 수린은 판타지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세계에 남아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행복을 찾아 나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민을 향한 수린의 사랑이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수린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욕망과 뒤섞여 있다면, 수린을 향한 성민의 사랑은 사랑 그 자체의 순수함만 존재했던 것입니다.

 

 

믿기 힘든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힘

 

수린을 향한 성민의 진심이 담긴 사랑이 제게 전해졌기에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저는 먹먹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무조건적인 희생. 어쩌면 성민은 어른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마음만큼은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무조건적인 희생이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성민의 눈물겨운 희생이 있었기에 수린은 판타지 세계에 집착하는 철부지 여자아이에서 한층 더 성장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가려진 시간]은 세월호 참사와 같은 어른들이 저지른 사고로 인하여 무고하게 희생된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됩니다. 아직 차디찬 바다 속에서 발견되지 않은 아이들. 어쩌면 그 아이들이 성민처럼 멈춰진 시간에서 웃고 떠들며 어른으로 성장해 다시 현실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슬픈 믿음이 이 영화의 속내에 깔려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우린 어른이 되어 돌아온 아이들을 믿어주고, 꼭 안아줄 수 있을까요?

영화를 보다보면 어른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으려합니다. 누구라도 수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어땠을까요? 이 세상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일이 많은데, 우리들은 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아예 믿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요? 만약 웅이가 제게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면 저는 웅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믿으려할까요? [가려진 시간]을 보고나서 저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힘은 우리 자신의 열린 마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가려진 시간]을 보며 짙은 여운을 느끼고 그러한 여운을 따라 많은 것들을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웅이는 딱 한가지만을 궁금해했습니다. '과연 어떻게하면 멈춰진 시간이 다시 흐르게 할 수 있을까?' 실제 성민과 태식은 어른이 되면 다시 시간이 흐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법적인 성인 나이인 스무살이 되어서도 시간이 흐르지 않았고, 결국 그들이 죽음을 결심하고 나서야 다시금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의 성인은 시간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가려진 시간]을 보며 제가 느낀 먹먹함을 웅이도 느끼길 원했지만 그러기엔 아직 웅이가 너무 어린가 봅니다. 웅이는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은 성민 일행이 발파 현장에 간 것이 첫번째 문제이고, 이상한 동굴에 들어간 것이 두번째 문제이며, 동굴에서 이상한 알을 가져 나온 것이 세번째 문제라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역시 안전제일주의를 최고로 생각하는 웅이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를 본 후 KFC에서 간식으로 후라이드 치킨을 사먹었습니다. 당분간 튀긴 음식을 먹으면 안되는 구피 때문에 전날 그토록 먹고 싶었던 후라이드 치킨을 꾹 참아야 했던 웅이는 저와 함께 극장나들이를 끝내고나서야 KFC에서 허겁지겁 후라이드 치킨을 흡입했습니다. 이렇게 후라이드 치킨 한조각으로도 행복한 웅이. 그런 웅이를 보며 이대로 시간이 멈춰서 웅이가 고단한 어른이 되지않고 영원히 행복한 어린 아이로 남는 것도 괜찮겠다는 이상한 생각을 해봅니다. 

 

  가끔 나는 지루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원하고,

가끔은 행복한 시간이 왜 이리 빨리 지나가는지 원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루한 시간도, 행복한 시간도,

내겐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내겐 하나뿐인 이 시간을 즐기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