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지운
주연 : 송강호, 공유, 한지민, 엄태구
개봉 : 2016년 9월 7일
관람 : 2016년 9월 7일
등급 : 15세 관람가
짧은 영화 휴식기를 마치고...
8월 한달동안 피서를 극장에서 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휴일엔 무조건 극장을 찾았었습니다. 그 덕분에 웬만한 영화는 거의 본 상황. 그래서일까요? 9월이 되자마자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가 딱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8월의 마지막주 일요일에 본 [고스트버스터즈]를 마지막으로 저는 짧은 영화 휴식기를 갖기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9일이 흘렀고 10일째 되던 날, 저는 제 영화 휴식기를 이제 그만 끝내야할 시간이 되었음을 느꼈습니다.
추석 연휴를 일주일 앞둔 이번주 극장가에는 추석대목 흥행을 기대하며 세편의 대작 영화가 한꺼번에 개봉했습니다. 그 중에서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추석 연휴 첫날 어머니와 오랜만에 극장 나들이를 할 계획이고, [거울나라의 앨리스]는 이번 주말에 웅이와 함께 보러가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밀정]이 문제입니다. 저는 구피와 함께 [밀정]을 보고 싶었지만, 구피가 싫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 [수어사이드 스쿼드] 이후 3주 만에 혼자 봐야할 영화로 낙점되었습니다.
기왕 혼자 봐야할 영화라면 뒤로 미루지 말자라고 결심한 저는 [밀정]을 개봉 첫날 보고 왔습니다. 이렇게 혼자 봐야하는 영화의 경우 혼자 극장에 가기 귀찮다고 자꾸 뒤로 미루다가 결국 극장에서 놓친 영화가 한, 두편이 아니었거든요. 구피, 웅이와 함께 영화를 보는 재미에 빠져들면 들수록 혼자 봐야하는 영화는 점점 우선 순위에서 밀리고 있는 요즘입니다.
[밀정]은 김지운 감독의 신작입니다. 김지운 감독은 [조용한 가족]으로 감독 데뷔 이후 [반칙왕],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악마를 보았다] 등 연출하는 영화마다 흥행에 성공시켰고,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의 [라스트 스탠드]로 할리우드 감독 데뷔까지 마쳤습니다. 비록 [라스트 스탠드]의 흥행 성적이 기대만큼 좋지 않아 할리우드에서의 차기작 소식이 아직은 들려오지 않고 있지만, 김지운 감독의 충무로 복귀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밀정]은 충분히 기대할만합니다.
게다가 송강호와 공유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송강호는 [넘버 3]로 이름을 알렸지만, 그가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 덕분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공유의 경우는 지금 현재 2016년 최고 흥행작인 [부산행]과 더불어 [밀정]에 출연함으로써 2016년 최고의 남자 배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게다가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악마를 보았다]로 김지운 감독과 호흡을 맞추었던 이병헌이 우정출연했습니다. 이쯤되면 [밀정]에 대한 기대감을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밀정]에는 불안 요소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무장독립운동단체의 활약을 소재로 했다는 점입니다. 이미 최동훈 감독의 [암살]이 2015년 7월에 개봉해서 1,270만 관객을 동원한만큼 [밀정]의 소재는 신선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밀정]의 흥행 여부는 [암살]과의 차별점을 관객에게 어필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암살]과의 차별점은 무엇인가?
만약 김지운 감독, 송강호, 공유 주연이라는 이름값이 아니었다면 저 역시 [밀정]을 기대작 리스트에서 지워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암살]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비슷한 소재의 영화라니... 마치 [밀정]이 [암살]의 아류작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기에 [밀정]을 관람하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밀정]과 [암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주목했습니다. [밀정]은 [암살]과 어떤 차별점으로 [암살]의 아류작이라는 오명을 지울 수 있을까요?
먼저 [암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암살]은 일제강점기를 소재로한 첩보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합니다. [암살]의 선은 당연히 독립군입니다. 일본의 조선주둔군 사령관과 친일파 강인국(이경영)을 암살하기 위해 모인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조진웅), 그리고 폭탄전문가 황덕삼(최덕문)이 선이고, 일제와 친일파 강인국, 그리고 독립군을 배신하는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염석진(이정재)이 악입니다. 여기에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과 영감(오달수)을 배치시켜 영화의 재미를 이끌어냅니다.
[암살]은 배신과 반전이 난무하고, 영화의 후반에는 안옥윤의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며 오락영화로써의 재미에 충실합니다. 여기에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마지막 감동과 속 시원한 결말까지 이끌어냅니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 [전우치], [도둑들]로 흥행불패의 신화를 이루고 있는 최동훈 감독의 흥행사다운 연출력이 빛을 발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밀정]은 오락영화적인 요소가 부족한 영화입니다. 우선 이 영화는 선과 악의 구분이 불분명합니다.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중심 인물인 김우진(공유)이 선이고, 한때 임시정부의 핵심인물이었지만, 임시정부의 정보를 일본에 팔아먹고 일본 경찰이 된 이정출(송강호)이 악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밀정]은 이정출의 심리적 갈등에 주목함으로써 그에게 선과 악의 구분을 지워버립니다. 이정출의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선과 악의 대결에 의한 오락적 재미까지 희미해집니다.
분명 [밀정]은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할 폭탄을 경성으로 들여오려는 김우진, 연계순(한지민)을 중심으로한 의열단 멤버와 이를 막으려는 일본 경찰의 첩보전이 영화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이러한 영화의 중심 스토리는 그저 이정출의 심리적 갈등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결국 [밀정]은 모든 영화적 포커스를 이정출에게 맞춰져 있는 영화라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지운 감독은 2시간 20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영화의 러닝타임을 이정출에게 올인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 다른 캐릭터들은 거의 생략되다시피 했습니다. 영화의 제작 발표회 현장에서 의열단 핵심멤버이자 배신자인 조희령(신성록)의 분량이 거의 삭제되었다고 밝혔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김지운 감독은 독립군과 일제의 대결이라는 큰 그림보다 이정출이라는 개인에게 포커스를 맞추며 [암살]과 확실한 차별점을 두었습니다.
이정출은 어떻게 [밀정]의 중심이 되었나?
[밀정]의 첫 장면은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력가와 접선을 하는 의열단의 핵심멤버 김장옥(박희순)과 김장옥을 생포하려는 일본 경찰들의 총격전입니다. 이 장면에서 일본 경찰을 진두지휘하는 인물이 바로 이정출입니다. 김장옥을 사살하려는 다른 일본 경찰들과는 달리 어떻게든 김장옥을 생포하려고 하는 이정출. 하지만 이정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장옥은 자결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이정출과 김장옥이 임시정부 시절 절친이었다는 사실이 공개됩니다.
이러한 [밀정]의 오프닝 장면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소재의 영화에서 친일파는 무조건적인 악입니다. 돈과 명예, 권력에 눈이 멀어 조국을 팔아 먹은 그들에게 동정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암살]의 강인국이 대표적입니다. 강인국은 처음엔 갓 태어난 쌍둥이 딸을 위해 나라를 팔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죽일 만큼 돈과 권력에 눈이 먼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밀정]에서는 이정출을 무조건적인 악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가 김장옥을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하는 장면을 통해 악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입니다.
그리고 오프닝 장면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김장옥을 생포하려는 이정출에게 일본 경찰이 "감히 나에게 명령을 하는 것이오?"라고 따지자, "이것이 내 뜻인것 같소?"라고 반문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이정출이 조선총독부 경무국 부장인 히가시(츠루미 신고)에게 무조건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영화 중반 김우진이 "어쩌다가 친일파가 되었느냐?'라는 질문에 이정출은 "남자는 자신을 알아봐주는 이에게 충성을 바치는 동물이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비록 조국을 배신하고 친일파가 된 이정출이지만 의열단의 단장인 정채산(이병헌)은 이정출에게 김장옥에 대한, 그리고 임시정부와 독립군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음을 눈치챕니다. 정채산은 이우진에게 바로 그러한 이정출의 마음의 빚을 이용하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결국 이정출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이우진을 돕게 됩니다. 이렇게 갑작스로운 이정출의 변심은 [밀정]의 오프닝에서 이정출을 무조건적인 악이 아닌, 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정출은 단지 마음의 빚 때문에 이우진을 도운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정출이 변심할 수 밖에 없었던 또다른 이유는 바로 하시모트(엄태구) 때문입니다. 히가시의 무조건적인 신임을 얻었기에 이정출은 임시정부를 배신하고 친일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순간 히가시의 신임은 이정출이 아닌 하시모트를 향해 있었던 것입니다.
정채산을 체포하기 위해 은밀히 상하이에 잠입한 이정출과 하시모트. 이정출은 먼저 정채산의 심복인 김우진에게 접근함으로써 정채산을 잡으려하지만, 하시모트가 김우진의 본거지를 급습함으로써 이정출의 계획을 망쳐버립니다. 하시모트에게 화를 내는 이정출에게 하시모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것이 제 뜻인것 같습니까?" 어쩌면 바로 그 순간부터 이정출의 마음은 흔들렸을 것입니다. 히가시의 신임이 자신이 아닌 하시모트를 향하고 있음을 알게된 바로 그 순간부터말입니다.
한 사람의 심리적 변화를 뒤쫓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더라.
이렇게 김지운 감독은 철저하게 이정출을 심리적 변화만을 뒤쫓습니다. 조국을 배신하고 친일파 경찰이 된 이정출이 어쩌다가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을 돕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세밀하게 들여다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밀정]의 가장 큰 영화적 재미가 됩니다. [암살]과 같은 오락적 재미로 무장한 첩보액션영화가 아닌, 이정출이라는 한 남자의 심리적 변화를 통해 일제강점기를 살아야 했던 이들의 복잡한 내면을 정교하게 잡아낸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정출에게 모든 것을 올인한 것은 [밀정]의 단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밀정]이 이정출의 심리적 변화를 잡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김우진, 연계순, 조희령 등 다른 주요 캐릭터들이 그대로 방치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작 발표회에서 편집되었다고 밝힌 김우진과 조희령의 우정이 생략되지 않았다면 조희령이 일본의 첩자임을 알고 그를 척결해야하는 김우진의 모습이 좀 더 의미를 갖출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김우진을 남몰래 연모하는 연계순의 캐릭터를 좀 더 완성해냈다면 자신이 찍은 사진 때문에 연계순이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는 사실을 알게된 김우진의 모습이 좀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무려 2시간 20분 동안 이정출에게 모든 것을 올인한 덕분에 임시정부 핵심인물이었다가 일본 앞잡이가 되었고, 일본 경찰이었다가 의열단을 도와주는 변화무쌍함을 보여준 이정출의 캐릭터는 섬세하게 구축했지만 그 외의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단순히 소모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밀정]의 가장 큰 아쉬움입니다.
단순하게 영화적 재미만으로 [암살]과 [밀정]을 비교한다면 저는 [암살]의 손을 들어줄 것입니다. 그만큼 [암살]은 오락적 재미가 충만한 최동훈 감독다운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밀정]은 [암살]만큼 영화적 재미를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꽤 의미심장한 영화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를 흑과 백의 논리로 바라봤습니다. 독립군은 선이고, 친일파는 악인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사람들을 바라본 시선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정출은 선일까요? 악일까요? 우리의 이분법적 시선으로는 이정출을 선과 악으로 단순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는 임시정부를 배신했고, 조국과 동료를 팔아넘긴 댓가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위간부 자리에 오른 대표적인 친일파입니다. 하지만 이우진을 도와 의열단이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그의 친일행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이우진을 도왔지만,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정출을 선과 악으로 단순하게 구분지을 수 있을까요?
[밀정]은 선과 악의 구분이 단순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절을 배경으로, 선과 악의 경계에 선 이정출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선일까요? 악일까요? 그러면서 악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선에 대한 마음의 빚 때문에 방황하는 인간의 약한 내면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밀정]이 [암살]과 다른 점이며, [밀정]만이 가질 수 있는 영화적 의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인 사람도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악인 사람도 없다.
그렇기에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인간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다.
이정출이 악임과 동시에 선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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