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성훈
주연 : 하정우, 배두나, 오달수, 남지현
개봉 : 2016년 8월 10일
관람 : 2016년 8월 10일
등급 : 12세 관람가
봉사활동이 빨리 끝난 덕분에...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웅이는 3일간 봉사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처음 이틀간은 강서구민회관에서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마지막날인 수요일에는 강서구청에서 에너지 절약 캠페인으로 웅이의 3일간 봉사활동은 마무리됩니다. 저는 3일간 봉사활동 장소에서 웅이를 기다렸습니다. 웅이를 기다리는 동안 첫째날에는 [엽기적인 그녀 2]를, 둘째날은 [셀 : 인류 최후의 날]을 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지막날도 봉사활동을 시작한 웅이를 기다리기 위해 강서구청 근처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강서구민회관에서의 봉사활동이 2시간이었기에, 강서구청에서의 봉사활동도 2시간이 걸릴 것을 예상한 저는 2시간동안 마셔도 남을만큼 커다란 사이즈의 아메리칸 커피를 시켜놓고,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제가 고른 영화는 강예원과 이정진 주연의 [트릭]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기 시작한지 1시간도 채 되지않아 웅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봉사활동이 끝났다고...
원래 계획대로라면 웅이의 봉사활동이 끝나면 점심식사를 한 후 병원으로 가서 장인의 병간호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웅이의 봉사활동이 일찍 끝나면서 점심식사를 하기엔 예매한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예상하지못한 황금같은 시간을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봉사활동이 끝난 웅이를 이끌고 근처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날 저와 웅이가 본 영화는 [터널]입니다.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전날 [마이펫의 이중생활]을 선택할 때는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영화와 극장을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터널]을 선택할 땐, 가장 가까운 극장, 가장 빨리 상영하는 영화를 무조건 선택해야 했고, 때마침 그날 개봉한 [터널]이 요건에 딱 맞는 영화였습니다. 그렇게해서 저와 웅이의 여름휴가 두번째 영화 [터널] 관람이 성사되었습니다.
[터널]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재난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동차 영업대리점의 과장 정수(하정우)는 딸의 생일을 맞아 집으로 가는 도중 완공된지 얼마 되지 않아 인적이 드문 터널이 무너지는 바람에 홀로 갇히게 됩니다. 급히 구조 전화를 거는 정수. 하지만 2차 붕괴 위험이 있기 때문에 구조작업은 쉽지 않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정수는 생수 두병과 생일 케이크 하나로 버텨야만합니다.
사실 이렇게 간단한 내용만 놓고본다면 지난 4월에 관람한 [33]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33]은 2010년 8월 5일 칠레 산호세 광산에서 구리를 채굴하던 중 33명의 광부가 지하에 매몰되었다가 69일 만에 구조된 실화를 바탕으로한 영화입니다. 단지 [33]과 [터널]이 다른 점이라면 [33]은 33명의 광부가 함께 고난을 해쳐나갔고, [터널]은 정수 혼자 버텨야만한다는 점입니다. 과연 정수는 33명의 광부들처럼 무사귀환할 수 있을까요?
터널에 가둬놓고 캐릭터를 구축한다.
[터널]의 전개는 굉장히 빠른 편입니다. 영화가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터널이 무너지고, 정수는 그 안에 갇히게됩니다. 대부분의 재난영화는 재난에 처한 주인공과 관객의 감정이입을 위해 영화 초반에 주인공의 캐릭터를 상세하게 구축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터널]은 캐릭터를 구축하기도 전에 정수를 터널안에 가둬버립니다. 그리고는 터널 안에 갇힌 정수의 모습을 통해 캐릭터를 구축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서서히 정수와 감정이입을 하게끔 이끕니다.
그런데 이러한 [터널]의 방식은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우리가 만약 뉴스를 통해 재난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면 우리는 재난 상황만 알수 있을 뿐, 재난에 처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언론을 통해 재난에 처한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알게 되고, 그들의 사연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들이 빨리 구조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터널]이 바로 그런 식입니다.
영화 초반, 관객은 정수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저 그의 직업과 그가 어린 딸을 둔 가장이라는 아주 평범한 사실 뿐입니다. 그러다가 영화는 터널 안에 갇힌 정수의 상황을 지켜보며 점차 그를 알아가게 됩니다. 터널 안에 갇혔지만 아내 세연(배두나)과 어린 딸을 먼저 걱정하고, 극한 상황에서도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그가 빨리 구조되기를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수의 캐릭터 구축을 더욱 완벽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정수와 함께 터널에 갇힌 미나(남지현)입니다. 많은 분들이 미나라는 캐릭터가 왜 필요했는지 이해를 못하시더군요. 하지만 미나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정수는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홀로 책임지기에 버거웠을 것이며, 정수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데에도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미나에게 자신의 생명줄과도 같은 생수를 나눠주는 정수의 모습을 통해 터널 밖 이기적인 인간들과 대비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처음엔 그저 '터널이 무너졌네.'라고 무덤덤하던 관객들은 구조를 기다리는 정수의 모습에 웃음을 짓기도 합니다. 특히 미나의 강아지가 정수의 마지막 식량인 케잌을 먹어버리자 정수의 분노에 찬 욕지거리는 무거울 수 밖에 없는 영화의 분위기를 가볍게 만듭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미나에게 악몽꿨다고 대답하는 정수 ㅋㅋㅋ) 하지만 미나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정수 역시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오자 터널 안에서 구축된 정수의 캐릭터는 그제서야 힘을 발휘합니다.
[터널]이 노련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입니다. 터널이 무너졌고, 그 안에 한 남자가 갇혔다라는 설정은 세월호 사건 등 굵직한 재난 뉴스를 실제로 접한 관객 입장에서는 '겨우?'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듭니다. 실제 저는 이 영화의 재난이 너무 소박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영화를 봤었습니다. 하지만 정수의 캐릭터 구축이 완벽하다보니 영화 후반에 가서는 나도 모르게 재난영화의 긴박감과 감동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터널 밖의 사람들
터널 안에서 정수가 살아남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터널 밖에서는 정수를 구조하기 위한 작업이 한참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터널 밖의 풍경은 우리 인간의 이기심과 우리 사회의 부조리함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수를 구조하겠다며 번듯한 말만 내놓는 정치인들, 정수의 생사에는 관심도 없이 그저 특종만 노리는 기자들.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정수의 무사귀환을 기원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자신의 이해득실만 따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경이 그저 영화 속의 상황이라며 웃어 넘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큼지막한 재난사고가 벌어질때마다 너무나도 익숙하게 일어나는 바로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근 제2 터널의 완공이 정수의 구조작업으로 지체되자 그로인한 금전적 피해를 들먹이며 살아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정수의 구조작업을 중단하고 제2 터널 완공작업을 개시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섬뜩함마저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제2 터널 완공에 이해득실이 없는 일반 사람들도 정수의 구조작업을 멈춰야한다는 여론이 앞서기 시작하고, 급기야 정수의 구조작업에 나섰던 구조대원이 불의의 사고를 죽음을 맞이하자 오히려 사람들은 구조작업을 고집하는 세현을 욕하기 시작합니다. 죽은 남편의 시체를 찾기위해 살아있는 사람들을 희생시킨다며... 어디에서 많이 본 장면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세월호 사건때 우리가 유가족들에게 했던 바로 그 짓거리들을 [터널]은 고스란히 재현된 것입니다.
[터널]을 보며 저는 창피했습니다. 터널 밖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겨우 한사람을 위해 구조대원이 희생되고,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지출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은 마치 정수가 차라리 죽었기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남편이 살아있으면 어떻할려고 그러느냐?'라는 세현의 물음을 사람들은 외면합니다. 내 일이 아닌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부정하고, 무시하고, 멸시한 것이죠.
그러한 가운데 구조대장인 대경은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사실 영화의 초반에는 대경이라는 캐릭턱가 조금 우습게 보였습니다. 그동안 오달수가 연기한 캐릭터들이 대부분 코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터널]에서의 구조대원들은 뭔가 어리버리하고, 정수를 구조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대경이 오줌을 마시는 장면에서부터 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생수가 떨어진 정수에게 오줌을 마시라고 조언하는 대경. 그런 대경에게 정수는 마셔봤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쉽게 조언을 합니다. 자신은 해보지도 않고... 대경은 오줌을 마셔보지도 않고 정수에게 조언을 하는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고, 결국 자신의 오줌을 마시며 떳떳하게 정수에게 조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대경이 정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은 정수와의 약속을 지키고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상부에서 하지 말란다고 자기가 해야할 일을 포기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는 그저 위에서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라고 변명하며... 그런 분들은 과연 대경의 모습을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요?
헬조선? 아니 아직 희망은 있다.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끝까지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해내는 대경. 그 덕분에 극적으로 정수를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대경마저 상부가 시키는대로 했다면 정수는 결국 오지 않는 구조대를 기다리며 터널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로인해 대경은 상부로부터 미운털이 박힐 것입니다. 영화 후반 시말서를 쓰는 대경의 모습은 그래도 행복해보였습니다. 그는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터널]은 재난영화이면서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이기심과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광경은 젊은 세대들이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헬조선'과 맞닿아 있기도 합니다. 재난에 처한 국민을 구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정부라니... 하지만 자조적인 자세로 체념을 한다고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헬조선'을 만들었다면 우리 국민 한명 한명이 '헬조선'을 무너뜨리는 되는 것입니다. 방법은 어렵지않습니다. 대경처럼 자신이 해야할 일을 묵묵히 해내면 되는 것입니다.
[터널]은 어찌되었건 해피엔딩으로 끝난 영화입니다. 부실공사에 의한 터널 붕괴, 그리고 정수의 구조를 포기하려했던 사람들에 대한 그 어떤 처벌도 이 영화는 보여주지 않지만, 최소한 정수가 가족의 폼으로 돌아간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해피엔딩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호의호식하면서 떵떵거리며 사는것이 아닌, 그저 가족과 함께 작지만 소박한 행복을 누리는 것. 대한민국이 해야할 일은 우리가 그런 작은 행복을 누리도록 지켜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이뤄진다면 '헬조선'이라는 자조섞인 푸념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입니다.
터널 안의 풍경은 인간미와 희망이 교차하지만
오히려 터널 밖의 풍경은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터널]을 보며 다시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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