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연상호
주연 : 공유, 정유미, 마동석, 김수안, 김의성, 최우식, 안소희, 최귀화
개봉 : 2016년 7월 20일
관람 : 2016년 7월 23일
등급 : 15세 관람가
역대급 더위에는 역대급 공포영화로...
요즘 저는 입만 열면 "더워!"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옵니다. 그만큼 올해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고 있는 중입니다. 너무 덥다보니 웅이가 제게 안기면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내며 "더우니까 떨어져 앉아."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풀이 죽은 웅이가 멀찌감치 떨어져 앉는데, 웅이에게 미안하지만 웅이의 몸에 워낙 열이 많아서 가까이 앉기만해도 난로가 따로 없으니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주말에 특별히 갈데도 없고, 그렇다고 찜통같은 집에 있자니 짜증 밖에 안납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자연스럽게 에어컨 바람이 빵빵한 극장을 찾게 됩니다. 원래 계획은 토요일 밤, 웅이와 함께 [아이스 에이지 : 지구 대충돌]을 보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애니메이션이라고는 하지만 더빙이 아닌 자막 버전을 보고 싶어서 집 근처 멀티플렉스 시간표를 샅샅히 뒤졌더니 저녁 6시40분대 딱 한 타임만 있더라고요.
그런데 구피가 의외의 제안을 해옵니다. 저녁에 [부산행]을 보자는 것입니다. 구피의 제안이 의외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날 제가 구피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웅이와 [나우 유 씨 미 2]를 보러 갔기 때문입니다. 구피는 제가 웅이와 극장에 가면 [부산행]을 같이 안보겠다고 선언했었는데, 제가 무시했었습니다. 그래서 [부산행]은 어쩔 수 없이 일요일 밤에 혼자 보러갈 수 밖에 없는 처지였는데 구피가 먼저 토요일 온 가족이 함께 [부산행]을 보러 가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부산행]이 15세 관람가 등급이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웅이는 극장에서 딱 한번 15세 관람가 등급의 영화를 봤었는데 그것은 바로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입니다. 그 이후로 구피는 제가 웅이와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면 혹시 15세 관람가 등급의 영화는 아닌지 꼭 확인을 합니다. 그런데 구피가 먼저 15세 관람가 등급의 [부산행]을 웅이와 함께 보러 가자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제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웅이 역시 기대하지 않았던 [부산행]을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좋아서 펄쩍 뜁니다. 알고보니 웅이네 반 친구들 중에서 이미 [부산행]을 보고와서 스포를 뿌리고 다니는 못된(?) 녀석들이 있다고 합니다. 웅이는 어차피 자신은 [부산행]을 볼 수 없기에 그러한 스포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암튼 저희 가족은 저녁식사를 일찌감치 하고 [부산행]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좀비의 습격을 보며 한여름 무더위를 싹 잊었답니다. [부산행]을 보는 내내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한참동안 더위를 느끼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역시 역대급 더위에는 [부산행]같은 역대급 공포영화가 최고죠. 저희 가족은 벌써부터 8월 18일 개봉예정인 [부산행]의 프리퀼 [서울역]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역대급 재난 영화
여름 극장가에서 한국형 재난영화는 새로운 트랜드인가 봅니다. 2009년 7월 개봉해서 천만 관객을 훌쩍 뛰어넘는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가 이러한 새로운 트랜드의 시작이었습니다. [해운대]는 부산을 덮친 거대한 쓰나미를 소재로한 재난영화입니다. 2012년 7월에는 변종 '연가시'에 의한 감염을 소재로한 박정우 감독의 [연가시]가 흥행 돌풍을 일으켰었고, 2013년 8월에는 사상 최악의 바이러스에 의한 공포를 다룬 [감기]가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올해 여름에는 두 편의 재난영화가 찾아옵니다. 그 중 한편이 [부산행]이고, 나머지 한편은 8월 개봉 예정인 김성훈 감독의 [터널]입니다. 하지만 [터널]은 붕괴된 '터널'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혼자 생존해야하는 정수(하정우)의 이야기를 담은 조금은 단촐한(?) 재난을 담고 있습니다. 그와는 달리 [부산행]의 재난은 이전 한국형 재난영화와 비교해서도 가히 역대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운대]의 쓰나미는 부산에 한정되어 있고, [감기]의 경우는 분당이 주요 무대입니다. [연가시]도 변종 '연가시'라는 소재 탓에 한강과 4대강 주변으로 재난의 공간이 제한됩니다. 하지만 [부산행]은 다릅니다. 비록 영화의 무대는 '부산행' KTX 열차이지만, 재난의 스케일은 대한민국 전체를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안전한 곳은 부산 한 곳 뿐입니다. 이쯤되면 서울에 사는 저로써는 [부산행]의 재난이 실제 일어난다면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더욱더 [부산행]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산행]에 등장하는 좀비도 역대급입니다. 사실 좀비는 서양 공포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심심치 않게 좀비 소재의 영화가 등장하는데 [신촌좀비만화], [이웃집 좀비], [인류멸망보고서], [좀비스쿨]과 같은 저예산 독립 영화에서 좀비는 신선한 소재가 되어 관객에게 선보였습니다.
좀비의 대체적인 특징은 어그적거리며 걷는 것입니다. 좀비라는 것 자체가 죽은 시체가 되살아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좀비를 개념을 깨부순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마크 포스터 감독의 [월드워Z]입니다. [월드워Z]의 좀비가 엄청났던 이유는 기존 좀비에서 볼 수 없었던 스피드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산행]의 좀비가 그러합니다. 순식간에 멀쩡한 사람들도 좀비로 감염시키니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수도 많은데 빠르기까지합니다. 이러니 어그적거리며 걷는 기존의 좀비와는 달리 [부산행]의 좀비는 더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부산행 'KTS'가 좀비에게 점령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한명의 소녀가 열차에 올라탔기 때문입니다. 그녀로부터 시작된 좀비 바이러스는 열차 여승무원에게 옮겨지고, 그 이후에는 기차 안 승객들에게 빠르게 전염됩니다. 이러한 감염속도라면 대한민국이 순식간에 좀비에게 점령된다는 설정이 이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엄청난 감염속도에 빠른 스피드까지 겸비한 좀비라니...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역대급 캐릭터들
재미있는 영화에는 좋은 캐릭터가 필수입니다. 아무리 역대급 스케일의 재난영화이고, 역대급 좀비가 나온다고해서 영화 자체가 역대급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영화를 역대급으로 만들으려면 역대급 캐릭터가 영화는 이끌어나가야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부산행]은 역대급 스케일에 역대급 좀비, 그리고 역대급 캐릭터까지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석우(공유)입니다. 펀드매니저인 그는 일을 위해 가정을 등한시합니다. 그랬던 그가 부산에 살고 있는 엄마에게 가고 싶어하는 수안(김수안)과 함께 부산행 KTX에 올라탑니다. [부산행]은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석우가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과 협력을 하면서 점차 인간적으로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석우의 성장이 단지 영화 속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석우가 그랬던 것처럼 남을 배려하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어른들이니까요.
분명 주인공은 석우이지만, [부산행]에서 가장 많이 주목받는 캐릭터는 상화(마동석)입니다. 그동안 커다란 덩치와 우락부락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의외의 귀여움으로 마요미, 마블리 등의 애칭으로 불렸던 마동석은 [부산행]에서 인생 캐릭터를 드디어 만납니다. 좀비 따위는 맨 주먹으로 때려잡는 터프가이이지만, 임신한 아내인 성경(정유미)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애처가인 상화의 활약은 [부산행]에서 절대적인 재미를 책임집니다.
그리고 [부산행]에는 또 한명의 역대급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용석(김의성)입니다. 영화에서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악역 캐릭터들을 봤지만, 용석 만큼 한대 후려갈기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은 악역 캐릭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용석이야말로 정말 역대급 악역 캐릭터라고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부산행]에서 용석은 제2의 주인공입니다.
사실 용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겁이 났을 것입니다. 멀쩡한 사람들이 좀비로 바뀌는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고자하는 기본적인 욕망이 있는데, 용석은 그러한 욕망에 충실한 인물인 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욕망을 타인의 희생으로 이루려했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살기위해 남을 좀비에게 내던지는 극단적인 이기심. 그것이 용석을 역대급 악역 캐릭터로 만들었습니다.
[부산행]의 주연 3인방인 공유, 마동석, 김의석은 분명 인기 배우이지만, 영화계에서 확실한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공유의 경우는 TV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으로 스타 반열에 올랐지만, 이를 뛰어넘는 영화는 아직 없었는데, [부산행]은 공유에게 터닝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마동석 역시 [베테랑]의 우정출연이 가장 인상깊은 필모그래피였는데, 이제 마동석하면 [부산행]을 먼저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 김의석도 그동안 악역을 자주 맡았지만, [부산행]의 용석이야말로 김의석이 연기한 최고 악역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네요.
이건 역대급 재미이다.
[부산행]은 영화 자체만 놓고본다면 단점이 거의 없는 영화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비주류 소재로 치부되었던 좀비를 상업영화의 소재로 완벽하게 이용한 것도 그렇고, 공포, 액션, 감동까지 여름시즌 극장가 관객이 좋아할만한 요소들을 잘 버무러놓은 연상호 감독의 연출력도 흠잡을데가 없습니다. 그가 상업영화를 처음 연출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공포 뒤에 밀려오는 감동입니다. 임신한 아내 성경을 위한 상화의 사랑, 어린 딸 수안을 위한 석우의 사랑, 그리고 젊은 커플인 영국(최우식)과 진희(안소희)의 사랑까지... [부산행]에는 자신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용석과 같은 캐릭터가 더 많지만, 그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상화, 석우, 영국이 있었기에 영화를 보고나서도 깊은 여운이 남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며 저희 가족은 만약 영화에서처럼 좀비가 나타나면 웅이의 외할아버지 집으로 피신하자고 합의했습니다. 저희 집 아파트는 3층이라서 좀비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지만, 외할아버지 아파트는 9층이기에 조금 더 안전할 것이며, 외할아버지 집에는 먹을 식량도 많이 비축되어 있어서 고립되어도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이유입니다. [부산행]을 보고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자체가 [부산행]의 역대급 재미를 말해주는 것이겠죠. 암튼 덕분에 잠시동안이라도 오싹함 때문에 더위를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렛미인]을 본 후, 차 뒷좌석 바닥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부산행]을 보고나서는 지하 주차장에 혹시 좀비가 숨어있지 않는지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새롭게 생겼다.
재미있는 공포영화를 볼 때마다 내겐 이렇게 새로운 버릇이 생겨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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