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상우
주연 : 엄정화, 다니엘 헤니
개봉 : 2006년 12월 7일
관람 : 2006년 12월 12일
등급 : 12세 이상
역사적인 날, 우연한 선택
드디어 1년 내내 CGV극장에서 무조건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는 프리패스 카드를 받았습니다. CGV서포터즈가 된지 거의 1개월만입니다.
주머니에 돈이 단 한 푼이 없더라도 프리패스 카드 한 장이면 언제 어디서나 CGV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맘껏 볼 수 있는 큰 행운을 부여받던 날, 저는 웅이한테 가야한다는 구피에게 '오늘 같은 날은 기념으로 영화도 보고, 데이트도 해야 한다'며 징징거린 끝에 오랜만에 목동 CGV에서 오붓한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하지만 기념 영화 한편 보자는 계획은 생각보다 쉽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기대작들이 많이 개봉되지 않은 상황이라 특별히 보고 싶은 영화도 없었고, 그나마 보고 싶었던 [크리스마스의 악몽 3D]는 간발의 차로 상영 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냥 햄버거 먹으며 데이트나 즐기자고 결심하려던 순간, 자꾸만 프리패스 카드를 쓰고 싶은 충동이 생겨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무조건 시간되는 영화 아무거나 보기로 결심하고 나서야 겨우겨우 영화 한편을 볼 수 있었죠.
프리패스 카드를 받은 이 역사적인 날, 정말 우연하게도 제게 선택된 행운의 영화는 바로 우리 로맨틱 코미디인 [Mr. 로빈 꼬시기]였습니다.
브리짓 존스를 꿈꾸는가?
일단 전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합니다. 뻔하긴 하지만 예쁘고, 잘생긴 주인공들이 알꽁달꽁 사랑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나면 왠지 모르게 행복해지고 흐뭇해집니다. 거기에 연말연시라는 계절적 분위기까지 적절하게 젖어버리면 로맨틱 코미디는 마치 내 자신이 저런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가슴 따뜻함을 안겨줍니다. 최소한 예전엔 그랬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Mr. 로빈 꼬시기]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인데다가 프리패스 카드를 받아 한껏 기분이 UP된 상태에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제겐 상당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였습니다. 제가 로맨틱 코미디를 즐기기엔 너무 늙어버려서인지 아님 이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의 장점을 잘 잡아내지 못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사실 처음부터 이 영화가 상상력 부재의 전형적인 로맨틱 무드로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영화 사이트에서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을 읽은 후, 재수 없는 자동차 접촉 사고, 알고 보니 피해자는 새로 부임한 사장, 그 사장은 매력적인 바람둥이, 때마침 솔로된 여자 주인공, 남자 주인공과 티격태격, 헤어졌던 여자 주인공의 남자친구 컴백, 그래서 헤어질뻔한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 결국 해피엔딩. 대강 뭐 이런 줄거리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김없이 들어맞더군요. 오히려 제 예상에서 한 치의 벗어남이 없어 당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뭐 미리 알고 봤으니 이런 뻔한 영화의 줄거리에는 불만사항 없습니다. 단, 첫 만남에서 좀 더 창의력을 발휘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예전엔 이런 뻔한 줄거리에서도 영화 속 사랑이 예뻐 보였으며, 공감이 갔었는데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못하더란 겁니다.
이 영화는 [키아누 리브스 꼬시기]라는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군요. 원작 소설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영화와 원작의 스토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면 분명 원작자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참고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인 민준(엄정화)이 한국의 브리짓 존스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여성의 심리를 잘 잡아내면서도 로맨틱 코미디의 매력을 잃지 않았지만, [Mr. 로빈 꼬시기]는 여성의 심리를 잡아내는 척 하다가 이내 인터넷 소설의 가벼움에 빠져 그냥 관객을 웃기기에 전념한다는 것입니다. 설정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비슷하게 가긴 했는데 아무래도 역부족이네요.
회사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
하지만 제가 결정적으로 이 영화에 공감을 하지 못하며 재미를 느끼지 못한 것은 솔직히 제 개인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요즘 저는 회사 생활에 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직장 상사는 엿 같고(이 세상에서 좋은 직장 상사는 없다더군요.) 직장 동료는 원수 같습니다. 월급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사표 쓰고 자유를 외치며 하루 종일 영화 속에 빠져 살고 싶지만, 30대 중반의 나이에 그런 사치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민준의 회사 생활은 어떤가요? 남자친구한텐 매번 배신당하지만 직장에선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뭐 여기까진 좋습니다. 문제는 직장 상사, 아니 사장인 로빈 헤이든(다니엘 헤니)과의 관계입니다. 일은 뒷전이고 연애를 가르쳐달라며 매달리는 것은 기본, 술 마시면 거침없이 욕하고, 야심한 밤에 호텔로 찾아가기까지 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민준의 행동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 워낙 회사 생활에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여 있다 보니 도대체 일하러 직장에 다니는지, 놀러 다니는지 알 수 없는 민준의 직장 생활이 샘이 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과연 저렇게 사장한테 연애 기술 전수받으며 다닐 수 있는 회사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실연 몇 십번은 받아도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이들 정도로...
로맨틱 코미디에서 영화처럼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워낙 마술 같은 것이니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거짓말 같은 사건이 일어나 사랑을 맺어줘도 너그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드라마 속, 혹은 영화 속에서 실제와는 다른 직장의 모습을 보면 이상하게 잘 공감이 안 됩니다. 사랑은 마술 같은 것이지만 직장은 정글 같은 곳이기에 저런 놀고먹으면서도 럭셔리한 삶을 살 수 있는 빵빵한 월급 주는 회사가 나오면 짜증부터 납니다. 제발 로맨틱한 사랑은 안 해봐도 좋으니 저런 행복한 직장은 한번 다녀봤으면 소원이 없겠네요.
제발 날 좀 꼬셔줘!
영화를 보고 집으로 향하는 길. 구피는 '딱 비디오용이네'라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멜로, 로맨틱 코미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하는 구피로써는 당연한 평가입니다.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저로써도 이 영화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엄정화는 제가 꽤 좋아하는 배우입니다. 그녀가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를 저는 무척 좋아합니다. 그녀의 톡톡 튀는 매력이 로맨틱 코미디와 잘 어울리거든요. [싱글즈],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까지 모두 재미있게 봤습니다. [Mr. 로빈 꼬시기]에서도 엄정화는 어김없이 자신의 톡톡 튀는 매력을 과시하지만 이상하게 이전 영화들처럼 매력적이지 못했습니다. 단 가라오케씬은 제외하고...
다니엘 헤니는 이 영화의 새로운 발견이라 칭할 만합니다. 구피는 '다니엘 헤니보다 [달콤한 스파이]의 데니스 오가 더 멋있어'를 외쳐댔지만 분명한건 다니엘 헤니의 영화 데뷔는 꽤 성공적입니다. 특히 그의 환상적인 근육질 몸매는 순식간에 극장 안 여성 관객들을 일제히 탄성을 지르게 하는 굉장한 힘을 발휘하더군요. 앞으로 이런 류의 영화에 출연 제의가 쇄도할 듯. 특히 상반신 노출 장면은 앞으로도 자주 나오지 않을런지...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엄정화와 로맨틱 코미디 적 매력을 잘 표출해낸 다니엘 헤니 커플이 열심히 관객들을 꼬셨음에도 불구하고 저만은 꼬시지 못했습니다. 요즘 회사일 때문에 짜증만발인데 이 영화만이라도 잠시동안 절 환상의 세계(그래, 세상엔 좋은 직장도 있을거야 같은...)로 초대해줬으면 좋았으련만, 제발 절 꼬셔줄 그런 로맨틱 코미디 어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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