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짧은영화평/2016년 아짧평

[하이-라이즈] - 불친절해도 너무 불친절했다.

쭈니-1 2016. 7. 5. 17:33

 

 

감독 : 벤 웨틀리

주연 : 톰 히들스턴, 제레미 아이언스, 시에나 밀러, 루크 에반스

개봉 : 2016년 3월 30일

관람 : 2016년 7월 3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아버지는 재미없는 영화를 '사이코 드라마'라고 하셨지.

 

저희 집이 처음 비디오 플레이어를 구입하던 날, 중학생이었던 저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심사숙고 끝에 [그렘린]을 빌려 왔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저희 집에 첫 영화 상영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렘린]을 보시다가 "뭐 이런 사이코 드라마같은 영화를 빌려 왔어."라며 화를 내시고 자리를 뜨셨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렘린]이 너무 재미없으셨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희 아버지는 재미없는 영화를 모두 사이코 드라마라고 칭하셨습니다. 사실 사이코 드라마의 정확한 의미는 1921년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모레노에 의해 시작된 심리극으로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말 대신 행동으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한 제 설명은 무시하셨고, 이후에도 조금만 아버지 마음에 안드는 영화는 영락없이 사이코 드라마가 되었습니다.

제가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이코 드라마 발언이 생각난 것은 일요일 밤에 본 [하이-라이즈] 때문입니다. 톰 히들스턴를 비롯한 명품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이 영화는 얼핏 매력적인 스릴러 영화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영화 속 캐릭터들의 이상한 행동들 때문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사이코 드라마라는 단어 뿐이었습니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개인에게 있어서 재미없는 영화라는 것은 자신의 기대와 전혀 다른 영화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평론가들의 호평을 얻었고, 다른 관객들이 최고의 영화라며 찬사를 보냈어도 내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영화라면 재미없는 영화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제게 있어서 [하이-라이즈]가 그러했습니다.

저는 [하이-라이즈]가 [설국열차]와 비슷한 영화일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1975년 런던을 배경으로 모두가 입주를 꿈꾸는 최첨단 고층 아파트 '하이 라이즈'에서 건물의 치명적인 결합과 인간 군상의 날것 그대로의 추악한 이면이 드러나며 아파트 내에 존재하는 계급 사회의 실체가 낱낱이 밝혀지는 영화, 이것이 바로 제가 [하이-라이즈]를 기대한 것들입니다.

솔직히 [하이-라이즈]는 그러한 제 기대감들을 완벽하게 외면하지는 않았습니다. 영화 자체의 주제는 제가 기대했던 것들을 분명히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스토리 전개입니다. [설국열차]가 열차 내의 계급 사회와 그러한 계급 사회를 무너뜨리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의 활약을 자세히 잡아냈다면 [하이-라이즈]는 스토리 전개 자체는 아예 무시된채 인간 군상들의 추악한 모습만을 나열해 나갑니다. 어느 순간부터 '하이 라이즈'가 광란의 무대가 되어 버리는데, 저는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는지조차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상층과 중층, 그리고 하층 사람들

 

[하이-라이즈]의 스토리 전개는 너무 불친절합니다. 어쩌면 제가 너무 미국 영화에 길들여져 잇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해도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을 읽지 않고서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꽤나 어렵습니다. 그래도 나름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40층짜리 고층 아파트 '하이 라이즈'의 입주민들은 크게 세 분류로 나뉩니다. '하이 라이즈'를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 로얄(제레미 아이언스)을 비롯한 상층 사람들과 25층에 새롭게 이사를 온 닥터 랭(톰 히들스턴)과 26층에 사는 싱글맘 샬롯 멜빌(시에나 밀러)와 같은 중층 사람들, 그리고 언제나 불평불만에 휩싸인 2층의 리처드 와일더(루크 에반스)와 같은 하층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사는 높이 만큼이나 '하이 라이즈'에는 계급이 나눠져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결국 '하이 라이즈' 하층의 아파트 전기가 끊기면서 리처드 와일더의 광기가 폭발하고, 상층의 사람들도 하층의 반란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며 '하이 라이즈'는 광란의 무대가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닥터 랭은 방관자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결국 리처드 와일더의 광기와 상층 사람들의 폭력은 안토니 로열의 죽음과 함께 비극으로 마무리됩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을 건너 뛰다.

 

분명 내용만 본다면 그다지 복잡할 것이 전혀 없는 영화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복잡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영화 속 캐릭터들의 광기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순간을 건너 뛰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하이 라이즈'의 사람들은 조금 괴팍하지만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층의 전기가 끊기면서 리처드 와일더의 광기가 폭발하고, 리처드 와일더의 광기에 위기감을 느낀 상층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대응하며 '하이 라이즈'를 광란의 무대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장 중요한 순간들이 무슨 스쳐 지나가는 회상씬을 보여주듯이 처리됩니다. 그러니 갑자기 광란의 무대가된 '하이 라이즈'의 무대가 뜬금없이 느껴지고, 영화의 중심을 잡아야할 주인공 닥터 랭마저도 정신분열적인 행동을 하면서 영화가 점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이상해진 것입니다.

[설국열차]처럼 사회 질서가 무너진 미래를 배경으로 한 것도 아닌데, 살인과 자살, 방화가 넘쳐나도 외부의 간섭은 전혀 없고, '하이 라이즈'의 내부 상황이 위험천만하게 흘러가도 아파트 사람들은 마치 '하이 라이즈'가 세상의 전부인듯 밖으로 나가려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구피와 저는 서로를 쳐다보며 "그런데 이 영화, 뭔 내용이야?"라며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아마 저희 아버지께서도 이 영화를 보셨다면 "뭐 이런 사이코 드라마를 보고 있냐?"며 호통을 치셨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