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쿠엔틴 타란티노
주연 : 사무엘 L. 잭슨, 커트 러셀, 제니퍼 제이슨 리
개봉 : 2016년 1월 7일
관람 : 2016년 3월 30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2시간 50분이라는 러닝타임에 겁먹었다.
제가 10대, 20대였을 때에는 러닝타임이 긴 영화가 좋았습니다. 뭐랄까 보너스를 받는 느낌이었죠. 러닝타임에 상관없이 영화 관람료는 같으니, 1시간 30분짜리 영화를 보는 것보다 3시간짜리 영화를 보면 같은 돈으로 더 많은 영화를 본 기분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러닝타임이 긴 영화를 기피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러닝타임에 상관없이 무조건 봐야하는 기대작의 경우는 예외이지만, 볼까 말까 망설여지는 경우는 러닝타임이 긴 영화보다 러닝타임이 짧은 영화를 더 선호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마도 10대, 20대와 비교해서 지금의 저는 시간적, 마음적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헤이트풀 8]을 개봉 당시 극장에서 놓친 것도 러닝타임 때문이었습니다. 영화적 재미는 무조건 보장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이고, 제가 좋아하는 장르인 서부극입니다. 게다가 관객의 호평까지 이어진 영화이기에 극장에서 보는 것이 당연했지만 [헤이트풀 8]의 러닝타임이 무려 2시간 50분이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결국 저는 러닝타임이 긴 [헤이트풀 8]과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두고 고민하다가 [헤이트풀 8]을 포기하고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선택했었습니다.
제가 oksusu 복귀 두번째 영화로 [헤이트풀 8]을 선택한 것도 그날 시간이 다른 날과 비교해서 많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3월 한달동안 저를 괴롭혔던 바쁜 일이 완벽하게 마무리되었고, 그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퇴근할 수 있었던 저는 남는 시간에 틈틈히 [헤이트풀 8]을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날 보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영영 이 영화를 볼 시간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너무 깊숙히 빠져들어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수요일 저녁 6시. 저는 [헤이트풀 8]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습니다. 사실 저는 1시간 가량 보고, 저녁 식사를 한 후 밤에 나머지 부분을 보고, 그러고도 다 못보면 다음날로 영화 보기를 미루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헤이트풀 8]을 보다보니 도저히 멈춤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구피도 회사에서 야근을 한다고해서 웅이가 태권도장에서 돌아오는 밤 8시까지 2시간 가량 저는 배고픔도 잊고 [헤이트풀 8]에 빠져들었습니다. 비록 남은 1시간은 밤 10시에 마저 봐야 했지만 분명 [헤이트풀 8]은 2시간 50분이라는 기나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몰입도가 굉장했던 영화입니다.
영화의 내용은 꽤 복잡합니다. 레드락 타운으로 흉악범을 이송해가는 현상금 사냥꾼 존 루스(커트 러셀). 그는 흉악범 데이지 도머그(제니퍼 제이슨 리)를 레드락 타운에 데려가 교수형에 처하려합니다. 그런데 악천후를 뚫고 레드락 타운으로 가던 중 악명높은 흑인 현상금 사냥꾼 마커스 워렌(사무엘 L. 잭슨)을 만나게 되고, 조금 더 가서는 레드락의 신임 보안관이라는 크리스 매닉스(월튼 고긴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눈보라 때문에 타고 오던 말을 잃고 존 루스에게 레드락 타운까지 함께 가자고 요청합니다. 의심이 많은 존 루스. 하지만 그들을 버려뒀다가는 악천후 속에 얼어 죽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미심쩍지만 그들을 마차에 태우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상황은 계속됩니다. 악천후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머물게된 미니의 잡화점에 정체불명의 네남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미니 대신 며칠간 가게를 봐주기로 했다는 밥(데미안 비쉬어), 교수형 집행인 오스왈도(팀 로스), 그리고 카우보이 조 게이지(마이클 매드슨)와 퇴역한 남부군 장교 스미더스(브루스 던)까지... 존 루스는 직감적으로 그들 중에서 데이지를 구하기 위해 숨어든 첩자가 있음을 눈치챕니다.
잘 짜여진 추리극같지만 타란티노식 피칠갑 서부극이다.
[헤이트풀 8]의 진가는 바로 미니의 잡화점에서 여덞명의 혐오스러운 캐릭터들이 한데 모이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존 루스의 의심대로 그는 누군가 커피에 탄 독극물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과연 누가 커피에 독을 탔을까요? 존 루스의 죽음과 동시에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마커스 워렌의 기가 막힌 추리가 시작됩니다.
제가 이 영화에 푹 빠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2시간 50분동안 한 장면, 한마디 대사조차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연출력 덕분입니다. 잡화점에 애착이 많았던 미니는 왜 갑자기 낯선 이방인 밥에게 잡화점을 맡긴 것일까요? 잡화점의 문은 왜 고장이 났던 것일까요? 쿠엔티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답게 영화 속의 캐릭터들은 온갖 잡다한 수다를 쉴새없이 떠들어대지만, 그들의 대화 하나하나, 영화 속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사건의 진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존 루스의 죽음과 함께 마커스 워렌은 자신이 관찰한 것을 토대로 사건의 진실을 밝혀냅니다.
하지만 [헤이트풀 8]은 추리극이 아닌 서부극입니다. 게다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서부극입니다. 그렇다면 마커스 워렌이 '명탐정 코난'처럼 "네가 범인이지!"라고 밝히며 영화가 순순히 끝날리가 없습니다. 그것을 기대했다면 당신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총격전이 이어지고, 피가 난무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쯤되면 잘 짜여진 추리극같지만 결국 타란티노식 완벽한 피칠갑 서부극이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혐오스럽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시절
영화의 제목인 '헤이트풀(Hateful)'은 '혐오스러운'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결국 '헤이트풀 8'은 혐오스러운 8명이라고 직역해도 될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한결같이 혐오스럽습니다. 현상금 사냥꾼 존 루스와 마커스 워렌은 물론이고, 흉악범 데이지 도머그, 그리고 신임 보안관이라는 크리스 매닉스와 정체 불명의 네명의 남자 밥, 오스왈도, 조 게이지, 스미더스까지...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것은 물론이고, 인종차별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저는 마커스 워렌이라는 캐릭터가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남북전쟁의 직후의 미국에서 흑인으로써 살아남아야 했던 마커스 워렌은 백인이 존경해마지않는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자신에게 쓴 편지를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그 덕분에 마커스 워렌은 존 루스의 마차를 얻어탈 수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크리스 매닉스에 의해 그 편지가 가짜임이 들통이 나지만 마커스 워렌은 흑인으로써 살아남으로면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영화 후반부에 마커스 워렌은 존 루스를 독살한 범인을 잡아내는 카리스마도 발휘하지만 인종차별주의자인 스미더스를 자극해서 죽여버리는 잔인한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무엘 L. 잭슨에 의해 완벽하게 구축된 마커스 워렌. 이 영화의 모든 배우들이 출중한 연기력을 선보였지만 역시 사무엘 L. 잭슨의 연기는 갑중에서도 갑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덕분에 혐오스러운 8명의 캐릭터 중에서 마커스 워렌이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진실과 거짓을 오고가는 이 영화, 끝나고나서도 여운이 남는다.
저는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영화를 되돌려 인상깊었던 장면들을 다시 보는 등 [헤이트풀 8]의 여운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특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와중에도 영화 속의 거짓과 진실이 궁금해서 그 뒷이야기는 없는지 인터넷 사이트를 한참 뒤졌습니다.
정말 에이브라함 링컨이 보냈다는 마커스 워렌의 편지는 가짜였을까요? 정말 크리스 매닉스는 레드락 타운의 신임 보안관이 맞을까요? 정말 데이지 도머그를 구하기 위해 15명의 부하들이 레드락 타운에서 기다리고 있을까요? 무엇하나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지만 영화는 그대로 끝이나버립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헤이트풀 8]의 속편이라도 만들 계획인 것인지... 만약 진짜 만든다면 러닝타임이 3시간이 넘어도 꼭 극장으로 달려가서 봐야 겠습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서정적인 음악도 좋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매력적이었고, 영화에 대한 흡입력도 엄청났습니다. [헤이트풀 8]에서 아쉬운 점을 찾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영화가 완벽하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또 다른 서부극 [장고 : 분노의 추적자]보다 [헤이트풀 8]이 더 좋았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니... 시간적,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긴 러닝타임 영화를 의식적으로 피했던 제 자신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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