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호재
주연 : 이성민, 이희준, 이하늬, 채수빈
개봉 : 2016년 1월 27일
관람 : 2016년 2월 7일
등급 : 12세 관람가
7년만에 어머니와 영화를 보던 날
올해 설 연휴는 최장 5일로 유난히 길었습니다. 이렇게 기나긴 연휴를 맞이하면 저는 영화볼 계획을 세우기에 바쁩니다. 하지만 이번 설 연휴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가 [로봇, 소리]와 [검사외전]밖에 없네요. [검사외전]은 이미 설 연휴 마지막날 구피와 보기로 약속되어 있었고, [로봇, 소리]만 설 연휴 기간중에 웅이와 함께 보면 제 영화 보기 계획은 완벽해집니다.
그런데 웅이와 [로봇, 소리]를 보려고 열심히 계획을 세우는 제게 구피가 "왜 어머니하고는 영화를 보러 안가?"라고 묻습니다. 사연은 이러합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자주 어울리시는 이모님이 아들 내외와 [히말라야]를 봤다고 자랑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이모님을 부러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구피는 이번 설 연휴에 어머니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제가 어머니와 함께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버지가 살아계셨을때 함께 본 [워낭소리]로 무려 7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2015년 1월에는 어머니께서 혼자만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못보셨다며 제게 서운해하신 적도 있었고,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자주 극장에 가야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러한 다짐을 저는 또다시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설 전날인 일요일,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설 제사 음식을 만든후 저는 어머니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처음엔 "그냥 너희들끼리 보고 와."라고 거절하시더니 나중에는 못이기는척 "그래, 그러면 영화 보라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저는 부랴부랴 영화를 예매해야 했는데, 어머니의 집 근처 극장인 청량리 롯데시네마에서 [로봇, 소리]를 예매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만에 어머니와 극장 나들이를 한 저희 가족을 위해 하늘도 도우셨는지 그날 청량리 롯데시네마에서는 [로봇, 소리]의 이호재 감독과 주연배우들인 이성민, 이하늬, 채수빈, 그리고 로봇인 '소리'의 무대 인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배우들을 실제로 보는 것이 처음이라며 신기해하셨고, 웅이도 "아빠, 나도 무대인사보는 것은 처음이예요."라며 즐거워하더군요. 덕분에 저는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어머니께서는 졸으셨다고 합니다. 설 제사 음식을 준비하시느라 피곤하셨나봅니다. 초반 졸으시는 바람에 중반부터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쫓아가기 어려웠다고 아쉬워하셨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극장 나들이가 재미있으셨다네요. 영화를 보고나서 맛난 외식도 하고, 웅이는 토이저러스에서 장난감 구경도 실컷 한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명절때마다 제사 음식을 만든 후 영화보러 가기로 어머니와 약속을 했습니다. (이후 영화의 내용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희망이다.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에서 50대 남자가 휘발유를 담은 페트병 2개에 불을 붙인 뒤 바닥에 던져 총 12량의 지하철 객차를 뼈대만 남긴 채 모두 태워버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192명이 사망했고, 148명이 부상하는 인명피해가 났습니다. [로봇, 소리]는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하나뿐인 딸 유주(채수비)가 실종된 후 10년동안 딸을 찾아 헤매는 해관(이성민)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영화는 처음부터 대구 지하철 참사를 소재로 했음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저 10년전 실종된 유주를 애타게 찾는 해관의 모습을 비출 뿐입니다. 그렇기에 관객인 제 입장에서 처음엔 유주가 어쩌다가 실종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영화가 진행되며 점차 유주의 실종에 대한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는 형식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호재 감독은 처음부터 당당하게 대구 지하철 참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고 밝히지 못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희망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이 영화가 대구 지하철 참사를 소재로 하고 있음을 밝혔다면 저는 유주가 이미 죽었고, 해관은 헛된 희망을 품고 유주를 찾아 해메고 있음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해관이 품고 있는 희망이 헛된 것이라면 유주를 찾아헤매는 해관의 행동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게 됩니다. 결국 이호재 감독은 관객인 제가 해관처럼 유주를 찾을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품고 영화를 보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해관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진심어린 충고를 하지만 해관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고요? 그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것보다 자식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라도 품는 것이 아버지인 해관으로써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한 해관에게 정체불명의 로봇 '소리'(심은경)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목소리를 모두 기억하는 '소리'. 해관은 '소리'가 유주를 찾을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모두들 유주는 죽었으니 이제 그만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해관은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유주의 죽음을 인정하기엔 그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유주가 살아있다는 희망 하나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해관의 희망은 국정원 요원인 진호(이희준)의 끈질긴 추적을 따돌리는 힘이 됩니다. 해관은 결코 슈퍼 히어로가 아니지만, 유주를 찾을 수 있다는 작은 희망하나만으도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렇게 [로봇, 소리]는 해관과 '소리'를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희망을 꺾는 과정으로 진행됩니다. '소리'의 도움으로 유주의 실종 사건의 전말에 점점 다가서는 해관이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결국 유주가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 뿐이기 때문입니다. 유주를 찾기 위한 마지막 여정으로 대구 지하철 참사 현장을 찾은 해관의 모습은 그렇기에 제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보호는 좋은 것입니까?
[로봇, 소리]는 기본적으로 대구 지하철 참사로 딸을 잃은 해관이 기나긴 여정 끝에 딸의 죽음을 인정하게되는 과정을 담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하게 해관의 부성애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더 중요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집니다. 그것은 바로 "보호는 좋은 것입니까?"라는 해관을 향한 '소리'의 질문입니다.
이 영화엔 두가지 보호가 나옵니다. 하나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보호입니다. 해관은 분명 유주를 사랑했습니다. 그렇기에 거친 세상을 향해 홀로서기를 해야할 유주를 보호하려고합니다. 유주는 노래를 하고 싶었지만, 해관의 입장에서 그것은 옳은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유주가 "아빠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무 것도 모르잖아."라고 항변을 해도 해관은 "조금이라도 세상을 더 산 아빠 말을 들어라."라며 윽박을 지를 뿐입니다.
해관은 그런 식으로 유주를 보호했지만 그것은 과연 좋은 보호였을까요?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보호를 위해 자식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으려 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뜻대로 살으라고 강요한다면, 그래서 자식의 행복을 가로막는다면 그것을 과연 좋은 보호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해관은 "보호는 좋은 것입니까?"라는 '소리'의 질문에 결국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로봇, 소리]에 나오는 또 하나의 보호는 국민에 대한 국가의 보호입니다. 우리가 세금을 내고 국민의 대표를 뽑아서 정부를 구성하고 국가를 운영하게 하는 것은 보호받기 위해서입니다. 국가라는 테두리안에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은 국가의 의무입니다. 국민을 보호할 능력도, 생각도 없는 국가라면 존재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는 미국과 우리나라의 정보기관이 나옵니다. 정보기관이 대체적으로 하는 일은 국내외 위협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인공지능 스파이 위성을 만들어 전세계의 모든 소리를 도청하게 한 것도 미국에 가해질 위협을 차단하기 위한 방책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위협을 차단하기 위해 민간인 지역을 폭격하여 죄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간다면 그것은 과연 좋은 보호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국정원의 직원인 진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소리'의 도청 정보를 차지하기 위해 항공우주연구원인 지연(이하늬)를 협박하고 해관에게 무력을 행사합니다. 그는 국민의 보호는 안중에도 없고 오히려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해 민간인 사찰을 공공연하게 자행합니다. 과연 특정집단의 보호를 위해 국민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진호의 보호는 좋은 보호일까요?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좋은 보호를 원한다.
[로봇, 소리]에는 온통 나쁜 보호만 나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든 보호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전 세계가 국가의 보호를 거부한 무정부 상태가 된다면 법도 질서도 소용이 없는 무법지대가 될 것입니다. 인간이 원시시대부터 집단을 이루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스스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지킬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가라는 것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거의 유일한 방법임은 분명합니다.
부모의 보호 또한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이가 어린 미성년자는 부모의 보호를 따라야합니다. 처음엔 아버지, 어머니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 자신이 부모 입장이 되면 어렸을 적, 부모님이 왜 내게 그러한 결정을 강요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아마 유주도 대구 지하철 참사로 죽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해관의 마음을 이해하고 서로 화해했을 것입니다.
'소리'는 마지막 순간에 해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호해주서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보호라는 것은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베푸는 의무입니다. 그렇기에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하고, 부모는 자식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해관은 작은 로봇에 불과한 '소리'를 보호함으로써 '소리'가고자 하는 곳에 보내줍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보호하는 사람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 해관이 유주의 말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해관의 입장에서 유주가 공부를 그만두고 음악을 하겠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유주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대화로 풀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것은 해관 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녀를 보호할 의무가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자녀를 내 뜻대로 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보호가 좋은 보호가 되려면 무조건적인 강요가 아닌 자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최대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할 것입니다.
국가의 보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완벽하지 않듯이 인간으로 구성된 정부 또한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줬지만 그들의 의무가 잘 이뤄지고 있는지 끊임없이 감시해야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이 한 개인의 일탈에 의한 것이라는 뉴스는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의 감시가 소홀하다면 언제든지 그들은 보호라는 명목아래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해 오히려 우리의 안전을 해칠 것입니다. [로봇, 소리]는 부성애와 더불어 보호의 의미를 제게 다시한번 생각하게끔 만들어줬던 영화입니다.
우리는 약한 자를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고,
강한 자에게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결국 보호는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최소한의 장치이다.
그래서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좋은 보호를 할 것이고, 또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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