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리들리 스콧
주연 : 맷 데이먼, 제시카 차스테인, 제프 다니엘스, 숀 빈
개봉 : 2015년 10월 8일
관람 : 2015년 10월 11일
등급 : 12세 관람가
SF영화? 재난영화?
2013년에 개봉한 [그래비티]는 상당히 독특한 영화였습니다. 대개 우주공간을 무대로한 영화의 경우 장르는 SF영화가 됩니다. 하지만 [그래비티]는 SF영화보다는 재난영화에 더 가까웠습니다. SF영화, 즉 공상과학영화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공상적 드라마를 영화화한 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현재에는 불가능하지만 미래에는 일어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죠.
그렇다면 [그래비티]는 어땠을까요? [그래비티]는 분명 실화를 바탕으로한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허블 망원경 수리를 위해 우주를 탐사하던 스톤(산드라 블록) 박사가 인공위성 잔해에 부딪혀 위기를 맞이하는 것은 미래가 아닌 지금 현재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그래비티]는 SF영화보다는 재난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비티]가 사실적인 설정과 영상으로 SF영화의 주요 무대였던 우주를 재난영화의 무대로 바꾸어 버렸다면, 1년후 개봉한 [인터스텔라]는 한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국내에서 [아바타], [겨울왕국]에 이어 외국영화로는 세번째로 천만관객 돌파라는 기록을 달성한 [인터스텔라]는 [그래비티]와는 정반대로 재난영화의 형태를 띈 SF영화였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세계 각국의 정부와 경제가 완전히 붕괴된 가까운 미래이고, 내용은 지구를 벗어나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는 쿠퍼(매튜 맥커너히)의 모험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쿠퍼의 모험이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짐으로써 마치 재난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우주라는 공간은 몇 년전만해도 일반인들에게는 미지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우리 일반인들에게 무한한 상상력과 더불어 알 수 없는 공포심을 자극시켰습니다. 그러한 공포심을 이용한 것이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입니다. 드넓은 우주 어딘가에 인류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생명체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정으로 시작한 [에이리언]은 이후 우주를 배경으로한 SF영화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이상 우주는 미지의 공간이 아닙니다. 이미 NASA는 달 탐사를 넘어 본격적인 화성 탐사를 시작했고, 탐사로봇 큐리오시티를 통해 화성에 대한 사진이 실시간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조만간 화성에 유인우주선을 보낸다고하니 화성에 인간의 발자국을 남길 날도 머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주를 배경으로한 SF영화들도 점차 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에이리언]의 영향으로 외계생명체와의 사투라는 천편일률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래비티]와 [인터스텔라]를 거치면서 좀 더 사실적인 이야기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난 일요일 [팬]을 본 이후 웅이와 두번째로 본 영화 [마션]은 SF영화의 최근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마션]은 화성에서 조난을 당한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의 이야기입니다. 분명 소재만 놓고본다면 SF영화이지만, [마션]은 그 어떤 재난영화보다도 사실적으로 화성에 혼자 남겨진 마크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선보입니다. 그럼으로써 [마션]은 [그래비티]보다는 좀 더 SF영화에 가깝고, [인터스텔라]보다는 좀 더 재난영화에 가까운 그 중간 지점을 성공적으로 안착하였습니다.
더이상 화성은 미지의 공간이 아니다.
화성은 제 2의 지구라고 불리울 정도로 태양계에서 지구와 가장 흡사한 행성이며, 외계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이 가장 높은 행성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끊임없이 화성을 탐사했고, 화성을 소재로한 소설, 영화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가장 인상깊었던 영화는 팀 버튼 감독의 [화성 침공]입니다. 어느날 화성인이 지구에 출현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은 이 영화는 팀 버튼 감독 특유의 블랙 코미디가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존 카펜더 감독의 [화성의 유령들]은 서기2176년을 배경으로 자원고갈과 인구과잉으로 더이상 지구에 살 수 없게된 인류가 화성을 식민지화하면서 벌어지는 공포영화입니다. 화성의 광산 발굴 중 의문의 봉인이 풀리자 화성의 유령들이 인간의 몸을 하나둘씩 점령해 나간다는 내용입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미션 투 마스]와 안토니 호프만 감독의 [레드 플래닛]도 화성에서 만난 미지의 생명체에 의한 공포를 다룬 영화입니다. 특히 [미션 투 마스]는 [마션]과 마찬가지로 화성에 조난당한 탐사 대원과 그들의 구조 작전이라는 설정을 지니고 있지만, [마션]과는 전혀 다른 형식으로 영화가 진행됩니다. 그렇기에 이 두 영화를 비교하면서 본다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이렇듯 지금까지의 화성은 외계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이 가장 높은 행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에이리언]의 영향을 받은 미지의 생명체에 대한 공포로 영화의 재미를 획득하려합니다. 하지만 [마션]은 이들 영화와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마크는 화성 탐사 도중 모래폭풍을 만나 조난을 당하지만 그를 위협하는 것은 외계 생명체가 아닌 인간이 살 수 없는 화성의 환경 뿐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영화의 감독이 리들리 스콧이라는 점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에이리언]을 통해 '우주를 배경으로한 SF영화 = 미지의 외계 생명체' 공식을 완성한 감독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공식을 깨고 [마션]에서는 외계 생명체 따위는 등장하지 않은 사실적인 SF영화를 선보인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틀을 깨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리들리 스콧 감독이 거장인 이유이겠죠.
[마션]을 보고 있으면 화성이라는 공간이 더이상 미지의 공간이 아닌 매우 친숙한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마크는 갑작스러운 모래 폭풍으로 혼자 화성에 남겨지지만 침착하게 구조를 기다리며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위기를 해쳐나갑니다. 이 영화의 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화성에서의 조난이라는 SF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션]은 마치 마크가 무인도에 조난당한 사람 취급을 합니다. 마크는 기지에서 감자를 키워 식량을 조달하고, 오래전에 작동이 멈춘 구식 통신기계로 NASA와의 통신을 시도하는 등 전혀 SF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화성에서의 조난을 해쳐나갑니다.
그래서 [마션]은 새로웠습니다. 만약 무시무시한 외계 생명체가 마크를 공격하는 장면이 나왔다면 영화는 더욱 스릴이 넘쳤을테지만, 결코 새로움은 느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션]은 사실적인 마크의 화성에서의 조난을 통해 새로움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얻어낸 셈입니다.
인위적 감동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다.
[마션]의 놀라운 점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마크의 조난에 감동이라는 흥행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의도적으로 배제시킵니다. 저는 [마션]을 보며 적당한 때에 마크의 가족이 등장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마크가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 딸이 등장하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한 마크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영화의 감동을 구축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션]은 마크의 가족을 등장시켜지 않습니다. 마크가 아레스3 화성탐사대의 대장인 멜리사(제시카 차스테인)에게 만약 자신이 화성에서 죽음을 맞이하거든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뿐입니다. 화성 탐사대의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크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부릅쓰고 다시 화성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대원들이 가족들과 짧은 화상 통화를 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을 감동으로 연결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션]은 굉장히 뚝심이 있는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무대는 화성에 혼자 남겨진 마크와 마크가 죽은줄 알고 마크만 화성에 남겨둔채 지구로 되돌아가던 아레스3 화성탐사대, 그리고 마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그를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NASA가 전부입니다. 영화가 산만해질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을 모두 배제시키고 마크의 화성에서의 조난에 모든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요소들이 [마션]을 조금은 심심하게 느껴지도록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크를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지 않으니 긴장감을 느낄만한 요소가 부족하고, 마크가 살아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는 가족들이 등장하지 않으니 관객의 눈시울을 뜨겁게 할만한 감동 요소가 아예 없습니다. 그저 화성에 홀로 남겨졌지만 침착하게 상황을 대처하는 마크와 그를 구해야 하는 NASA의 동료들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긴장감과 감동이 없어도 [마션]은 충분히 멋진 영화가 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마션]은 인위적인 긴장감과 감동은 없지만 그 대신 현실적인 긴장감과 감동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화성에서 어떻게든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텨야 하는 마크의 필사의 노력과 예기치 않은 화성의 환경으로 긴장감이 완성되고, 마크를 구조하기 위해 시간과의 사투를 벌이는 NASA 직원들과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화성으로 향하는 아레스3 화성탐사대 대원들의 동료애를 통해 감동이 완성됩니다.
이렇게 모든 상황과 긴장감, 감동이 현실적이다보니 [마션]은 아직은 벌어지지 않은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 자신이 화성에 조난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이어나고 싶지만, 어쩌면 화성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마크의 모습을 보며 저는 어느사이 마크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흠뻑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구조의 정치학
어쩌면 [마션]은 굉장히 단순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한 남자가 화성에 홀로 조난을 당했고, 동료들은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는 것으로 영화의 모든 내용을 압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보이는 이야기 속에 [마션]은 복잡한 이야기를 감춰 놓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마크의 구조를 둘러싼 NASA의 서로 다른 입장들입니다.
NASA의 국장인 테디 샌더스(제프 다니엘스)는 처음 마크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기쁨이 아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머나먼 화성으로 마크를 구하러 간다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시간적인 문제가 가장 큽니다. 아무리 다음 화성탐사대가 화성탐사를 서두른다고 해도 몇년은 걸리는데, 그때까지 마크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렇다고해서 죽은줄 알았던 마크가 기적적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모든 언론이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죽도록 내버려둔다면 비난여론을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화성 탐사대의 책임자인 미치 핸더슨(숀 빈)은 마크의 생존을 아레스3 화성탐사대 대원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테디는 반대합니다. 1명의 대원 때문에 다른 대원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렇게 마크가 화성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동안 NASA에서는 마크의 구조에 대한 각기 다른 정치적 입장이 현실적으로 부딪치고 있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크의 구조 장면도 사실적이지만 극적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마크를 구하기 위해 다시 화성으로 향한 아레스3 화성탐사대 대원들. 하지만 화성에 착륙하여 마크를 데려오는 방식이 아닌 화성의 대기권 밖에서 마크와 도킹을 해야하는 고난도의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저는 마크가 결국 구조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크가 구조되는 그 순간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습니다.
마크의 구조 작업이 극적으로 성공하고, 마크를 비롯한 사람들이 지구에서 일상생활로 돌아간 장면을 보고나서야 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마크의 구조 작전의 여파로 NASA를 관둬야 했고, 어떤 이는 또다시 우주로 나가기 위해 훈련을 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는 자신의 경험담을 후배들에게 교육시켜줍니다. 그들은 모두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살아남아 이렇게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이겠죠.
분명한 것은 [마션]은 [에이리언]이 그러했듯이 SF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만한 영화라는점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에이리언]을 비롯해서 [블레이드 러너],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마션]까지 SF영화에서만큼은 결코 저를 실망시키지 않네요. 이렇게 [마션]을 재미있게 보고나니 이번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차기 프로젝트인 [프로메테우스 2]가 너무나도 기대됩니다.
[마션]을 보고 있으면 어쩌면 나도 죽기전 우주에 가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긴다.
어린 시절 밤 하늘을 바라보며 우주에 대한 막연한 공상만 했었는데,
어느새 우주는 이렇게 공상의 공간이 아닌, 우리 현실의 공간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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