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발타자르 코루마쿠르
주연 : 제이슨 클락, 조쉬 브롤린, 존 호키스, 키이라 나이틀리, 로빈 라이트
개봉 : 2015년 9월 24일
관람 : 2015년 9월 28일
등급 : 12세 관람가
우리가 산에 오르는 이유
2014년 가을, 저희 회사는 제주도로 2박3일 야유회를 갔었습니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야유회였기에 직원들 모두 좋아했지만, 한가지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주도 야유회 2일째 일정이 한라산 정산 등반이라는 점입니다. 다들 제주도까지 가서 꼭 한라산 정상 등반이라는 힘든 일을 해야하느냐고 투덜거렸지만, 결국 한라산 정상 등반 일정은 강행되었습니다.
평상시 운동이라면 숨쉬기 운동밖에 하지 않는 저는 한라산에 올라가다가 혼자 낙오될까봐 두려워 한라산에 가기 전에 북한산을 두번 오르며 체력 단련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라산 정상 등반은 생각보다 힘들었습니다. 등반 코스가 워낙 길어서 한라산을 올라갈땐 너무 지루했고, 한라산을 내려올땐 무릎이 너무 아파 절룩거리며 거의 꼴찌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백록담에서 바라본 제주도의 풍경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날 제주도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백록담에서 제주도의 풍경이 휜히 보였는데, 정말 장관이더군요.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올랐다는 뿌듯함도 느꼈습니다. 비록 산에 올라갈땐 힘들었지만, 아마도 이러한 기분 때문에 많은 분들이 산에 오르는 것은 아닐까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의 높이는 해발 1,947m입니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무엇일까요? 바로 에베레스트입니다. 인도 북부 네팔과 중국 남부 티베트에 위치한 에베레스트의 높이는 무려 해발 8,848m입니다. 한라산보다 4.5배가 높은 셈입니다. 영화 [에베레스트]는 1996년을 배경으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고자하는 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담은 영화입니다.
솔직히 저는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를 보다보면 그들이 왜 거액의 돈과 목숨을 내걸고 '에베레스트'에 오르기 위해 그토록 노력을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에베레스트'에 왜 오르려 하느냐는 칼럼리스트의 질문에 누구는 "나 같이 평범한 사람도 위대한 도전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라고 대답했고, 또 다른 누구는 "에베레스트에 올라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제가 1년전 한라산 정상에서 느꼈던 것들이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에베레스트]를 봤던 9월 28일의 제 컨디션은 거의 최악이었습니다. 추석 당일 친척들과 오랜만에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술을 마시고 새벽에 집에 들어와 다음날 숙취가 채 가시기도 전에 웅이와 극장에 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속쓰림과 지끈거리는 두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는 나도 모르게 두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에베레스트]의 그 무엇이 최악의 컨디션으로 영화를 본 제 마음까지 움직였던 것일까요?
상업 등반 가이드의 임무
[에베레스트]가 제게 더욱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이 영화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 덕분입니다. 사실 이전의 등반 영화들은 대부분 전문모험가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전문모험가들은 '에베레스트' 정복과 같은 위험한 모험을 전문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들의 모험은 존경스럽기는 해도 공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의 주인공은 위대한 모험가가 아닌 그냥 저와 같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이 영화는 '에베레스트'의 상업 등반이 일반화된 199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상업 등반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은 '에베레스트' 정상 등반이 하나의 관광상품처럼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면 아이젠을 제대로 착용하지 못하는 초보들조차 '에베레스트'에 오르겠다며 몰려듭니다. 그들은 전문모험가가 아닙니다. 그저 일정한 댓가를 지불하고 '에베레스트'라는 관광상품을 체험하기 위해 모여들었을 뿐입니다.
'에베레스트'의 상업 등반 가이드 롭 홀(제이슨 클락)의 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팀에 모여든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전문 등반가보다는 보통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중 집배원인 더그 한센(존 호키스)은 이미 '에베레스트' 정상 등반에 두번이나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세번째 기회가 마지막입니다. 겉보기에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지만 평소 우울증에 시달리는 벡 웨더스(조슈 브롤린)는 우울증 극복을 위해 '에베레스트' 등반을 신청합니다.
롭은 전문 산악인이 아닌 그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킵니다. 롭의 팀에 들어온 사람들이 롭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롭이 돕는 것. 하지만 롭은 정상 등반보다 안전을 더욱 중요시합니다. 그는 '에베레스트' 정상 등반에 실패하더라도 자신의 팀을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원하는 롭의 임무와 롭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임무는 서로 상반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롭의 팀에 들어온 것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기 위함이지 안전하게 집에 가기 위함이 아닙니다. 안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에베레스트' 정상 등반이라는 위험한 모험을 자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롭의 두가지 임무가 충돌함으로써 [에베레스트]는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롭은 '에베레스트' 팀원들을 정상에 오르도록 도우면서 한가지 원칙을 세웁니다. 오후 2시에는 정상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원칙은 더그로 인하여 무너집니다. 이미 두번의 실패를 경험한 더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에베레스트' 정상 등반을 포기하지 않으려합니다. 하긴 더그의 입장에서는 눈 앞에 정상이 보이는데,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더그가 원하는 롭의 임무와 롭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임무가 충돌했고,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에베레스트'에 와 있는 느낌
영화가 끝나고나서 더그가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면... 롭이 자신의 원칙을 꺾지 않았다면... 이라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거액의 돈을 들여 '에베레스트'에 온 더그도, 거액의 돈을 받고 '에베레스트' 등반을 도운 롭도, 다른 선택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더그는 돈을 낸 고용주이고, 롭은 더그의 돈으로 고용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상업 등반의 문제점은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닐까요?
[에베레스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실존 인물들의 실제 이야기가 담담하게 펼쳐질 뿐입니다. 만약 영화를 좀 더 재미있게 만들으려 했다면 영화속 캐릭터들의 갈등을 좀 더 심화시키고, 재난 영화의 스펙타클을 좀 더 과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에베레스트]는 롭과 그의 팀원들이 '에베레스트'에 오르면서 겪게 되는 것들을 사실적으로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렇기에 [에베레스트]는 재난영화이면서도 드라마적 요소는 약합니다. 이 영화의 드라마적 요소라고는 롭과 그의 임신한 아내 잰 홀(키이라 나이틀리)의 이야기, 그리고 벡과 그의 아내 피치 웨더스(로빈 라이트)의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도 약간 겉돕니다. 특히 벡과 피치의 이야기는 뜬금없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벡과 피치의 캐릭터만 조금 강화했어도 그들의 이야기에 극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가 꽤 많았는데 [에베레스트]는 의도적으로 그러한 재미들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드라마적 요소를 포기한 대신 [에베레스트]는 2시간의 러닝타임동안 관객이 '에베레스트'와 있다는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생생함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실제 저는 영화를 보면서 약간의 추웠습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영화 속 '에베레스트'의 영하 40도가 넘는 추위가 영화를 보는 제게도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숙취에 의한 속쓰림과 두통을 느꼈었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그러한 것들을 느낄 겨를이 없었습니다. 정상에 오를수록 희박해지는 산소와 극심한 추위를 생생하게 느끼는 동안 숙취에 의한 속쓰림과 두통 따위와 같은 가벼운 고통은 어느새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에베레스트]의 미덕은 바로 그것입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겠다고 모여든 평범한 사람들이 '에베레스트'에서 느끼는 고통. 영화는 바로 그것을 관객에게 전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베레스트]는 아이맥스 3D로도 상영한다고 합니다. 사실 영화를 보고나서 이 영화를 아이맥스 3D로 봤으면 큰일 날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의 스크린에서도 이렇게 '에베레스트'에서 느낄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졌는데, 아이맥스 3D로 봤다면 더욱 생생했을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에베레스트]를 아이맥스 3D로 보려고 계획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무릎 담요를 꼭 지참하실 것을 추천해드립니다.
남아 있는 가족의 두려움
앞서 이야기했지만, 저는 [에베레스트]를 보며 두뺨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드라마적 요소가 그다지 강한 영화가 아니라서 다른 재난영화와는 달리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남아 있는 가족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롭은 전문 산악인입니다. 만약 그가 혼자 '에베레스트'에 오른다면 그는 얼마든지 안전하게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상업 등반 가이드라는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전문 산악인이 아닌 초보들을 안전하게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돕는 것은 혼자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몇배는 힘들고 위험한 일입니다. 같은 산악인 출신인 잰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롭이 일을 시작할때마다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을 때, 오히려 그녀는 침착하게 행동합니다. 이는 그녀가 마음 속으로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롭이 상업 등반 가이드라는 위험한 일을 선택했을 때부터 그녀는 최악의 상황을 준비했고, 그렇기에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때 침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저는 침착한 잰의 모습이 더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잰과는 달리 마음의 준비가 미처 되어 있지 못했던 피치는 벡의 소식을 듣고 무너집니다. 그녀가 아빠의 소식을 어린 아이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서 저는 또다시 눈물이 하염없이 두뺨으로 흘러내렸습니다. 벡이 안락한 집을 놔두고 '에베레스트' 정상 등반이라는 위험한 모험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간절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벡의 캐릭터가 많이 생략되었지만 그는 사회적 성공을 거둔 인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루었지만 마음 속 한구석에 남아 있는 우울증을 떨칠 수 없었던 그는 위험한 모험을 통해 살고 싶다라는 의지를 스스로 깨우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후반부 그의 모습이 이러한 그의 의지를 설명해줍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을 나서니 따가운 햇살이 제 몸을 비췄습니다. [에베레스트]를 보며 영하 40도의 추위를 생생하게 느끼고 난 다음이라서 그런지 햇살이 오히려 저를 기분좋게 만들더군요. [에베레스트]를 본 웅이는 약간 충격을 받았나봅니다. 즐거운 애니메이션과 신나는 슈퍼히어로 영화를 주로 봤던 웅이 입장에서는 이런 비극적인 재난영화는 첫 경험이었을테니까요. 그런 웅이의 손을 꼭 잡고 집으로 향하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얼마나 행복한 곳인지... 마지막 순간 가족을 떠올렸을 수 많은 '에베레스트'의 희생자들도 아마 가족과 함께 있는 평범한 공간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요?
우리의 삶이 항상 안전하고, 항상 행복하다면
그것의 소중함을 우리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위험한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기 위해 모험을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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