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5년 영화이야기

[베테랑] - 자본주의 시대의 신분제에 대한 통쾌한 한방

쭈니-1 2015. 8. 13. 17:21

 

 

감독 : 류승완

주연 : 황정민, 유아인, 오달수, 유해진

개봉 : 2015년 8월 5일

관람 : 2015년 8월 12일

등급 : 15세 관람가

 

 

평등은 가능한 것일까?

 

1894년 봄, 호남에서부터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조선은 개혁에 착수합니다. 그 중 가장 파격적인 개혁이 바로 신분제 폐지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양반과 상민, 천민으로 구성된 신분 제도를 유지했던 조선에서 갑자기 신분제를 폐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개혁을 이끌었던 농민군이 일본군의 개입으로 약화되면서 양반 유생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던 유길준은 양사회의 모습을 상세하게 소개한 <서유견문>에서 "인간이 향유하는 권리는 하늘이 부여한 것... 사람 위에 사람없고 사람 아래 사람없고 천자도 사람이며 필부 또한 사람"이라며 천부인권설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민권을 강조한 유길준도 "민이 어리석어 지금 당장 권리를 쥐어 줄 수는 없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2015년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더이상 신분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11조에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해서 과연 우리는 정말 평등한 것일까요?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은 새로운 신분제을 만들어 냈습니다. 돈으로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기에 부자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처음부터 사회적, 경제적 성공에 쉽게 다가갈 수가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죽도록 노력해도 성공을 이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는 태어날때부터 평등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분 상승을 위한 몸부림입니다.

[베테랑]을 보고 왔습니다. [베테랑]은 강력계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에 맞서 정의를 실현시키는 영화입니다.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과 비슷한 영화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베테랑]은 개봉 첫주부터 천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암살]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미션 임파서블 : 로그네이션]을 제치고 당당하게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평일에도 [베테랑]은 30~4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8월 12일까지 400만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베테랑]을 개봉 전부터 기대하긴 했지만 이 영화가 이렇게 흥행에 성공할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액션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구피도 "이 영화, 재미있대."라며 지난 수요일 밤, 피곤함을 무릅쓰고 [베테랑]을 보기 위해 저를 따라 나서는 것을 보면 [베테랑]은 확실히 우리나라 관객에게 어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객들은 [베테랑]을 본 후 "속시원하다."라고 외칩니다. 왜일까요?

 

 

현대사회의 홍길동전

 

"속시원하다."라는 [베테랑]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새로운 신분제에 대한 영화의 통쾌한 한방 덕분이 아닐까요?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조선 중기 허균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고전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인 홍길동을 비롯하여, 천민인 백정 출신의 도적 임꺽정, 조선 숙종때 활동했던 장길산 등은 조선 시대의 신분제에 통쾌한 한방을 날린 대표적 서민 영웅입니다.

이처럼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이 조선의 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신분제에 대한 반감 떄문입니다. 태어날때부터 양반이었던 이들은 자신의 우월한 신분을 믿고 온갖 나쁜 짓을 해도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저 힘없는 상민, 천민들만 그들에게 억울하게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조선의 3대 도적이라 일컬어지는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은 힘없는 약한자의 편에 서서 양반에 맞서 싸운 것입니다.

[베테랑]도 비슷합니다. 단지 체불임금을 받고 싶었던 트럭운전수 배기사(정웅인)는 현대사회의 천민입니다. 그는 하루하루 열심히 일을 하지만 좀처럼 형편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진 자의 횡포로 점점 가난의 나락 위에 떨어질 뿐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현대사회의 귀족이자 양반인 조태오(유아인)앞에 섭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류승완 감독은 배기사가 조태오가 당하는 장면에서 관객이 최대한 분노를 느낄 수 있게끔 처리했습니다. 사실 배기사가 원하는 체불 임금은 조태오 입장에서는 한끼 식사값도 되지 않습니다. 그냥 지갑에서 수표 몇장을 꺼내 배기사의 손에 쥐어주기만하면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조태오는 그러기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천민 주제에 감히 자신의 앞에 선 배기사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 류승완 감독은 배기사의 어린 아들을 등장시킵니다. 어린 아들 앞에서 무참한 폭력을 당해야 하는 배기사의 모습은 영화를 보고 있는 모든 부모 관객들이 분노를 느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한참 동안 이어진 폭력 장면, 그리고 피로 얼룩진 배기사의 얼굴과 두려움에 떠는 배기사 아들의 울음소리.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배기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사실을... 돈이 곧 신분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트럭 운전수인 배기사와 재벌 3세인 조태오의 싸움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판가름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배기사의 억울함을 속시원하게 풀어줄 영웅의 등장입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서도철이 합니다. 서도철은 물불 가리지 않고 조태오에게 들이댑니다. 서도철의 오른팔 최상무(유해진)는 서도철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합니다. 돈으로 회유를 하기도 하고, 경찰 고위 간부를 이용해서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대판 홍길동인 서도철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단지 억울한 배기사를 위해...

 

 

이 영화가 판타지인 이유

 

홍길동은 조선시대 실존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홍길동은 연산군 시절인 1500년을 전후하여 서울 근처에서 활약하던 농민무장대의 지도자입니다. 양반 지주층을 중심으로 토지소유가 확대되면서 토지를 잃고 양반의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자기가 살던 곳에서 도망쳐 스스로 도적이 되었습니다. 홍길동은 그러한 농민무장대를 이끌고 여러 고을의 관청들을 습격했지만 결국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취조를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홍길동이 유명해진 것은 허균이 지은 한글소설 <홍길동전> 덕분입니다.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재상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서얼 출신인 탓에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결국 뛰어난 무술을 이용해 도둑 조직인 '활빈당'의 두령이 되어 탐관오리를 무찌르고 빈민을 구제하다가, 율도국이라는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허균은 홍길동이라는 실존인물을 토대로 뛰어난 무공을 지닌 판타지 캐릭터를 만들어내어 해피엔딩을 완성한 것입니다. 

[베테랑]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도철이 만약 실존 인물이라면 정말 재벌 3세인 조태오를 영화에서처럼 속시원하게 무찌를 수 있었을까요? 슬프게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영화에서의 서도철은 거의 무적의 사나이입니다. 수명의 조폭들을 혼자 쓰러 뜨리고, 전소장(정만식)이 청부한 킬러들도 쉽게 이깁니다. 영화의 마지막 조태오와의 1대1 대결에서는 안쓰러울 정도로 두들겨 맞지만, 얼굴에는 오히려 미소가 감돕니다.

 

현실의 홍길동은 그저 평범한 농민출신의 무장대 지도자였고, 결국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취조당한 후 처형당했습니다. 하지만 허균의 소설 속 홍길동은 무술에 능통한 영웅이며, 결국 율도국이라는 이상사회를 건설해냅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과 소설의 차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보다 소설 속의 이야기에 열광합니다. 그렇게라도 대리만족을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베테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에서 재벌 총수는 어떤 악독한 짓을 저질러도 솜방망이 처벌만 받습니다. 여론을 의식해서 실형을 선고받았다고 해도 여론이 잠잠해지면 특별사면되어 멀쩡히 회사로 복귀합니다. 그리고는 경제발전을 위한 조치였다고 변명합니다. 결국 대한민국 헌법 11조에 명시된 평등은 경제발전이라는 허울좋은 돈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셈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만큼은 그러한 불평등한 답답함을 속시원하게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조태오의 돈 앞에서도 위풍당당한 서도철은 결국 정의를 이뤄냅니다. 처음엔 서도철을 말리던 오팀장(오달수)을 비롯한 광역수사대 팀원들은 서도철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한 조태오는 스스로 자멸합니다. [베테랑]을 보며 속시원했다고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본주의 사회의 신분제에서 하층민에 불과한 서민이며, 영화 속 서도철의 활약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판타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홍길동전>을 읽으며 대리만족을 했듯, 우리 역시 [베테랑]을 보며 대리만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이다.

 

[베테랑]은 이렇게 현대판 <홍길동전>이라고해도 무방할 정도로 자본주의 사회의 신분제에 도전장을 내민 영웅 서도철의 활약을 속시원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베테랑]이 가지고 있는 영화적 재미의 대부분은 바로 이런 액션 쾌감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재미 요소를 한가지만 더 꼽으라면 저는 배우들의 연기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사실 황정민의 연기는 뭐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파 배이며, [부당거래], [신세계], [남자가 사랑할 때] 등으로 서도철과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한 적도 있습니다. 서도철과 찰떡 호흡을 보여준 오팀장 역의 오달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인터넷 기사를 보니 천만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 열한편 중에서 오달수가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만 무려 다섯편(국제시장, 도둑들, 괴물, 7번방의 선물, 변호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올여름 천만관객 동원이 확실시되고 있는 [암살]에서도 오달수는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을 보좌하는 영감으로 출연했으니, 이쯤되면 천만 요정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황정민과 오달수의 연기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그렇게 완벽한 연기를 해왔으니까요. 이러한 황정민과 오달수 외에 제 눈에 확 띈 배우가 있으니 바로 장윤주입니다. 사실 그녀는 배우라기 보다는 모델입니다. 연기는 [베테랑]이 처음이지만, 광역수사대의 홍일점 미스봉 연기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습니다. 특히 미모를 포기한 촌스러운 메이크업과 패션은 [베테랑]에서 그녀가 모델 장윤주가 아닌 강력계 형사 미스봉으로 완벽 변신했음을 보여줬습니다.

 

황정민과 오달수는 항상 그랬듯 예상 가능한 명연기를 보여줬고, 장윤주는 톱모델의 연기변신이라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주는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배우준 배우도 있습니다. 바로 데뷔 후 첫 악역에 도전한 유아인과 유해진입니다. [완득이], [깡철이], [우아한 거짓말]에서 밉지않은 반항아를 연기했던 그는 [베테랑]에서는 정말 한대 때려주고 싶은 미운 반항아가 됩니다. 자신이 가진 이미지를 살짝 비튼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제 눈을 사로 잡은 연기 변신은 유해진입니다. 유해진은 코믹 조연 연기의 대가입니다. 그런 그가 조태오의 오른팔인 최상무가 되어 얄미움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최상무는 악역이라기 보다는 신분상승을 꿈꾸는 서민에 불과합니다. 조태오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자신도 조태오와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 그렇기에 신기루와도 같은 희망에 올인하는 최상무의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기까지 했습니다.

[베테랑]은 정말 잘 만들어진 오락영화입니다. 여러편의 액션영화를 연출했던 류승완 감독은 관객에게 액션 쾌감을 선사하는 방법을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의 노하우가 [베테랑]에 잘 녹아있습니다. 저 역시 요즘 한여름밤 열대야로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는데, [베테랑]을 봤던 수요일 밤은 시원함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하층민인가 봅니다.

 

어쩌면 완전한 평등이라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한다.

언젠가는 모든 인간이 평등한 날이 올이라는 믿음.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이 수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신분제를 철폐시켰듯이...

우리 역시 평등한 대한민국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