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크리스 콜럼버스
주연 : 아담 샌들러, 케빈 제임스, 미셸 모나한, 피터 딘클리지, 조시 게드
개봉 : 2015년 7월 16일
관람 : 2015년 7월 18일
등급 : 12세 관람가
흔치 않은 경험
지난 토요일, 회사 직원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주말에 이런 경조사가 있으면 금쪽같이 소중한 주말 하루가 허무하게 지나가 버립니다. 하지만 저는 제 주말을 그렇게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제 계획은 이러합니다. 웅이와 함께 결혼식에 참가한 후, [픽셀]을 보고, 대형서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일단 결혼식 시간은 12시. 결혼식장과 가까운 극장에서 [픽셀]이 상영하는 시간을 찾아보니 12시 45분이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빠듯했지만 그래도 서둘러 연회장에서 점심을 먹고 나온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이 계획에 의하면 저와 웅이는 기대작인 [픽셀]을 함께 볼 수 있고, 구피는 저와 웅이가 외출한 사이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실컷 수다를 떨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입니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습니다. 원래 뷔페에 가면 최소 다섯접시는 먹어야 배가 불렀지만 그날은 영화 시간 때문에 두접시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극장에 도착하니 12시 40분. 여유롭게 이미 예매한 예매번호로 영화표를 출력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그 순간부터 일어났습니다.
저는 분명 [픽셀]을 예매했습니다. 제 스마트폰의 극장 어플에도 제가 [픽셀]을 예매한 내역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매번호로 출력한 영화표는 [픽셀]이 아닌 [연평해전]이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극장 직원에게 "난 [연평해전]이 아닌 [픽셀]을 예매했다"고 항의했고, 결국 극장 매니저까지 출동한 후, [픽셀]을 보기 위해 상영관에 입장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영화는 시작한 이후였습니다. 제 잘못이 아닌, 극장 시스템 오류로 기대했던 영화의 앞 부분을 보지 못했으니 굉장히 억울하고 화가 나더군요.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내며 주말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애써 저는 냉정을 되찾고 [픽셀]에 집중했습니다. 비록 제 옆 관객이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을 왔다 갔다하고, 팝콘과 음료수를 소리내서 '후루루 짭짭'거렸지만 저는 마음 속으로 "주말을 즐겁게 보내자."라는 주문을 외웠습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픽셀]을 본 후, 원망섞인 표정으로 영화 내내 저를 괴롭혔던 제 옆의 관객을 쳐다봤습니다. 알고보니 그는 혼자 영화를 보러온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순간 그를 마음 속으로 욕했던 것이 미안해졌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서 웅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말 흔치 않는 경험이었어요." 맞습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화가 나는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두번 다시는 경험하기 힘든 흔치 않은 특별한 경험을 한 셈입니다.
외계인이 고전 아케이드 게임으로 지구를 침공한 흔치 않은 사건
모든 것은 이렇게 생각하기에 따라 다릅니다. 난 분명 [픽셀]을 예매했는데 [연평해전]의 티켓이 출력되어 나오고, 옆에서 시끄럽게 영화를 보던 예의없던 관객이 알고 보니 혼자 영화를 보러온 해맑은 다운증후군 청년이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제가 수천번 극장에서 영화를 봤지만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흔치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날 웅이와 저는 극장 근처 대형서점에서 웅이가 여름방학동안 읽을 <삼국지>도 사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군것질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저와 웅이는 다시는 경험하기 힘든 [픽셀]을 봤을 때의 일들을 평생 추억으로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먼훗날 이렇게 추억할 수 있는 사건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그날은 짜증이 나는 날이 아닌, 웅이와 함께 흔치 않은 경험을 했던 소중한 날로 기억되겠죠.
어쩌면 그것은 [픽셀]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픽셀]은 외계인의 지구 침공을 담은 SF영화입니다. 사실 외계인의 지구 침공은 더이상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소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픽셀]이 특별할 수 있었던 것은 외계인의 지구 침공이 고전 아케이드 게임의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특별한 침공 덕분에 샘(아담 샌들러)과 에디(피터 딘클리지), 러드로우(조시 게드)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만약 외계인이 다른 SF영화와 같은 고전적인 방법으로 지구를 침공했다면 샘과 에디, 러드로우는 그저 도망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악몽과 같은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외계인이 고전 아케이드 게임 형식으로 지구를 침공한 덕분(?)에 그들은 지구를 지킨 영웅이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픽셀]의 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픽셀]의 주인공인 샘과 에디, 러드로우는 그다지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샘은 어린시절 아케이드 게임의 패턴을 단번에 분석하는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의 그는 게임 설치 기사일 뿐입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에 비한다면 샘은 나은 편입니다. 에디는 사기 혐의로 감옥에서 복역중이고, 러드로우는 게임 캐릭터와 사랑에 빠져 정상적인 사회 활동을 하지 못하며 피해망상증에 빠져 사는 전형적인 루저입니다.
하지만 외계인이 고전 아케이드 게임으로 지구를 침공한 덕분에 그들은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 됩니다. 샘은 어린시절의 실력을 다시한번 발휘할 수 있게 되었고, 에디는 감옥에서 임시 출소하여 그토록 소원했던 세레나 윌리엄스, 마사 스튜어트(독특한 취향임)와 데이트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러드로우는 게임 캐릭터인 레이디 리사와 진짜 사랑에 빠질 수 있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어쩌면 외계인의 지구침공을 감사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이 영화의 분위기가 신날 수 밖에 없는 이유
사정이 이러하니 [픽셀]의 분위기는 SF보다는 코미디에 맞춰져 있습니다. 외계인의 지구침공을 소재로한 대부분의 SF영화들이 비장한 재난 영화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면 [픽셀]은 외계인의 지구침공을 통해 한바탕 웃고 즐기며 오래전 친구들과 함께 고전 아케이드 게임을 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렇기에 [픽셀]을 일반적인 SF영화로 기대하고 관람한다면 유치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픽셀]의 이런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외계인의 지구침공으로 사람들이 죽는다면 당연히 이 영화의 유쾌한 분위기가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픽셀]은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배려합니다. 처음 외계인이 인도를 침공했을 때 납치되었던 인도 청년이 영화의 후반부에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오는 것처럼, [픽셀]은 외계인의 지구침공에도 불구하고 희생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팩맨에게 한쪽 팔을 잃었던 일본인 팩맨 개발자의 팔조차도 영화 마지막 부분에선 재생될 정도입니다.
그저 이 영화는 심각함 따위는 잊고 신나게 오락 한판 하자고 관객을 부추깁니다. 어린 시절 문방구 앞에 있던 작은 전자 오락기에 웅크리고 앉아 십원짜리 동전을 넣어가며 열심히 오락을 했던 그때 그 시절처럼, 어른이 된 이후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분을 느끼며 [픽셀]을 관람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픽셀]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은 신나게 오락 한판하는 분위기의 [픽셀]에 드라마적 요소도 넣어 놓았습니다. 샘의 오랜 친구인 윌(케빈 제임스)이 미국 대통령이라는 설정은 신의 한수입니다. 그 덕분에 샘과 같은 평범한 시민이 외계인의 지구침공에 맞서 싸운다는 설정을 무리없이 진행시켜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샘과 바이올렛(미셸 모나한)의 관계로 흥미로웠습니다. 샘과 바이올렛은 처음부터 티격태격하며 로맨틱 코미디의 분위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픽셀]이 그저 고전 아케이드 게임 형식으로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에 맞서 루저인 주인공들이 영웅이 되는 이야기만 진행해 나갔다면 1시간 45분이라는 영화의 러닝타임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홀로 집에], [미세스 다웃파이어]등의 영화에서 코미디와 드라마 요소를 잘 융화시켰던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은 드라마적 요소를 통해 영화에 지루함을 느낄 틈을 주지 않습니다.
물론 아쉬움도 있습니다. 루저가 외계인 침공에 맞서 영웅이 되는 것을 지켜보며 배알이 꼴려하던 미국의 고위 장군이 영화 후반부에 어떤 역할을 할줄 알았는데 그냥 흐지부지 마무리되었고, 샘과 바이올렛의 로맨스도 조금만 더 강화되었으면 좋았을뻔 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픽셀]의 드라마적 요소는 영화를 즐기는데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어린시절 오락실에서 살다시피 했던 성인이라면 추천
사실 저는 오락을 그다지 잘 하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친구들이 오락을 하면 그 옆에서 경의에 찬 눈빛으로 구경할 뿐입니다. 막상 제가 오락기에 앉으면 몇분을 버티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픽셀]에 대한 재미가 조금은 반감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 속에 나오는 고전 아케이드 게임인 갤러그, 지네게임, 팩맨, 동키콩 중에서 제가 그마나 조금 했던 것은 갤러그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아쉽게도 외계인이 갤러그로 인도를 공격하는 장면은 그다지 길지 않았습니다.
만약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한때 오락실을 주름잡았던 사람들이 [픽셀]을 본다면 어쩌면 저보다는 더 재미있게 영화 속에 빠져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픽셀]은 바로 그러한 성인들을 위한 영화입니다. 비록 지금은 직장생활에 지친 중년의 성인이지만, 한때는 오락실의 터줏대감으로 친구들의 부러움을 몰고 다녔던 그들. [픽셀]은 그들을 위한 유쾌한 SF 판타지인 셈입니다.
물론 어린 관객들도 [픽셀]을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인 웅이는 [픽셀]을 재미있게 관람하며 "나도 팩맨을 해봤는데..."라며 신기해하더군요. 고전은 시간이 지나도 명성을 잃지 않는 것이니까요. [픽셀]을 본 후 웅이는 영화 속의 고전 아케이드 게임을 함께 해보자고 졸랐습니다. 이렇게 웅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무엇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제게 [픽셀]은 충분히 의미있는 영화였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어린시절의 추억이 떠오르게 하는 영화가 좋다.
추억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니
기억 속 깊은 곳의 추억을 끄집어내는 영화에는 언제나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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