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앨런 테일러
주연 : 아놀드 슈왈제네거, 제이슨 클락, 에밀리아 클라크, 제이 코트니
개봉 : 2015년 7월 2일
관람 : 2015년 7월 4일
등급 : 15세 관람가
전설은 이미 끝났다.
아주 옛날 옛적에 [터미네이터]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1984년 영화이니 지금으로부터 무려 31년 전의 영화입니다. 처음 이 영화의 시작은 그저 평범한 B급 SF 액션영화였습니다. [피라나 2]를 연출했던 B급 전문감독 제임스 카메론이 메가폰을 잡았고, 유명 바디빌더로 [뉴욕의 헤라클레스], [코난 : 바바리안] 등의 영화를 통해 배우로 변신했지만 연기력만큼은 극악이었던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모두들 비디오용 영화라고 생각했던 [터미네이터]는 그러나 6백만 달러라는 초저예산으로 북미에서만 3천8백만 달러, 월드와이드 7천8백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흥행 수입을 올렸습니다. 이후 할리우드는 [터미네이터]의 흥행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1991년 당시 제작비로는 파격적인 금액인 1억2백만 달러를 투자해서 [터미네이터 2]를 만들어냈습니다. [터미네이터 2]는 북미에서만 2억4백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월드와이드 흥행성적은 5억1천9백만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당연히 1991년 최고의 흥행작의 명예는 [터미네이터 2]에게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전설의 시작입니다. 이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트루 라이즈]를 거쳐 [타이타닉], [아바타]로 할리우드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등극했고,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코만도]를 거쳐 [프레데터], [트윈스], [토탈리콜]을 통해 실베스타 스탤론과 더불어 80, 90년대를 대표하는 미국 액션영화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세월은 흘렀습니다. '터미네이터'의 전설은 제임스 카메론과 아놀드 슈왈제네거라는 할리우드의 영웅을 탄생시키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가 벌어다준 돈의 맛을 잊지 못한 할리우드 제작사는 '터미네이터'의 전설이 끝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터미네이터'의 전설을 되살려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2003년에 만들어진 조나단 모스토우 감독의 [터미네이터 3 : 라이즈 오브 더 머신]과 2009년에 만들어진 맥지 감독의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이 두 영화는 할리우드가 기대한만큼의 흥행성적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아니 2억달러가 넘는 순수제작비를 감안한다면 오히려 흥행실패작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입니다. 게다가 시리즈가 계속되면서 흥행성적도 하락하는 추세여서 관객들은 더이상 '터미네이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어쩌면 바로 이 시점에서 끝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할리우드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토르 : 다크 월드]로 좋은 흥행을 이끌어냈던 앨런 테일러 감독을 새롭게 영입하여 '터미네이터'의 다섯번째 영화인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북미 개봉 첫주 3위에 불과했고, 흥행성적도 2천7백만 달러로 3, 4편보다 부진한 출발을 보이고 있습니다. 북미에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흥행실패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입니다.
'터미네이터'의 전설을 살리기 위한 할리우드의 눈물겨운 노력
사실 '터미네이터'를 되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3편 연출 제의를 거절하며 밝혔듯이 '터미네이터'는 애초에 2부작으로 기획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젠 너무 거물이 되어버린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마음을 되돌리지는 못했지만 '터미네이터'의 영웅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이용하여 '터미네이터'를 되살리려 했습니다.
그 결과 [터미네이터 3 : 라이즈 오브 더 머신]은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원맨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에서는 아놀드 슈왈제네거조차 앞으로 내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정치인으로 또다른 변신을 시도했고, 2003년 공화당 후보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된 이후 2006년에는 재선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카메론도, 아놀드 슈왈제네거도 없는 '터미네이터'라니...
아놀드 슈왈제네거조차 이용할 수 없었던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의 선택은 새로운 영웅입니다. 그 결과 [배트맨 비긴스]를 통해 수렁에 빠진 '배트맨'을 건져냈던 크리스찬 베일이 새로운 존 코너로 선택되었고, 당시 제임스 카메론의 신작 [아바타]에 캐스팅되어 할리우드의 신성으로 떠오른 샘 워싱턴을 히든카드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은 흥행실패라는 결과만 떠안았습니다.
자! 이쯤에서 우리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터미네이터'를 되살리기 위해 이번엔 어떤 전략을 가져 왔는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를 보기 위해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극장으로 향하며 저는 이 질문을 끊임없이 마음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과연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3, 4편의 실패를 토대로 어떤 새로운 전략을 내세웠을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는 그 어떤 새로운 전략 따위도 없습니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이미 끝난 전설을 살려내려는 시도에 앞서 준비한 것이라고는 정치에 대한 도전을 끝내고 영화계로 복귀한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또다시 불러들이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터미네이터 3 : 라이즈 오브 더 머신]이 이미 시도했던 전략을 고스란히 따라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조금이라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사라 코너 역에 가녀린 이미지의 에밀리아 클라크를 캐스팅했습니다. 그녀는 미드 <왕좌의 게임>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지만 영화계에선 아직 풋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의 걸출한 존 코너, 크리스찬 베일을 포기하고 제이슨 클락이라는 조금은 낯선 배우를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카일 리스를 연기한 제이 코트니 역시 스타급 배우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돋보이게 하는 것만으로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터미네이터'의 전설을 되살릴 수 있을까요?
전설을 잇는 오리지널 지위 확보의 부작용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은 시작부터 [터미네이터]와의 연결을 시도함으로써 [터미네이터 제니시스]가 [터미네이터]와 [터미네이터 2]를 잇는 오리지널임을 과시합니다. 존 코너가 이끄는 인간저항군과 스카이넷의 미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2029년. 스카이넷은 존 코너의 출생 자체를 막기 위해 1984년 과거로 사라 코너를 죽이기 위한 로봇을 보내고, 존 코너 역시 사라 코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오른팔인 카일 리스를 과거로 보냅니다.
[터미네이터]는 미래에서온 킬러 로봇 '터미네이터'(아놀드 슈왈제네거)에게 쫓기는 사라 코너와 카일 리스(마이클 빈)의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카일 리스가 과거로 가기 전, 존 코너가 스카이넷의 공격을 받아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터미네이터]와는 다른 1984년이 펼쳐질 것이라 예고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가 [터미네이터]의 리메이크가 아닌 이상 [터미네이터]과 같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짧게 오리지널임을 과시하기만 하고는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듭니다. 그런데 그것부터가 문제입니다. 전설이된 두 영화, [터미네이터]와 [터미네이터 2]와 연결시킴으로써 [터미네이터 3]의 지위를 확보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로인하여 이야기가 복잡하게 꼬여버렸습니다.
시간여행 소재의 영화는 치밀하게 스토리 라인을 구성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복잡하게 꼬여버리기 일쑤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의 연속성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백 투 더 퓨쳐 3부작]입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과거의 무엇 하나가 변경되면 그것은 현재와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백 투 더 퓨쳐 3부작]은 그러한 시간의 연속성을 이용한 SF 코미디 영화입니다.
그렇다면 [터미네이터]는? 이 영화 역시 시간여행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터미네이터]는 시간의 연속성에 의해 완벽하게 맞춰진 영화이고, [터미네이터 2]는 시간의 연속성을 깨버림으로써 '심판의 날'을 막는 것으로 영화를 끝냅니다. 그렇기에 '터미네이터' T-800은 "I WILL BE BACK"이라는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를 남겼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심판의 날'이 없다는 것은 기계와 인간의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고, 기계와 인간의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존 코너는 카일 리스를 1984년으로 보낼 이유가 없으며, 카일 리스가 1984년으로 오지 않는다면 존 코너는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느니 시리즈를 끝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을 제임스 카메론 감독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카일 리스가 1984년으로 가기 전, 존 코너가 스카이넷에게 공격을 받게 만듬으로써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시간의 연속성을 해결하지 못한채 때리고 부수기만한다.
사라 코너는 이미 어린 시절 로봇의 공격을 받아 부모를 잃었고, T-800의 보호 아래 카일 리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액체금속 로봇인 T-1000(이병헌)의 공격도 미리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과거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미래 또한 바뀌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기에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심판의 날'은 1997년이 아닌, 2017년으로 변경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입니다.
1984년은 물론 사라 코너가 훨씬 어렸던 과거부터 송두리째 바뀌었는데 미래는 '심판의 날'이 1997년에서 2017년으로 변경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카일 리스는 여전히 사라 코너를 보호하기 위해 2029년에서 1984년으로 왔고, '제니시스'를 파괴한 후에는 어린 자기 자신을 찾아가 "제니시스가 스카이넷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제니시스'가 파괴되었는데 그러한 기억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제니시스가 스카이넷이다."라는 카일 리스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유효하려면 2017년 '심판의 날'은 예정대로 벌어져야만 합니다.
참 어렵죠? 시간여행을 소재로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일직선상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 중에서 과거의 작은 부분 하나만 바꿔도 고려해야할 부분이 굉장히 많아 집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그러한 부분들을 모두 '아몰랑'하며 넘겨버립니다.
뭐 좋습니다. 시간의 연속성을 지키며 '터미네이터'의 전설을 이어나가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터미네이터 2]조차도 그러한 시간의 연속성을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 외에도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실망스러운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뜬금없이 존 코너를 '나노 터미네이터' T-3000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대표적입니다.
더이상 '액체 터미네이터' T-1000를 넘어설 수 있는 '터미네이터'를 만들어 낼 수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존 코너마저 '터미네이터'로 몰락시킨 것도 어이가 없지만, 인간도 기계도 아닌 존 코너의 정체성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뿐더러, 나노 터미네이터로 몰락한 존 코너의 모습은 사라 코너와 카일 리스와의 관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기에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 '제니시스'를 파괴하기 위해 잠입한 건물에 사람이 거의 없다는 설정도 코미디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를 재미있게 관람하는 방법은 분명 존재합니다. 영원한 '터미네이터'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활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입니다. 그리고 추억의 '터미네이터' T-1000을 연기한 이병헌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 즐거웠습니다. (어떤 분들은 오히려 불편하셨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아놀드 슈왈제네거만 돌아온 어설픈 전설의 귀환에는 박수를 보낼 수가 없네요. 전설은 전설로 남겨두던가... 아니면 용기를 내서 차라리 처음부터 리부트를 하던가, 이제 할리우드도 미련을 버리고 선택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나는 내 어릴적 추억이 담긴 '터미네이터'를 사랑한다.
하지만 이렇게 어설프게 돌아오는 것에는 반대한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인만큼 좀 더 완벽하게 돌아오던가,
아니면 전설로 그냥 남겨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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