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5년 영화이야기

[살인의뢰] - 메시지를 위해 스릴러적 재미를 포기하다.

쭈니-1 2015. 3. 19. 10:26

 

 

감독 : 손용호

주연 : 김상경, 김성균, 박성웅

개봉 : 2015년 3월 12일

관람 : 2015년 3월 18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볼 수도, 안볼 수도 없었다.

 

지난 주는 예상 외로 극장에서 영화를 많이 볼 수 있었던 행복한 한주였습니다. 월요일 [순수의 시대]를 시작으로, 수요일에는 [버드맨]을 보았으며, 목요일에는 [채피]를, 그리고 금요일에는 [소셜포비아]와 [위플래쉬]를 연달아 보기도 했습니다. 무려 다섯 편의 영화를 지난 한주동안 봤으니 더이상 보고 싶은 영화가 없을 법도 한데, 영화에 대한 제 욕심은 한도 끝도 없네요.

영화로 보낸 폭풍같은 한주가 지나고 맞이한 월요일. 그런데 지난 주말의 국내 박스오피스 순위를 보던 저는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처음부터 극장에서 보지 않으려고 마음 먹었던 [살인의뢰]가 11주차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평은 최악의 수준이더군요. 그러한 상황들로 인하여 저는 [살인의뢰]를 볼 수도,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주말 박스오피스 1위 영화인데 기본적인 재미는 갖추고 있겠지.'라는 심정으로 화요일 밤 [살인의뢰]를 예매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러 가기 전인 화요일 저녁, 쇼파에서 구피와 앉아 TV를 보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어지러움과 숨막힘이 저를 급습했습니다. 침대에서 잠시 누워 어지럼증과 숨막힘을 쫓아냈더니 이번엔 복통이... 구피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제게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으라고 충고합니다. 그래서 [살인의뢰]의 예매를 취소하고 화요일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살인의뢰]는 역시 저와 인연이 닿지 않는 영화인가 보다라고 포기할 때쯤, 또다시 영화를 볼 수 있는 황금 시간이 제게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살인의뢰] 대신 [헬머니]나 [드래곤 블레이드]를 볼까 잠시 고민도 했지만, 역시 박스오피스 1위 영화를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평일의 텅빈 극장에서 [살인의뢰]를 보고 왔습니다.

사실 [살인의뢰]를 보러 가기 전, 이 영화에 대한 전문가와 관객의 리뷰를 꼼꼼히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스릴러 영화적인 짜임새가 부족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스릴러 영화에서 스릴러 영화적인 짜임새가 부족하다는 것은 [살인의뢰]가 장르 영화로써는 불합격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직접 [살인의뢰]를 저 역시 [살인의뢰]에게 스릴러라는 장르 영화로써의 볼거리에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스릴러 영화는 기본적으로 관객과 영화간의 두뇌싸움을 장르적 재미로 삼는 장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범인은 누구일까?', '범행동기는 무엇이며,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을까?', '범인을 어떻게 잡을까?' 등 영화 상영내내 관객 스스로 진실을 쫓으며 영화적 재미는 느끼는 것이죠. 그렇기에 잘 만든 스릴러 영화는 대개 마지막 반전의 묘미가 살아있습니다. 관객 입장에서 열심히 진실을 쫓았지만, 마지막 반전에 뒷통수를 맞았을 때의 쾌감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입니다.

 

 

스릴러 장르의 재미를 포기하고 이 영화가 지향한 것.

 

그런데 [살인의뢰]는 그러한 정통적인 스릴러 영화의 재미를 처음부터 포기합니다. 이 영화는 연쇄살인마 조강천(박성웅)의 범행으로 시작합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범인의 얼굴을 보여줬으니 '범인은 누구일까?'라는 가장 일반적인 두뇌싸움은 포기한 셈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강천은 영화 초반에 베테랑 형사 민태수(김상경)에게 우연히 검거됩니다.  '범인을 어떻게 잡을까?'도 포기해버립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강천의 범행 동기, 범행 방법으로 수수께끼를 제시하는 영화는 더더욱 아닙니다. 결국 남은 것은 '강천의 범행에 의한 여성 피해자의 시체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부분인데, [살인의뢰]는 그것조차도 3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버리며 마무리해버립니다. 이렇듯 [살인의뢰]는 영화 초반부터 스릴러 영화의 재미를 거의 대부분 포기해버립니다.

그렇다면 [살인의뢰]는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스릴러 영화로써의 색다른 재미를 제시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오랫동안 사형집행이 정지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강천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감옥에서 잘 먹고 잘 삽니다. 그런데 누군가 감옥에 있는 강천을 노립니다. 이 부분에서 [살인의뢰]는 드디어 관객과 두뇌싸움을 벌이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 역시 치밀하지는 못합니다. 누가 강천을 노리는지, 어떻게 노리는지는 영화에 조금만 집중하면서 본다면 손쉽게 알아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스릴러 영화인 [살인의뢰]가 스스로 스릴러의 장르적 재미를 걷어찬 이유는 무엇일까요? 감독의 능력이 부족해서? 시나리오가 부실해서? 아닙니다. 이유는 이 영화의 목표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의뢰]의 목표는 '우리나라의 사형제도는 이대로 좋은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는 것입니다.

사형제도는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무거운 형벌입니다. 죄의 댓가로 목숨을 빼앗는 것이니 어찌보면 합법적인 살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형제도는 끊임없는 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사형제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기형적이라는데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헌법상 분명 사형제도가 존재하는 국가이지만 1997년 12월 30일에 23명의 사형을 집행한 것을 마지막으로 17년동안 사형집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 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했어도 그것을 집행하지 않으니 사형제도가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살인의뢰]는 바로 그러한 우리나라의 사형제도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인의뢰]의 질문방식은 양쪽 의견에 중립을 지키며 관객에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아닌, 한쪽 의견에 치우쳐 있습니다. 마치 영화를 통해 '강천과 같은 잔인한 범죄자를 살려 두는 것은 피해자를 괴롭히는 것이니 다시 사형을 집행하자.'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불쌍한 피해자, 극악무도한 범죄자

 

그러한 [살인의뢰]의 의도는 캐릭터에 대한 표현만 봐도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우선 피해자인 수경(윤승아)부터 살펴보죠. 손용호 감독은 최대한 수경을 사랑스럽고 귀엽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이제 막 자신의 임신사실까지 알게된 예비 엄마입니다. 그러한 수경의 캐릭터는 제 보호본능을 자극시킵니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우며, 임신까지한 수경을 잔인하게 살해한 강천은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최악의 캐릭터입니다. 살인을 통해 쾌감을 느끼는 것을 보면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싸이코패스는 아닌 듯합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간적 양심조차 찾을 수 없는 극악무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인의뢰]는 의도적으로 강천의 캐릭터 설명을 생략합니다. 그럼으로써 강천의 캐릭터는 그저 이유없이 살인하는 살인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극과 극인 수경과 강천의 캐릭터를 통해 처음부터 저로 하여금 강천을 미치도록 죽이고 싶게끔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에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강천에게 복수를 하려는 수경의 남편 이승현(김성균)을 저는 응원하게 됩니다. 비록 승현은 강천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지만, 그가 죽인 대상은 사회의 악인 조폭 두목이기에 제게 면죄부를 부여받습니다. 이렇게 면죄부까지 부여받은 승현은 본격적으로 강천과의 1대1 대결을 준비합니다.

 

문제는 태수입니다. 수경의 오빠인 태수 또한 강천의 범죄에 의한 피해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경찰입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대한민국의 법을 수호해야하는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범죄자 강천과 사랑하는 부인을 잃은 불쌍한 피해자 승현. 그 사이에서 태수는 중심을 잡아야 하지만 그 역시 피해자 입장이라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영화의 초반, 태수는 강천의 사건에 대해 시큰둥한 자세를 취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강천에 의한 피해자가 되자 태도를 180도로 바꿉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모두들 잔인한 범죄 뉴스를 보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라고 분노하지만 곧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피해자와 가족들은 평생 그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태수가 경찰이라는 자신의 공적인 신분과 강천을 향한 사적 복수 사이에서 갈등하는 부분은 공감이 갔습니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 태수의 갈등은 결국 '나, 살고 싶다.'라는 고백과 함께 무너집니다. 그러면서 [살인의뢰]는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피해자를 위해서라도 사형 집행이 부활해야 합니다.'라고 관객에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살인의뢰]의 메시지가 너무 직설적이라 당황했습니다. 사형제도라는 논란이 많은 문제를 두고 너무 직설적으로 사형제도를 찬성하고 있는 [살인의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강천이라는 너무 극단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냄으로써 저를 자기네 편으로 끌어모은 것입니다. 영화가 여론을 형성하는데 유용한 도구임을 감안한다면 [살인의뢰]는 사형 집행 부활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릴러 영화적 재미도 조금 감안했더라면...

 

이렇게 영화가 사회적 논란이 있는 문제에 이용되는 것은 사실 흔한 일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2004년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통해 안락사 허용을 호소했습니다. 이 영화는 미국내 보수단체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지만, 미국 아카데미 위원회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게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몰아주며 노장 감독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형 제도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보고 싶다면 송해성 감독의 2006년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추천합니다. 이 영화는 [살인의뢰]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사형 제도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살인의뢰]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서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잘생긴 훈남 배우 강동원이 불우한 환경 탓에 잔인한 살인범이된 정윤수를 연기했습니다. 결국 윤수의 사형 집행으로 끝을 맺은 이 영화는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형집행보다는 범죄자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관객에게 호소합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살인의뢰]와 가장 닮은 영화는 2013년 개봉작 [몽타주]입니다. 이 영화는 공소시효라는 또다른 사회적 논란에 목소리를 낸 영화입니다. 공소시효는 어떤 범죄에 대하여 일정 기간이 지나면 형벌권이 소멸되는 제도입니다. 말 그대로 공소시효가 지나면 그 어떤 범죄라도 법적인 처벌이 불가능해집니다. [몽타주]는 15년전 딸을 유괴범에게 잃은 하경(엄정화)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공소시효의 부조리함을 꼬집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살인의뢰]의 단점은 가장 비슷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 [몽타주]와 비교했을 때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몽타주]는 공소시효라는 사회적 논란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스릴러적 재미도 갖추고 있는 영화입니다. [몽타주]가 스릴러적 재미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영화의 편집에 의한 반칙에 가까웠지만 최소한 [몽타주]를 보며 저는 스릴러 영화의 묘미를 만끽할 수가 있었습니다.

[몽타주]가 훌륭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몽타주]는 15년전 하경의 사건과 15년후 한철(송영창)의 사건을 뒤섞으며, 15년전의 유괴범도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몽타주]의 유괴범인 [살인의뢰]의 강천처럼 도저히 인간같지 않은 비현실적인 괴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제3자인 경찰, 청호(김상경)을 내세워 객관적인 입장으로 공소시효라는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끔 했습니다.

[살인의뢰]는 비록 사형 집행 부활이라는 논란에 대해 직설적인 화법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지만, 이를 위해 스릴러적 재미를 포기했다는 점은 [몽타주]와 비교했을 때 아쉬울 수 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게다가 사회적 논란에 너무 과한 직설화법이 불편했다는 문제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강천의 캐릭터를 완성하여 관객에게 살인마의 사정을 보여주고, 관객 스스로 사형 제도에 대해 생각하고 선택하도록 했다면 좀 더 의미있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요? 제게 [살인의뢰]가 아쉬웠던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문제이든 양면성이 있다. 사형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형수가 강천과 같은 괴물이라면 나 역시 사형 집행을 찬성한다.

모든 사형수가 윤수처럼 개선의 여지가 있는 불우한 사람이라면 나는 사형 집행을 반대한다.

나는 어느 한쪽 단면만 보고 섣부르게 어떤 문제를 판단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