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스티븐 프리어스
주연 : 주디 덴치, 스티브 쿠건
개봉 : 2014년 4월 16일
관람 : 2015년 2월 5일
등급 : 12세 관람가
병원에서의 마지막 영화
사실 제 스마트폰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영화는 [러시안 소설], [경주], [무협] 그리고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까지해서 네편 뿐이었습니다. 구피의 병간호를 하면서 이 네편의 영화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계획했던 영화를 전부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룻밤의 시간이 더 남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한편의 영화를 더 선택해야 했습니다.
다음날이면 오전부터 퇴원수속을 해야 했기에 그날 제가 선택하는 영화가 병원에서의 마지막 영화가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심사숙고하며 고르고 또 고른 영화가 바로 [필로미나의 기적]입니다. [필로미나의 기적]은 2014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여우주연상 등 4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던 영화입니다.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는 만큼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한 선택이었던 셈입니다.
[필로미나의 기적]을 봄으로써 이제 2014년 아카데미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되었던 영화 중에서 아직 못본 영화는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네브래스카]만 남았고, 꼭 봐야할 영화는 [필로미나의 기적]의 주디 덴치를 제치고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블루 재스민] 뿐이네요.
놀랍게도 이 영화는 실화란다.
[필로미나의 기적]은 50년만에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나선 필로미나(주디 덴치)와 특종을 위해 그녀와 동행한 전직 BBC 기자 마틴(스티브 쿠건)의 감동스러운 여정을 담은 영화입니다. 그런데 필로미나의 사정이 기가 막힙니다. 저는 단순히 미국으로 어린 아들을 입양한 미혼모가 5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뒤늦게 아들을 찾기 위해 나선 영화일 것이라 예상했었습니다. 하지만 필로미나의 사연은 그보다 훨씬 기구합니다.
그녀는 미혼모라는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을 받았고, 수녀원에서 강제노역을 하며 고작 단 한시간의 어린 아들을 볼 수 있는 면회 시간만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라 수녀원에서는 필로미나의 어린 아들은 필로미나의 동의없이 미국으로 해외 입양을 시켰고, 관련 자료는 모조리 불태워 없애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실화라고 합니다. 실제 오랜 시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는 1921년 건국을 하게 되는데 건국 초기 자본이 부족하자 국고의 안정을 위해 미혼모의 아이들을 해외로 수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기 위해 관련 자료를 전부 불태워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2009년 필로미나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판되고 아일랜드 정부의 불법적인 행위가 논란이 되자 2013년 2월 엔다 켄리 총리가 공식 사과문을발표했다고 합니다.
가슴 절절한 감동 드라마는 아니다.
분명 [필로미나의 기적]은 영화의 소재만 놓고본다면 가슴 절절한 감동 드라마일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는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짜내는 영화가 아닌, 영화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강제로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가 50년이 지난 후에야 빼앗긴 아들을 찾기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이야기를 담은 [필로미나의 기적].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필로미나는 매우 덤덤해 보였습니다. 조금은 냉소적인 마틴과 못쓸 만행을 저지른 수녀원에 가면서도 줄곳 "수녀님의 잘못이 아니예요."라며 가해자들의 편에 섭니다. 50년만에 아들을 찾기 위해 미국에 도착한 후에도 필로미나는 주책바가지 할머니의 면모를 고스란히 과시합니다. 그렇기에 이 귀여운 무한긍정 할머니의 모습에 영화를 보는 저는 살짝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이죠.
[필로미나의 기적]이 관객의 감정선을 확실하게 건드리려면 50년전 필로미나가 당했던 수녀원에서의 일들이 좀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했고, 필로미나를 푸근한 우리 주변의 할머니가 아닌 비련의 여성으로 포장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필로미나의 기적]은 그러한 것들을 포기함으로써 영화가 바란 것은 관객의 눈물이 아니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필로미나가 원한 것은 분노가 아닌 용서였다.
영화의 후반, 50년 전의 만행에 대해서 반성의 기미는 없이 오히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힐더가드 수녀의 행태에 제3자에 불과한 마틴은 분노하며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필로미나는 그저 모든 슬픔을 속으로 삼켜버리며 힐더가드 수녀를 용서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이죠? 용서를 빌지 않는 힐더가드 수녀를 스스로 용서하는 필로미나의 모습에서 "나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거야."라고 말하던 마틴이 더욱 공감되었습니다. 하지만 평생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필로미나의 대답 또한 이해가 되었습니다.
며칠 전 보았던 [박물관이 살이있다 : 비밀의 무덤]에서 옥타비우스를 연기한 스티브 쿠건의 모습이 조금 낯설긴 했지만, [007 스카이폴]에서 M을 연기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력을 보여줬던 주디 덴치의 연기는 과연 소문 그대로 대단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나니 주디 덴치를 제치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가 더욱 보고 싶어졌답니다.
하지만 아무리 주디 덴치의 연기가 대단하다고해도 내가 만약 필로미나와 같은 상황을 당했다면 필로미나처럼 용서하지만은 못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저 멀리 사라져가던 필로미나의 마지막 대사가 더욱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백만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사랑이지." 비록 필로미나는 자신이 읽은 소설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제가 보기엔 필로미나의 위대한 용서에 대한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찬사처럼 들렸습니다. 백만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용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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