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테리 길리엄
주연 : 맷 데이먼, 헤쓰 레저, 레나 헤디, 모니카 벨루치
개봉 : 2005년 11월 17일
관람 : 2005년 11월 10일
등급 : 15세 이상
얼마전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실망했던 저는 이젠 더이상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유쾌한 영화적 재미를 안겨줄 감독이 이 세상에 사라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였었습니다. 그 방면에선 독보적인 존재였던 팀 버튼이 [빅 피쉬], [찰리와 초코릿 공장]을 통해 자꾸만 디즈니적인 스타일로 바뀌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디즈니적인 스타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한명쯤은 디즈니와 정반대적인 스타일로 관객을 웃기고 울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제게 팀 버튼의 변심은 아쉈다못해 가슴이 아프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팀 버튼은 [유령신부]를 통해 [크리스마스의 악몽]시절로 되돌아갈 희망을 보여줬으며, 팀 버튼보다는 인지도가 낮긴 하지만 그로테스크한 상상력만은 결코 팀 버튼보다 뒤지지 않는 테리 길리엄의 신작 [그림형제]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림형제]는 미국 개봉당시 [40살까지 못해본 남자]에 밀려 주간 박스오피스 1위조차 차지하지 못한채 평범한 흥행 성적을 올렸지만 [12 몽키스]이후 테리 길리엄의 두번째 블록버스터급 영화이기도 합니다.
테리 길리엄에 대한 추억을 잠시 더듬어보자면 평범한 할리우드 블럭버스터인줄 알고 별 기대없이 보기 시작했던 [12 몽키스]에 완전 반해서 폐업한 비디오 가게의 먼지더미속에 숨겨져있던 [12 몽키스] 비디오를 어렵사리 찾아내 아직까지 소중히 간직중이며, 2년전엔 [몬티 파이튼 시리즈]를 비롯하여, [여인의 음모], [바론의 대모험]등 테리 길리엄의 영화들만으로 몇날몇일을 탐독했던 적도 있습니다. 암튼 그러한 제게 [그림형제]의 개봉 소식은 가뭄뒤의 단비와도 같은 희소식이었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결국 어렵사리 시사회로 보게된 [그림형제]는 제 기대감을 완벽하게 채워준 그런 영화였습니다. 물론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이 투입된 영화인만큼 [몬티 파이튼 시리즈]와 같은 톡톡튀는 그런 맛은 없었지만, 오히려 [12 몽키스]와 같이 테리 길리엄의 독특한 작품 세계와 할리우드의 대중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제 입맛에 딱맞는 그런 영화가 되었습니다.
[그림형제]에서 제가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그림동화'로 잘알려진 그림형제라는 실제 인물과 동화, 그리고 판타지와 호러의 절묘한 만남이었습니다. [찰리와 초코릿 공장]이 팀 버튼과 동화의 만남에서 오히려 팀 버튼의 영화적 색깔이 상당 부분 퇴색되어 버렸다면, [그림형제]는 오히려 테리 길리엄의 스타일로인하여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읽었던 동화들이 어른들을 위한 그로테스크한 판타지로 변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테리 길리엄이 팀 버튼보다는 한 수위일지도 모르겠군요.
영화는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인 '제이크와 콩나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재미있는 동화가 아닌 테리 길리엄이 영화의 캐릭터인 윌 그림(맷 데이먼)과 제이크 그림(헤쓰 레저)의 성격을 설명하기위한 재치있는 발상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이런 식입니다. '빨간 망토', '개구리 왕자', '헨젤과 그레텔'등 널리 알려진 동화들이 영화속에 불현듯 등장하여 마법에 쌓인 바르마덴 숲과 거울 여왕(모니카 벨루치)의 음모를 표현해냅니다. 영화를 보며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가 영화로 만들어진 듯한 착각에 빠지면서도 그 익숙한 동화가 어느새 무시무시한 판타지 스릴러의 소재로 변하여 있는 것을 목격하게되는 색다른 쾌감을 맛보게 됩니다. 마치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를 읽는 것만 같은 오싹한 그 쾌감을...
이렇듯 동화와 판타지 스릴러를 효과적으로 한데 묶은 테리 길리엄은 할리우드 액션 어드벤쳐로써의 재미 역시 안겨줍니다.
귀여운 퇴마 사기꾼 윌과 제이크가 그 사기 행각이 드러나 프랑스 정부에 잡히게 되고 그로인하여 어쩔수없이 무시무시한 마법과 음모가 음밀히 진행되고 있는 바르마텐 숲의 사건을 해결해야 합니다. 영화는 맷 데이먼과 헤쓰 레저, 그리고 프랑스의 고문 전문가로 그림형제를 사사건건 괴롭히는 카발디 역을 맡은 피터 스토메어를 통해 간간히 관객들을 웃겨줍니다. 거울 여왕의 음모를 밝혀내는 부분에선 여느 할리우드 영화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스릴을 안겨주고, 안젤리카(레나 헤디)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할리우드 오락 영화에 절대 빠질 수없는 주인공들의 로맨스도 안겨줍니다.
[12 몽키스]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라고 하기엔 너무 암울했으며, 특히 마지막이 안타까운 비극으로 끝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반에(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비극으로 인하여 [12 몽키스]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림형제]는 거의 완벽한 할리우드 오락 영화로써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면서도 테리 길리엄이 너무 할리우드 블럭버스터의 무게에 짓눌려 자신의 색깔을 잊어버렸다고 아쉬워할 수도 없을만큼 오랜만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테리 길리엄의 스타일에 푹 빠질 수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그림형제]는 제겐 정말 최고의 영화였던 셈입니다.
이 영화에서 반가운 인물은 테리 길리엄 뿐만이 아닙니다. 비록 출연 분량은 적지만 이 영화속 그 어떤 캐릭터보다 강렬한 카리스마를 남겼던 거울여왕역의 모니카 벨루치는 그녀의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발휘했습니다.
몇일 전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를 보며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신성이라는 다이앤 크루거조차 모니카 벨루치의 아름다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던 저는 그 누구도 마법과도 같은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드는 거울여왕을 보며 역시 치명적인 아름다움에는 모니카 벨루치를 당할 여배우가 아직은 없음을 느꼈답니다.
특히 젊은 시절 제가 좋아하던 이자벨 아자니(아직도 그녀를 좋아하지만 좀처럼 영화속에서 그녀를 만날 수가 없네요.)의 그 기품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여왕 마고]를 보는 듯한 거울여왕의 아름다움과 기품은 당장이라도 그 마법에 빠지고픈 생각이들 정도였습니다.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코릿 공장]에 실망했던 제게 테리 길리엄의 [그림형제]는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동화조차도 자신의 스타일로 바꿀줄아는 그의 연출력은 이젠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고해도 과언이 아닐듯 합니다. 하지만 테리 길리엄에게도 한가지 문제는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영화가 팀 버튼의 영화와는 달리 쉽사리 국내 극장에서 만날 수 없다는 겁니다. 그의 예전 영화는 물론이고 비교적 최근작인 [라스베가스에서의 공포와 혐오](이 영화의 개봉을 그 얼마나 기달렸던가...), [굿 오멘스]같은 영화들마저 국내 극장가에선 찾아 볼 수가 없으니... 제게 작은 소망이 있다면 [그림형제]가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내 테리 길리엄의 다른 영화들도 우리 관객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겁니다. 과연 그 소망이 이뤄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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