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4년 영화이야기

[숲속으로] - 나에겐 너무 가혹한 디즈니식 성인동화

쭈니-1 2014. 12. 31. 00:47

 

 

감독 : 롭 마샬

주연 : 메릴 스트립, 에밀리 블런트, 제임스 코든, 안나 켄드릭, 크리스 파인, 조니 뎁

개봉 : 2014년 12월 24일

관람 : 2014년 12월 28일

등급 : 전체 관람가

 

 

나에겐 너무 가혹한 2014년 연말

 

지난 12월 27일 토요일... 저는 구피의 사촌 결혼식 참가를 위해 가족들과 나들이에 나섰습니다. 유난히 초밥을 좋아하는 저는 결혼식에 가면 부페에서 초밥을 두접시 이상을 먹어치웁니다. 그날도 돈걱정없이 맘껏 먹을 수 있는 초밥 생각에 아침 일찍 얼굴을 본 적도 구피의 사촌 결혼식을 즐거운 마음으로 참가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부페에 가기도 전에 저희 회사 상무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다짜고짜 신월동에 위치한 자회사의 화재 보험 가입 금액을 물으시는 상무님. 하지만 저는 기억을 하지 못했습니다. 상무님과의 통화가 끝나고 도대체 왜 갑자기 화재 보험 가입 금액을 물으시는지 궁금해하던 찰나, 자회사에 화재가 났다는 회사 동료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결혼식 부페의 초밥을 포기한채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자회사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화재 현장에 도착한 저는 망연자실하고 말았습니다. 작은 화재를 생각하고 현장에 도착했건만 현장의 상황은 처참했습니다. 건물 세채가 거의 유실되었고, 저희 자회사가 위치한 건물 1층은 전소되었습니다. 저희 자회사는 3층에 위치해있었지만, 그을림으로 상품이 거의 못쓸 지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제 고생문은 훤히 열려버렸습니다.

 

일요일 오전에는 온 가족이 함께 [숲속으로]를 보러 가기로 했었지만, 자회사가 화재를 당한 상황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사치에 불과했습니다. 토요일에는 화재 현장에서 우왕좌왕하며 하루를 보냈고, 일요일에는 청소업체를 섭외해서 사무실 청소를 하느라 또다시 하루를 소비했습니다. [숲속으로]의 영화 예매를 일찌감치 취소했고요.

주말동안 화재 현장에 유독가스를 맡으며 상황 정리를 위해 신경을 썼더니 머리는 아팠고, 목에서는 피 묻은 가래침이 연신 터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화재로 인한 단전, 단수 해결에서부터 화재 보험 회사와 보험 보상 문제 협상, 사무실 청소와 상품가치가 있는 재고와 상품가치가 없는 재고의 구분 등, 제 앞에 놓여진 일은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일요일 대강의 업무를 끝낸 저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하여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집에 들어온 저는 다짜고짜 [숲속으로]를 보러 가야 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물론 웅이는 환호했지만, 일요일 저녁의 제 갑작스로운 선언에 난색을 표했던 구피는 스트레스로 폭발직전의 제 모습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숲속으로]의 영화 관람을 승낙했습니다. 구피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숲속으로]의 영화 관람마저 막는다면 저는 이 주체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내겐 착한 동화가 필요했다.

 

제가 자회사의 화재로 인하여 극도의 스트레스에 휩싸인 상황에서 굳이 [숲속으로]의 영화 관람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물론 저는 [숲속으로]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숲속으로]가 가지고 있는 긍정의 유쾌한 에너지가 지금 제겐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숲속으로]가 긍정의 유쾌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첫번째 이유는 [숲속으로]가 디즈니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디즈니 영화는 조금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동심을 위한 착한 영화로는 언제나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관객에게 제시했습니다. 두번째는 동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숲속으로]에 등장하는 동화는 <빨간 망토>, <잭과 콩나무>, <신데렐라>, <라푼젤> 등입니다.

세번째는 뮤지컬 영화라는 점입니다. 디즈니는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영화 제작사이고, [숲속으로]는 비록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디즈니 제작, 동화 원작, 뮤지컬 영화라는 모든 요소들이 합쳐진 전형적인 디즈니표 착하고 유쾌한 영화처럼 보였습니다. 이 모든 요소들을 감안해볼때 [숲속으로]는 충분히 제2의 [겨울 왕국]을 기대해볼만한 영화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숲속으로]는 제가 기대했던 영화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레미제라블], [겨울 왕국] 등의 뮤지컬 영화는 음악으로 저를 사로 잡았지만, [숲속으로]의 노래는 토니 어워즈에 빛나는 명품 뮤지컬을 원작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적인 부분에서 매력은 그다지 없었습니다.

<눈의 여왕>을 새롭게 해석한 [겨울 왕국]과는 달리 [숲속으로]는 <빨간 망토>, <잭과 콩나무>, <신데렐라>, <라푼젤>을 한데 묶은 매력적인 동화의 재해석에 의한 매력도 부족했습니다. '빨간 망토'를 도벽이 있는 당돌한 소녀로, '신데렐라'(안나 켄드릭)는 결단력이 없는 여성으로, 잭은 약간 모자란 소년으로 설정한 것은 신선했지만, 이들의 유기적인 조화에 의한 동화의 새로운 해석은 기대에 못미쳤습니다.

그러나 제가 [숲속으로]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착한 동화를 기대했던 제게 성인동화를 안겨줬다는 점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제 블로그 이웃이 '동심 파괴 영화'라고 경고해줘서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부분이지만, 두번째 마법의 콩에 의해 여성 거인이 나타나는 부분은 [숲속으로]의 전반부와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달라서 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긍정의 유쾌한 디즈니식 동화를 기대했던 제게 디즈니는 예상밖 성인동화를 안겨준 것입니다.

 

 

'라푼젤'은 도대체 왜 나왔을까?

 

자!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아쉬웠던 부분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겠습니다. 사실 음악적인 부분은 각자의 취향이 있기 때문에 건너 뛰겠습니다. 아무래도 [숲속으로]의 음악이 제겐 낯설었기 때문에 제가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물론 낯설었음에도 불구하고 [드림걸즈]처럼 음악적인 매력이 넘쳐 흐르던 뮤지컬 영화도 있었지만...)

하지만 기대했던 동화의 새로운 해석 부분은 분명 실망스러웠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숲속으로]에는 <빨간 망토>, <잭과 콩나무>, <신데렐라>, <라푼젤>이 스토리 라인에 이용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마녀(메릴 스트립)에게 저주를 받은 베이커(제임스 코든)와 그의 부인(에밀리 블런트)은 마녀의 저주를 풀기 위해 피처럼 붉은 망토, 우유처럼 하얀 소, 옥수수처럼 노란 머리카락, 순금처럼 빛나는 구두를 구해야 합니다.

모두들 예상했겠지만 피처럼 붉은 망토는 <빨간 망토>이고, 우유처럼 하얀 소는 <잭과 콩나무>이며, 옥수수처럼 노란 머리카락은 <라푼젤>, 순금처럼 빛나는 구두는 <신데렐라>입니다. 베이커 부부가 저주를 풀기 위해 '숲속으로' 향하며 이들 동화는 한데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어우러짐이 그다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빨간 망토', '신데렐라', 그리고 잭의 캐릭터를 새롭게 해석한 것까지는 분명 좋았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숲속으로]는 여러 동화들을 끌어들였지만, 그 속에는 의미없이 소모되는 캐릭터 또한 여럿 보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캐릭터가 바로 '라푼젤'입니다. 마녀에 의해 숲 속의 비밀스러운 탑에 갇혀 살고 있는 '라푼젤'. 마녀가 베이커에게 그의 아버지에 의한 저주를 설명하며 자신이 베이커의 여동생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겼다는 이야기를 해줍니다. 당연히 마녀에게 빼앗긴 베이커의 여동생은 '라푼젤'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숲속으로]는 결국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라푼젤'이 베이커의 동생이라면 [숲속으로]는 훨씬 재미있게 스토리 라인을 진행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라푼젤'은 다른 동화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옥수수처럼 노란 머리카락을 베이커 부인에게 빼앗기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베이커 부인에게 빼앗긴 머리카락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자랐는지...) '라푼젤' 외에도 늑대(조니 뎁), 여자 거인도 기대했던 것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한채 너무 허무하게 사라집니다. 이는 너무 많은 동화를 한데 묶으며 벌어진 부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두편의 영화를 본 듯.

 

[숲속으로]의 당혹스러움은 영화 후반부에 가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디즈니스러운 착한 결말로 영화가 끝날때쯤, 여자 거인의 등장으로 동화 속의 해피엔딩은 갑작스러운 반전을 맞이합니다.

사실 여자 거인이 등장하는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이대로 영화가 끝났다면 [숲속으로]는너무 뻔한 디즈니식 동화가 되었을테니까요. (디즈니식 동화를 기대했으면서 뻔한 디즈니식 동화는 싫었던 쭈니의 이중성) 하지만 베이커 부인이 왕자(크리스 파인)과 키스를 하며 [숲속으로]는 더이상 뻔한 디즈니식 동화가 아닌 파격적인 성인동화로 탈바꿈합니다.

왕자가 신데렐라에게 '잘생겼으면 됐지, 더이상 뭘 바래?'라고 묻는 장면에서는 잠깐  동화 비틀기의 희열을 느낄 수가 있었지만 [숲속으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디즈니식 동화에서 너무 갑작스럽게 성인동화로의 반전이라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갑자기 뒤로 빠져버리는 마녀와 새총 한발에 너무 쉽게 쓰러지는 여자 거인의 모습은 [숲속으로]를 허무하게 느껴지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영화의 메시지는 여전히 디즈니다웠습니다. 여자 거인의 습격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캐릭터들이 함께 힘을 모으며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야.'라고 다독이는 모습은 분명 디즈니스러웠지만, 그러한 결론까지 가는 과정이 너무 파격적이어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약간이 찝찝함이 남았습니다.

저 때문에 일요일 저녁 억지로 극장에 끌려온 구피는 [숲속으로]를 보며 두번이나 졸았다고 합니다. 요즘 들어서 부쩍 영화를 보며 조는 구피이지만, 구피에 의하면 극장에서 두번이나 졸은 영화는 처음이라고 하네요. 저만큼이나 영화를 좋아하는 웅이는 "늑대가 너무 조금 나와서 아쉬웠어요."라는 짧은 평으로 [숲속으로]의 감상평을 대신했습니다. 웅이 역시 [숲속으로]가 실망스러웠던 것이죠.

제 경우는 기대가 너무 컸었던 것 같습니다. [시카고], [나인]을 통해 성인 취향적 뮤지컬에서 능력을 발휘했던 롭 마샬 감독의 영화인만큼 어느정도는 예상했어야 했는데, 동화를 바탕으로한 디즈니의 뮤지컬 영화라는 점 때문에 [숲속으로]를 너무 안일하게 판단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회사의 화재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엔 부족했던 [숲속으로]는 결국 내겐 너무 가혹한 디즈니식 성인동화였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나는 화재로 인한 스트레스에 휩싸여 2014년을 보내고 2015년을 맞이할 것이다.

어디 이러한 내 스트레스를 말끔히 해소시켜줄 영화는 없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