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존 카니
주연 : 마크 러팔로, 키이라 나이틀리, 애덤 리바인, 헤일리 스테인펠드
개봉 : 2014년 8월 13일
관람 : 2014년 9월 15일
등급 : 15세 관람가
국내 박스오피스의 기적을 목격하다.
개봉 1주차... [비긴 어게인]은 지난 8월 13일에 개봉했습니다. 8월 13일은 여름극장가를 겨냥한 한국영화 빅4 중에서 마지막 주자인 [해무]가 개봉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말 박스오피스에서는 [해무]가 앞서 개봉한 [군도 : 민란의 시대], [명량], [해적 : 바다로 간 산적]만큼 엄청난 흥행 돌풍을 일으킬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비긴 어게인]은 개봉 첫주 6만명을 동원하며 주말 박스오피스 9위에 그쳤습니다.
개봉 2주차... 하지만 서서히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해무]가 기대와는 달리 흥행에 대실패하면서 오히려 [해무]와 같이 개봉한 [안녕, 헤이즐], [비긴 어게인]이 새롭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비긴 어게인]보다는 풋풋한 배우들의 젊음, 죽음에 대한 담백한 이야기가 돋보였던 [안녕, 헤이즐]이 스크린수와 상영횟수에서 [비긴 어게인]을 압도했었습니다.
개봉 3주차... [해무]의 추락에는 날개가 없었습니다. [명량]도 누적관객 1,700만명을 앞두며 순위가 하락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해적 : 바다로 간 산적]만이 뒷심을 발휘하며 뒤늦게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내달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해적 : 바다로 간 산적]의 뒷심만큼이나 놀라운 영화가 한편 더 있습니다. 바로 [비긴 어게인]입니다. 이 영화는 주말 관객 28만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4위까지 뛰어 올랐습니다. 9위로 시작한 영화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굉장한 기록인 셈입니다.
개봉 4주차... 지난 9월 3일에는 추석 극장가 대목을 노리는 영화들이 대거 개봉합니다. 8년전 추석 극장가를 지배했던 [타짜]의 속편 [타짜 : 신의 손], 최민식의 할리우드 진출작 [루시], 그리고 강동원과 송혜교를 내세운 [두근두근 내 인생]까지. 이런 막강한 신작들의 개봉으로 [비긴 어게인]의 주말 동원 관객수는 19만명으로 전주에 비해 소폭 하락했고, 순위는 6위까지 내려 앉았습니다. [비긴 어게인]의 국내 박스오피스 기적은 여기까지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개봉 5주차... 추석 연휴는 끝이 났지만 여전히 [타짜 : 신의 손]은 박스오피스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시]는 관객의 호불호가 갈리면서 하락세를 면치 못했고, [두근두근 내 인생]은 개봉을 앞둔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터져나온 송혜교의 탈세 논란이 흥행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타짜 : 신의 손]에 이은 박스오피스 2위는 어떤 영화일까요? 놀랍게도 [비긴 어게인]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주말동안 무려 35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6위에서 2위로 뛰어 올랐습니다. [비긴 어게인]의 국내 박스오피스 기적은 끝이 아닌 이제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현재 [비긴 어게인]은 [타짜 : 신의 손]에 이은 실시간 예매율 2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메이즈 러너], [톰스톤] 등 신작들이 개봉 대기 중이지만 [비긴 어게인]의 입소문을 막지는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제가 [씬 시티 : 다크히어로의 부활]대신 [비긴 어게인]을 예매한 이유입니다.
같은 노래, 다른 느낌
사실 [비긴 어게인]을 봤던 지난 월요일은 이상하게도 짜증이 너무 났던 날입니다. 함께 북한산 정상을 정복하기로 약속했지만, 전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펑크를 냈던 직장 동료들에게 짜증이 났고, 추석날 술에 취한 제 모습이 실망스럽다며 외할머니한테 일러바친 웅이에게도 짜증이 났습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틈틈히 스마트폰 게임을 했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게임을 할때마다 실컷 두들겨 맞으며 패하기만 했고(요즘 제가 하는 스마트폰 게임은 로봇 배틀을 소재로한 '리얼 스틸'입니다.) 퇴근 시간에 맞춰 야근한다며 오늘 늦는다는 구피의 문자 메시지까지 받고나니 이젠 짜증을 넘어서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칼 퇴근을 감행하고 일찍 집에 들어왔지만 텅빈 집에서 씻지도 않고 침대에 뒹굴거리며 저녁 시간대를 떼웠습니다. 태권도장을 다녀온 웅이를 봐도 반갑지가 않고, 야근을 하고 돌아온 구피를 봐도 시큰둥하고... 암튼 그날은 굉장히 짜증나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밤 저는 한 밤중에 혼자 [비긴 어게인]을 보겠다며 극장으로 나선 것입니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됩니다. 어느 라이브 카페에서 널부러진 자세로 앉아 있던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그러한 그레타의 모습은 [비기 어게인]을 보기 위해 극장 좌석에 앉은 제 모습과 흡사했습니다. 그때 그레타의 동료인 라이브 가수 스티브(제임스 코든)가 마이크를 그레타에게 넘깁니다.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오른 그레타는 도시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노래라며 'Step You Can't Take Back'을 부릅니다. 시끄러운 라이브 카페안. 아무도 그레타의 노래를 귀담아 듣지 않지만, 단 한사람 댄(마크 러팔로)만큼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레타의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비긴 어게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솔직히 'Step You Can't Take Back'을 들으며 노래 가사가 참 좋다라는 생각은 했지만, 노래에 흠뻑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비긴 어게인]이 음악 영화이고,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의 흥행 신화가 음악의 힘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비긴 어게인]의 첫인상이라 할 수 있는 첫곡 'Step You Can't Take Back'이 저는 실망스러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존 카니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이었습니다. [비긴 어게인]은 그레타의 노래가 끝나자 시간을 되돌려 그날 아침 댄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지저분한 방안, 무기력해 보이는 댄. 회사에 가는 차 안에서 가수들의 데모 테잎을 듣지만 그는 '이건 쓰레기야.'라며 짜증만 낼 뿐입니다.
별거중인 아내 미리암(캐서린 키너) 대신 딸 바이올렛(헤일리 스테인펠드)를 데리러 학교에 가지만 사춘기의 바이올렛은 반항심 가득한 표정으로 댄을 대합니다. 게다가 그가 설립한 음반 회사의 파트너인 사울은 하필 그날 댄을 회사에서 내쫓아 버립니다. 이쯤되면 댄은 폭발 일보직전까지 갑니다. 그러한 댄의 모습을 보며 하루종일 짜증에 사로잡혔던 제 모습이 또다시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술에 취해 우연히 들어간 라이브 카페, 그곳에서 댄은 그레타의 노래를 들은 것입니다. 그 순간 댄의 마법에 의해 'Step You Can't Take Back'은 잔잔한 포크송이 아닌, 여러 악기들의 협주에 의한 멋진 곡으로 재탄생합니다. 처음 'Step You Can't Take Back'에 별 감흥을 얻지 못한 저는 댄에 의해 두번째로 듣게된 'Step You Can't Take Back'에는 흠뻑 빠져 버렸습니다. 분명 같은 노래인데,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와닿을 수 있는 것인지... 존 카니 감독의 마법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음악으로 대화하다.
[비긴 어게인]은 또 다시 시간을 되돌려 이번엔 그레타가 처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애인인 데이브(애덤 리바인)의 상업적 성공으로 뉴욕에 입성한 그레타. 그녀는 뛰어난 작곡가이지만 데이브와 함께 있으면 그저 데이브의 여자 친구일 뿐, 다른 사람들에겐 존재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레타는 그러한 순간들을 참고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데이브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었던 데이브가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웁니다. 변해버린 데이브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를 입은 그레타는 절친인 스티브를 찾아갔고, 스티브는 상심에 빠진 그녀를 혼자 둘 수 없어서 라이브 카페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레타는 'Step You Can't Take Back'을 부른 것입니다. 이렇게 그레타가 느꼈을 배신감, 상실감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다시 'Step You Can't Take Back'을 들으니 느낌이 또다시 새로웠습니다.
이렇게 [비긴 어게인]은 음악으로 마법을 부리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처음부터 제게 음악의 마법을 선사한 'Step You Can't Take Back'은 음악만으로도 관객에게 캐릭터를 설명하고, 메시지를 전달해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같은 음악라도 각각의 다른 느낌으로 음악은 관객에게 말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긴 어게인]의 놀라운 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Step You Can't Take Back'이 그레타의 상실감과 댄의 새로운 희망을 표현해냈듯이 이 영화는 음악으로 영화 속의 모든 것을 표현해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음반 작업 미팅을 위해 LA 출장을 다녀온 데이브가 새 노래를 만들었다며 그레타에게 들려준 'A Higher Place'는 그레타가 데이브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음을 알게 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제가 듣기에 'A Higher Place'는 그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달콤한 러브송이지만, 데이브에 대해서 잘 아는 그레타에겐 '너는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는 노래 가사의 내용이 데이브가 다른 여자가 있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들린 것입니다.
그레타가 댄과 함께 음반을 만들기로 하면서부터 그러한 음악의 역할을 더욱 커집니다. 뉴욕의 길거리에서 직접 노래를 녹음하기로 결심한 그레타와 댄이 뉴욕의 뒷골목에서 첫 녹음한 곡 'Coming Up Roses'는 그레타와 댄의 새출발한 의미하는 흥겨운 곡입니다.
뉴욕의 야경을 배경으로 빌딩 옥상에서 녹음한 'Tell Me If You Wanna Go Home'은 댄과 바이올렛, 그리고 미리암의 화해를 담고 있습니다. 데이브가 음악상을 수상하자 즉석에서 데이브의 핸드폰 음성 메시지에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Like A Fool'은 '넌 우리가 한 모든 약속들을 산산이 부쉈지만 그래도 난 바보처럼 널 사랑했어'라는 그레타의 고백과 함께 이제 그레타가 데이브에서 그늘에서 벗어났음을 선언합니다.
진정성이 담긴 음악은 우리 모두를 치유한다.
그 중에서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데이브의 콘서트에서 울려퍼지는 'Lost Stars'의 메시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가난한 연인이었던 시절, 그레타가 데이브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위해 처음 작곡한 'Lost Stars'는 순수했던 그레타와 데이브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에 'Lost Stars'는 그레타의 소중함을 뒤늦게 느낀 데이브의 화해 신청곡으로 등장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장면에서 데이브는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나타났고, 'Lost Stars' 역시 처음과는 다른 곡이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데이브에게 그레타는 충고합니다. 남이 내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닌, 내가 내 음악을 어떻게 느끼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죠.
그리고 드디어 데이브의 콘서트 장면. 이 장면에서 수염을 말끔하게 밀어버리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데이브와 함께 처음 그레타가 작곡했을 때의 느낌 그대로의 'Lost Stars'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마룬 5의 리드싱어인 애덤 리바인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함께 말입니다. 그 장면에서 저는 넋을 잃고 데이브의 열창을 감상했습니다. 그레타가 이야기한 진정성이 담긴 음악의 힘을 새삼 느낀 명장면입니다.
사실 [비긴 어게인]은 특별한 스토리가 없습니다. 영화의 긴장감을 높여줄 악역도 없고, 주인공들의 감정 대립, 위기 등 영화적 장치 또한 별로 없습니다. 그저 그레타와 댄이 뉴욕의 거리에서 녹음을 하는 그 순간부터 음악만이 저를 압도할 뿐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힘이니까요.
그래서 그레타는 데이브를 뛰어넘는 슈퍼스타가 되었을까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레타는 자신이 원했던 진정성이 담긴 노래를 불렀고, 자신의 노래로 다른 사람들과 1달러의 행복을 나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댄은 자신을 쫓아낸 회사에 멋지게 복수하고 복귀할 수 있을까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댄은 그 어느때보다 행복합니다. 미리암과의 사랑을 회복했고, 이젠 떳떳하게 바이올렛의 아버지로써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댄은 음악계의 숨은 진주를 찾는 자신의 능력을 재확인했으니 더이상 짜증만내는 루저의 삶을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
그래서 그레타와 데이브는 다시 서로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데이브는 그레타의 사랑과 충고 덕분에 초심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그레타가 데이브에게 남긴 마지막 사랑의 선물로 충분한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어깨춤까지 추고나니 그날 하루종일 저를 괴롭혔던 짜증이 확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짜증때문에 사라졌던 제 입맛을 되살려 새벽에 누룽밥 한그릇을 먹어치워버렸습니다. 아! 짜증이 사라진 것은 다행스러운데 그로인하여 조금 더 불어난 내 뱃살은 어쩌란 말입니까? 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내겐 여전히 [비긴 어게인]이라는 행복한 영화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으니까요.
영화에서 영상을 보며 캐릭터들과 함께 음악을 들을 때와,
OST를 구매해서 혼자 음악을 들을 때의 느낌은 다르다.
왜냐하면 영화에서는 음악이 캐릭터이며, 스토리이고, 대사이며, 연기이기 때문이다.
[비긴 어게인]은 영화에서의 그러한 음악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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