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4년 영화이야기

[루시] - 뤽 베송 감독이 원한 것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좀 더 거대한 그림이었다.

쭈니-1 2014. 9. 12. 14:56

 

 

감독 : 뤽 베송

주연 : 스칼렛 요한슨, 모건 프리먼, 최민식

개봉 : 2014년 9월 3일

관람 : 2014년 9월 11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내가 예상했던 영화는 분명 아니다.

 

뤽 베송 감독은 프랑스가 배출한 세계적인 흥행 감독입니다. 그는 1983년 SF, 전쟁 영화인 [마지막 전투]로 감독 데뷔한 이후 [서브웨이], [그랑블루] 등을 통해 장 자크 베넥스, 레오 카락스와 더불어 1980년대 프랑스의 '누벨 이마주'를 이끈 대표적인 감독으로 프랑스 영화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니키타], [레옹]으로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대한 동경심을 내비치더니, [제5원소]에서는 아예 할리우드 액션 스타 브루스 윌리스를 기용하여 영화를 찍기도 했습니다. 이후 뤽 베송 감독의 주요 행보는 할리우드에서도 통할 흥행성을 갖춘 프랑스의 후배 감독들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그가 발굴한 후배 감독은 [13구역], [테이큰], [프롬파리 위드러브]의 피에르 모렐, [트랜스포터], [더 독], [인크레더블 헐크], [타이탄],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의 루이스 리터리어, [트랜스포터 : 라스트 미션], [콜롬비아나], [테이큰 2]의 올리비에 메가톤 등입니다. 그들은 현재 프랑스와 미국을 오고가면 세계적인 흥행작들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영화 제작과 더불어 자신의 영화도 꾸준히 만들어냈습니다. 최근작인 [위험한 패밀리]가 대표적인데, 로버트 드니로, 미셸 파이퍼 등을 캐스팅한 코믹 액션 영화 [위험한 패밀리]는 여전히 뤽 베송 감독의 관심이 할리우드적인 오락 영화로 향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입니다. 최민식이 뤽 베송 감독의 신작인 [루시]에 캐스팅되었다고 했을 때 저는 또 한편의 재미있는 뤽 베송표 액션 영화 한편이 탄생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뤽 베송 감독은 동양 배우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키스 오브 드래곤], [더 독]에서는 이연걸을, [와사비 : 레옹 파트 2]에서는 히로스에 로쿄를, [트랜스포터]에서는 서기를 캐스팅했었습니다. 뤽 베송이 직접 연출까지한 [더 레이디]는 아예 미얀마의 지도자인 아웅 산 수치의 전기 영화이며 양자경이 주연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루시]에서 최민식이 출연한다는 소식은 그리 놀랄만한 깜짝 사건이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진정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북미에서 지난 7월 25일에 개봉한 [루시]는 개봉 첫주에 4천3백만 달러라는 성적으로 제작비 1억이 투입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허큘리스]를 간단히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더니 현재 1억2천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습니다. 이는 뤽 베송이 연출한 영화중 북미 최고 흥행작인 [제5원소]의 기록을 2배 가까이 뛰어 넘는 기록입니다.

제가 [루시]를 기대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입니다. 물론 최민식의 출연도 제 호기심을 자극시켰지만, [루시]가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기록한 엄청난 흥행 성적이 [루시]에 대한 제 기대감을 높여 놓은 것이죠. 그렇기에 저는 [루시]가 여성판 [레옹], 혹은 여성판 [테이큰]과도 같은 영화일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중반쯤 이러한 제 예상은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슈퍼 히어로? 잔인한 복수극? 도대체 정체가 뭐야?

 

[루시]는 평범한 삶을 살던 여자 '루시'(스칼렛 요한슨)가 어느날 지하 세계에서 극악무도하기로 유명한 미스터 장(최민식)에게 납치되면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녀는 몸 속에 강력한 합성 약물을 넣은채 강제로 운반하게 됩니다. 이렇게 영화는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가고, 그 이후에도 속도를 늦추지 않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이후 '루시'의 뱃속에 있던 합성 약물이 강한 충격으로 체내에 퍼지면서 '루시'는 갑작스러운 슈퍼 능력을 갖게 됩니다. 이제 '루시'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미스터 장에게 잔인한 복수를 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루시]를 보기 전에 기대한 여성판 [테이큰]인 셈입니다.

하지만 '루시'의 다음 행동이 이상합니다. 그녀는 총을 꺼내들고 병원에 찾아가 수술 중인 의사들을 다짜고짜 위협합니다. 자신의 뱃속에 있는 합성 약물을 꺼내기 위해 그녀는 수술중인 다른 환자를 총을 쏴 죽이기도 합니다. 슈퍼 히어로라고 하기에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타인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괴물처럼 행동합니다.

이후에도 미스터 장을 찾아간 그녀는 미스터 장에게 복수를 하기 보다는 합성 약물의 행방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미스터 장을 죽이는 것이 맞지만, 그녀는 미스터 장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합니다. 그러면서 그녀의 모든 행보는 각각 다른 유럽의 도시로 운반중인 합성 약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루시'의 활약담, 혹은 '루시'의 복수극을 기대했던 저는 그때부터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루시]는 그따위 자잘한 인간의 감정에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좀 더 큰,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리고 [루시]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은 영화 포스터의 광고 카피로 나와 있고,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미스터 장에게 납치된 '루시'의 모습과 교차 편집된 뇌 전문 박사인 노먼(모건 프리먼)의 강의를 통해서도 여러번 언급되었습니다. 단지 제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루시]의 국내 포스터를 보면... '인간의 평균 뇌 사용량 10%, 오늘 그녀는 100%에 다가간다.'라고 씌여 있습니다. 10%에 불과한 뇌 사용량을 점차 늘려 100%에 다가간다면 어떠한 일이 생길까요? 아마 그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러한 광고 카피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합성 약물로 인하여 우연히 자신의 뇌 사용량을 늘린 '루시'가 그 능력을 이용하여 미스터 장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뻔한 예상만 한 것입니다.

뤽 베송 감독은 친절하게도 노먼의 강의를 이용해서 저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는 관객을 위한 설명을 해줍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제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그동안 보여줬던 뤽 베송 감독의 행보와 [루시]가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는 단편적인 정보를 통해 [루시]를 단순한 SF 액션 영화로 기대했고, 영화가 포스터의 광고 카피를 통해, 노먼의 강의를 통해 제시한 그 모든 큰 그림을 애써 외면한 것입니다.

 

 

평범함을 거부한다.

 

[루시]는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난해하면서도 놀라워집니다. 사실 이 영화는 뤽 베송 감독의 영화다운 상업 영화적 쾌감도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차량 추격씬과 미스터 장 일당과 프랑스 경찰 간의 총격씬 등은 뤽 베송 감독의 상업 영화적 능력이 여지없이 발휘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루시'는 그따위 것들이 관심없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사실 '루시'가 보여준 능력이라면 미스터 장 일당을 단번에 제압할 수도 있을테지만, 그녀는 그러한 일은 프랑스 경찰들에게 맡겨 버립니다. '나는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이런 사소한 일은 당신들이 해결하세요.'라는 식으로...

그러한 '루시'의 행동은 영화 후반부에 가서 제게 극도의 혼란을 안겨주는데, '루시'의 뇌 사용량을 100%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점점 신(神)이 되어가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마치 망치로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마냥 멍한 표정만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할리우드식 SF영화를 기대했다가 존재에 대한 난해한 질문을 받고 당황했던 [매트릭스]를 떠올렸습니다.

이쯤되면 저 역시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영화는 SF영화도, 액션영화는 더욱더 아닌 것입니다. [루시]는 '우리 인간이 뇌를 100% 사용할 수 있다면?'이라는 뤽 베송 감독의 호기심에서 시작된 지적, 탐구적인 영화인 것입니다. 그러한 지적, 탐구적인 표현 방식이 뤽 베송 감독답게  SF 액션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만 부수적인 요소일 뿐인 것입니다.

 

자! 이쯤에서 다시 영화를 앞으로 돌려 보겠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제가 예상했던 [루시]에 대한 모든 것을 지워버린채 말입니다. 

[루시]의 첫 장면은 어느 원시인이 강가에서 물을 마시는 장면입니다. 이 원시인은 물을 마시던 중간에 어떤 소리에 깜짝 놀라 주위를 경계합니다. 이 원시인은 이후 영화에서 두차례 더 나옵니다. 그 첫번째 장면은 가방을 미스터 장에게 전달하라며 '루시'를 꼬드기던 남자가 '루시'가 자신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자 박물관의 첫 여성의 이름도 '루시'라며 농담을 건네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에서 박제된 원시인의 모습과 밑에 '루시'라는 푯말이 보입니다.

두번째 장면은 뇌의 사용량을 100% 가까이 끌어올린 '루시'가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강가에서 물을 마시던 원시인과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루시]의 첫 장면과 겹치는데, 원시인이 깜짝 놀란 소리는 바로 '루시'의 등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루시'는 원시인과 손가락을 마주댑니다. 

이때 떠오른 것이 뇌에 대한 노먼의 강의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뇌를 5%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뇌를 10%까지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동물이 나타나고, 결국 인간은 이러한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서 월등한 뇌의 사용량을 통해 지구를 지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쩌다가 갑자기 다른 동물들보다 월등하게 뇌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일까요? 혹시 뇌를 100% 가까이 사용할 수 있는 '루시'의 능력이 강가에서 물을 마시던 원시인에게 전달되어 현재에 이른 것은 아닐까요?

 

 

우리 인간을 창조한 것은 결국 바로 우리들이다.

 

[루시]는 분명 우리 인간이 뇌 사용량을 100%까지 끌어 올릴 수 있다면? 이라는 상상력에서 시작됩니다. 그러한 상상력은 '루시'라는 평범한 여성이 자신의 뇌 사용량을 끌어 올림으로써 미스터 장이라는 잔혹한 악당에게 복수를 하는 SF 액션의 모양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그것은 단지 속 마음을 감추기 위한 겉 모습일 뿐입니다.

결국 [루시]는 우리 인간들이 어쩌다가 다른 동물들보다 월등히 높은 뇌 사용량을 갖게 되었나? 라는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탄생에 대한 거대한 질문입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는 우리 인간들의 오랜 궁금증이죠.

지금까지 이에 대한 대답은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바로 진화론과 창조론입니다. 진화론은 다른 동물과 별반 다를 것이 없던 우리 인간들이 진화를 통해 높은 지능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창조론은 창조주가 우리 인간을 만들어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진화론과 창조론은 가설일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과학 지식으로는 인간의 창조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아직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2년에 개봉해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리들리 스콧 감독의 [프로메테우스]가 놀라운 것은 바로 인간의 탄생에 새로운 상상력을 더했다는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과 닮은 외계 종족이 인위적으로 우리 인간을 진화시켰다고 설명한 것이죠. 진화론과 창조론을 반반 섞은 새로운 상상력에 기댄 가설인 셈입니다.

 

[루시]는 바로 [프로메테우스]처럼 인간의 탄생에 대한 영화입니다. [루시]는 말합니다. 만약 우연하게 뇌 사용량을 100%까지 끌어올린 인간이 있다면... 어쩌면 그는(혹은 그녀는) 더이상 인간이 아닌 신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 자재로 조정할 수 있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신은 어쩌면 영적인 존재도, 그렇다고 고도의 문명을 가진 외계 종족도 아닌, 바로 뇌 사용량을 100%까지 끌어 올린 신의 경지에 오른 그 누군가 아닐까요?

네, 저도 압니다. 단순한 SF 액션에서 시작된 [루시]의 세계관이 너무 거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것이 뤽 베송 감독이 그린 [루시]의 큰 그림이라면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루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또한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길이라면 말입니다. 어차피 영화적 상상력은 무한하니까요.

영화를 본 지 한참이 지났지만 저는 아직도 멍합니다. [루시]는 어쩌면 좀 더 재미있는, 그리고 좀 더 평범한 SF 액션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분명 그렇게 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뇌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듯이 [루시] 역시 뇌의 무한한 가능성을 쫓다보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그림이 되어 버린 것이죠. 이것이 바로 [루시]의 놀라운 점이며, 제가 [루시]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확실한 것은 이렇게 놀라우면서도 당황스러운 영화는 당분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뤽 베송 감독이 때 '누벨 이마주'의 대표 주자였음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를 그저 상업 영화의 감독으로만 생각했는데,

막상 [루시]를 보고나니 그는 그렇게 만만한 감독이 아니었음을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