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4년 영화이야기

[명량] - 이토록 비장한 블록버스터를 본 적이 있는가?

쭈니-1 2014. 8. 1. 15:54

 

 

감독 : 김한민

주연 : 최민식, 류승룡, 조진웅, 진구, 이정현, 권율, 노민우

개봉 : 2014년 7월 30일

관람 : 2014년 7월 31일

등급 : 15세 관람가

 

 

[명량]은 지금 신기록 갱신 중...

 

지난 주에 [군도 : 민란의 시대]가 개봉했을 때만해도 저는 [군도 : 민란의 시대]의 흥행에 "우와! 대단하다."라는 감탄사를 내뱉었습니다. [군도 : 민란의 시대]는 개봉 첫날인 7월 23일 수요일,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55만명이라는 놀라운 관객수를 동원했으며, 주말동안 211만, 개봉 첫주만에 309만을 돌파하는 놀라운 흥행력을 과시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군도 : 민란의 시대]가 대단하다고해도 현재까지는 [명량]보다 덜 대단합니다. [명량]은 7월 30일 수요일에 68만명의 관객을 기록하며 [군도 : 민란의 시대]가 세웠던 최고 오프닝 스코어 신기록을 일주일만에 갈아치웠습니다. 개봉 둘째날에도 70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으며 역대 평일 최고 스코어를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평일에도 이 정도이면 주말이면 얼마나 많은 관객이 [명량]을 보기 위해 극장 앞에서 줄을 설까요? 벌써부터 31주차 주말 박스오피스 기록이 궁금해질 정도입니다.

저는 7월의 마지막날 [명량]을 보고 왔습니다. [군도 : 민란의 시대]를 봤던 일주일 전과 마찬가지로 평일 밤임에도 불구하고 꽉 찬 극장 안에서 홀로 [명량]을 봤습니다. 이렇게 2주 연속 꽉 찬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보니 그 풍경이 조금 낯섭니다. 저는 텅빈 극장에서 여유롭게 영화를 즐기는 것이 익숙한데 말입니다.

 

[명량]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위인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입니다. 제가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이라는 설문조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의 대답은 '아빠,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김유신 장군'이렇게 4파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누굴 선택했는지 잘 기억이 안납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대한민국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이순신 장군.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한 영화는 그 동안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TV에서는 김명민이 이순신 장군역으로 열연했던 <불멸의 이순신>이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방영되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영화에서는 박중훈이 청년 이순신을 연기했던 SF 코미디 [천군] 정도만 떠오를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순신 장군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좋아하는 위인이면서도 영화화되지 못했을까요? 아마도 너무나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는 점과 이순신 장군이 펼친 해전을 스크린에 담아내기엔 그 스케일을 한국영화가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 왜 김한민 감독은 그러한 어려움을 딛고 [명량]을 연출한 것일까요? 그에 대한 해답은 영화 안에 있습니다.

 

 

단점을 뛰어 넘는 [명량]의 기획력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 아무나 붙잡고 "이순신 장군이 누군지 아세요?"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어요?"라는 타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순신 장군은 말 못하는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아는 대한민국 최고의 위인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히려 그러한 유명세가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한 영화가 쉽게 만들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실제 [천군]도 정통 이순신 장군 소재의 영화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천군]은 갑작스로운 회오리 돌풍으로 예기치 못한 시간여행을 하게된 북한군 장교 강만길(이승우)과 남한군 장교 박정우(황정민) 일행이 젊은 청년 이순신(박중훈)을 만나게 된다는 SF 코미디입니다. 소재는 이순신 장군이지만, 영화의 스토리는 SF적 상상력이 동원된 전혀 새로운 이야기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명량]은 이렇게 유명해도 너무 유명한 이순신 장군이라는 소재의 단점을 어떻게 피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명량]이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가 아닌 '명량해전' 하나만을 담은 영화이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순신 장군을 묻는다면 "임진왜란때 거북선을 만들어서 왜군을 무찌른 영웅"이라는 일반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명량해전'에 대해서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명량]이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 익숙함이라는 함정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기획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이라는 큰 그림은 우리에겐 익숙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치뤘던 수 많은 해전에 대한 작은 그림을 잘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습니다.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대기를 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명량해전'이라는 단 며칠 간의 전쟁을 담아내며 익숙함의 함정을 슬기롭게 피해갔습니다.

실제로 저 역시 김한민 감독이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굳이 극장에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었습니다. 하지만 제목이 [명량]으로 결정되고, 영화의 내용 또한 1597년 임진왜란 6년,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군 함대를 무찌른 '명량해전'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부터 [명량]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명량]이 그러한 관객의 기대감을 충실하게 채웠다는 점입니다. 인간 이순신보다는 왜군으로 인하여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과, 조선인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 '명량해전'의 엄청난 스케일이 영화를 보는 저를 압도했습니다. [명량]은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명량해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기획력이 돋보였습니다.

 

 

캐릭터는 무의미하다.

 

사실 저는 [명량]을 보면서 약간은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군도 : 민란의 시대]만큼이나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군도 : 민란의 시대]가 나래이션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면서까지 캐릭터를 완성하기위해 애썼던 것과는 달리 [명량]은 영화 속 캐릭터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명량]의 초반은 이순신 장군(최민식)의 고뇌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뇌는 이순신 장군의 캐릭터를 완성하기 위함이 아닌, 왜군의 파죽지세에 겁을 집어 먹은 조선군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데 주로 이용됩니다. 단, 이순신 장군의 죽은 동료들이 원혼이 되어 나타나는 장면과 그들에게 술한잔 건네려는 이순신 장군의 안타까운 모습은 최민식의 혼이 담긴 연기와 더불어 인간 이순신을 보여준 최고의 명장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명량]에는 이순신 장군 외에도 왜군으로 구루지마(류승룡), 와키자카(조진웅), 하루(노민우), 도도(김명곤)와 조선군으로는 임준영(진구), 준사(오타니 료헤이), 안위(이승준),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아들인 이희(권율)와 임준영의 아내인 정씨 여인(이정현) 등 수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명량]은 이들 캐릭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영화 속에 그냥 소모해버립니다.

 

그 결과 이순신 장군과 '명량'에서 운명의 대결을 펼칠 구루지마의 카리스마가 [최종병기 활]의 청나라 장군 쥬신타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명량]의 구루지마와 [최종병기 활]의 쥬신타는 류승룡이 연기했다는 점 외에도 비슷한 점이 많은 악역 캐릭터이지만, [명량]이 캐릭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그냥 소모해버리니 [최종병기 활]과 같은 효과를 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나마 구루지마는 나은 편입니다. [명량]에는 잠시 얼굴을 비췄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캐릭터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부실한 캐릭터들이 [명량]에는 큰 단점이 되지 못합니다. 물론 캐릭터 위주로 영화를 보는 제겐 개인적인 아쉬움은 있었지만 [명량]이라는 영화를 즐기는데엔 큰 장애물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명량해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영화화되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가  해전을 스크린에 담아내기엔 그 스케일을 한국영화가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라 설명했었는데, [명량]은 바로 그것을 해낸 것입니다. 그것도 단 몇분간의 해전 장면이 아닌, 영화의 절반을 차지하는 1시간 가량 펼쳐지는 해전 장면은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스케일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최종병기 활]의 흥행 성공으로 좀 더 규모가 큰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연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김한민 감독은 그 기회를 정말 멋지게 성공시킨 셈입니다.

 

 

우리 모두 호로자식이 되지는 말자!

 

[명량]은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이라는 묵직한 소재와 '명량해전'이라는 한국영화 사상 전무후무한 스케일의 해전 장면을 통해 지금의 열광적인 관객의 반응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명량]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군도 : 민란의 시대]처럼 일주 천하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여름을 관통하고 추석시즌까지 이어져 2014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중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기록하는 영화로 기록될런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극과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의 절묘한 조합으로 영화의 재미를 극대화시켰던 [군도 : 민란의 시대]와는 달리 [명량]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가슴을 후벼파는 감동이 공존하기에 장기 흥행의 여지는 분명 충분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천만 관객을 돌파한 한국영화의 경우 [도둑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여운이 깊이 남는 감동을 안겨줬던 영화들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초반의 제 질문으로 다시 되돌아가겠습니다. 왜 김한민 감독은 익숙한 소재와 감당하기 어려운 스케일의 문제를 딛고 [명량]을 연출한 것일까요? 첫번째 대답은 익숙한 소재를 뛰어넘을 수 있는 훌륭한 기획력이 있기 때문이며, 두번째 대답은 [최종병기 활]의 흥행 성공으로 인한 거대 자본의 투자로 감당하기 어려운 스케일에 대한 도전의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대답은 지금 우리에겐 영웅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사실 김한민 감독의 전작인 [최종병기 활]에서도 그랬습니다.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조선. 그로인하여 수 많은 조선의 사람들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최종병기 활]은 그러한 굴욕의 역사에서 남이(박해일)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고 그를 영웅으로 만들며 관객에게 쾌감을 안겨줬습니다.

 

어쩌면 [명량]은 [최종병기 활]과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조선 시대의 굴욕의 역사인 임진왜란이 배경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최종병기 활]에서는 가상의 인물을 영웅으로 내세울 수 밖에 없었지만, [명량]에서는 불멸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이순신 장군의 존재로 인하여 [명량]은 좀 더 현실적인 영웅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명량해전'이 끝난 후 죽음의 전투를 치룬 병사들의 대화가 이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 사실을 알까?"라는 병사의 물음에 또 다른 병사는 "모르면 호로자식이지."라고 대답합니다. 그것은 [최종병기 활]에서도, 그리고 [명량]에서도 김한민 감독이 관객에게 그토록 하고 싶은 한마디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수 많은 세월동안 온갖 고초를 딛고 역사를 이어온 나라입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조선 시대엔 온갖 외침을 견뎌냈고, 6.25 한국전쟁땐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목숨을 다해 나라를 지켜냈고, 후손들에게 대한민국을 물려 줬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그러한 희생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끼며 최선을 다해 살고 있을까요?

이순신 장군의 그 수많은 전쟁 중에서 '명량해전'이 영화화된 것은 '명량해전'이 그 만큼 절박했고, 절박한 만큼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모든 조선군이 목숨을 다해 싸웠던 전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보고나오며 나도 모르게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모든 이름 없는 병사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호로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량]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그러한 깨달음입니다.

 

[명량]을 보고나니 '명량해전'을 완벽하게 재현한 영화의 기술력에 박수를 보내고,

이순신 장군의 위엄과 최민식의 연기에 탄복을 하며,

온갖 고초를 딛고 일어서는 우리의 선조들에게 감동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