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성수
주연 : 니시지마 히데토시, 김효진
다운로드로 보는 영화의 매력
[무명인]은 이번 달에만 들어서 벌써 여덟번째 다운로드로 감상하는 영화입니다. 결혼 후 제 영화 감상 루트가 비디오에서 극장으로 변경되었고, 비디오 대여점의 멸종으로 인하여 될수있으면 보고 싶은 영화는 극장에서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달에는 극장에서 본 영화가 여섯편인데 다운로드로 본 영화가 여덟편이니, 최소한 이번달 만큼은 제 영화 감상의 주요 루트는 극장이 아닌 다운로드가 되어 버렸습니다.
다운로드 영화는 여러 장점이 있습니다. 극장에 비해 영화 관람료가 저렴하고,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기에 시간적, 장소적 제한이 없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다운로드가 불법이 아닌, 예전 비디오 대여점이 가지고 있었던 제2 판권시장으로서의 순기능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번 달에 유난히 극장이 아닌 다운로드로 더 많은 영화를 본 것은 여름만 되면 심해지는 몇몇 흥행작들의 스크린 독점 현상이 올해 극장가에도 어김없이 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십여편의 영화가 새롭게 개봉하지만 막상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몇편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운로드는 그러한 제한이 없습니다. 이번 달에 본 다운로드 영화들은 대부분 극장에서 제대로된 상영 기회를 잡지 못한 영화들입니다. 이렇게 극장에서 외면받는 영화들을 제2의 판권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 매력적인 스릴러가 극장에서 외면받은 이유?
극장주들에게 외면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상업성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상업성이 없다는 것은 영화가 재미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제 영화 취향이 작품성 위주가 아닌 철저하게 재미 위주이기에 1차적으로 극장주에게 '재미없는 영화'로 찍힌 다운로드로 보는 영화의 경우는 기대치를 어느정도는 낮춘 상태에서 영화를 봐야합니다.
[무명인]도 그러했습니다. 2006년 권상우, 유지태 주연의 액션 느와르 [야수]를 통해 인상적인 감독 데뷔를 치룬 김성수 감독. ([비트], [무사], [감기]를 연출한 김성수 감독과는 동명이인입니다.) 그가 한일 합작으로 만든 [무명인]은 겉보기에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이는 스릴러 영화였습니다. 일본의 인기배우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우리나라의 김효진의 캐스팅도 호기심을 자극했고, 기억의 혼란 속에서 아내의 죽음이라는 의문의 사건과 마주하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 또한 스릴러를 좋아하는 제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하지만 [무명인]은 지난 5월 29일 개봉 이후 관객과 제대로 만날 기회조차 갖지 못한채 서둘러 다운로드 시장으로 직했습니다. 전국 51개의 스크린에서 이 영화가 기록한 최종 누적관객수는 고작 3천여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무명인]을 보면서 '겉보기에는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 영화가 도대체 얼마나 엉망이길래.'라는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저는 영화 속에 빠져들어버렸습니다. (이후 스릴러 영화에 대한 제 리뷰의 특성상 스포가 많이 공개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이 남자의 사정이 궁금하다.
시작부터 [무명인]은 저를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안내했습니다. 이 영화는 이시가미 타케토(니시지마 히데토시)의 나래이션으로 시작합니다. "믿기 힘들 겁니다. 나도 그랬으니까." 이후 [무명인]은 시가미미의 나래이션대로 믿기 힘든 이야기들을 꺼내 놓습니다.
서른 다섯번째 생일을 맞이한 이시가미는 디자인 회사에서 일러스트를 그리는 일을 하는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1년전 그는 공모전에 당선되어 직장을 얻었고, 한달 전에는 결혼도 한 상태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그날은 그의 생일날. 아내가 기다리는 집에 서둘러 귀가한 그는 거실에 쓰러져 있는 아내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 이후에 벌어집니다. 아내의 시체에 망연자실한 이시가미.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내인 미유키에게 전화가 옵니다. 친정에서 자고 가겠다는...
이시가미가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집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거실에 있던 아내의 시체와 핏자국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립니다. 이시가미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은 이시가미를 차에 태웁니다. 그런데 경찰들마저 수상합니다. 다짜고짜 이시가미에게 오진우라는 사람을 아냐고 묻고 총으로 협박을 합니다. 도대체 이시가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친절한 단서들, 하지만 그럼에도 혼란스러운 진실들.
가짜 경찰들에게 겨우 도망친 이시가미는 우연히 취재를 위해 일본에 온 한국인 기자 강지원(김효진)을 만나게 됩니다. 강지원은 1년전 실종된 남편에게 대한 새로운 제보를 하겠다는 한유리라는 여성을 만나기 위해 일본에 온 상황. 하지만 제보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느닷없이 수상한 남자가 자신의 차에 올라타 도와달라고 하니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기자 특유의 호기심으로 이시가미와 함께 그가 처한 이 미스터리한 상황들의 진실을 캐내려 다짐합니다.
사실 [무명인]은 스릴러 영화이면서 영화 초반부터 관객들에게 충분한 힌트를 제시합니다. 한국어를 배운적이 없다는 이시가미가 '다시 돌아온 생일! 당신도 돌아올 수 있다면...'이라는 한국어로 쓰려진 아내의 생일 축하 메시지를 유창하게 읽는 장면은 그가 기억을 잃은 한국인일지도 모른다는 강력한 단서가 됩니다. 그가 한국인이라면 가짜 경찰들이 이야기한 오진우일 가능성이 큰 셈입니다. 게다가 이시가미가 쫓기는 와중에 호텔 TV에서 치매 치료약을 개발했다는 교수의 인터뷰가 방영되는 장면은 기억의 혼란을 겪는 이시가미의 현상황에 대한 진실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무명인]이 영화 시작 1시간 만에 이시가미와 오진우에 대한 진실을 관객에게 밝혀버린 다는 사실입니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이 2시간임을 감안한다면 [무명인]은 영화의 절반 쯤에 제가 가장 궁금했던 진실을 공개해버립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명인]의 영화가 끝나는그 순간까지 저를 긴장하게 합니다.
오진우가 이시가미로 살아야 했던 이유... 그리고 슬픈 반전
이사가미가 사실은 이시가미가 아닌 오진우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무명인]의 긴장감이 더욱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가 감추고 있는 진실이 이시가미의 정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진우는 치매 치료약을 개발 중에 있었고, 그러한 와중에 변종 바이러스의 놀라운 효과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진우의 동료의 설명을 빌리자면... "원래는 기억을 지우는 놈을 기억을 저장하는 놈으로도 바꿔줄 수 있단 얘깁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유전자를 조작한 바이러스를 몸에 주입시켜 기억 정보를 흡수하게 한 후 다시 혈액을 통해 추출해 내서 보관하는 거죠. 정자은행처럼요. 나중에 그 사람이 치매로 기억을 잃어버리면 바이러스에 보관된 기억을 되돌려 주는 겁니다."
결국 오진우에게 이시가미의 기억이 담긴 바이러스가 주입되었다는 것인데... 과연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런데 그러한 의문 또한 곧바로 밝혀집니다. 유강진(이경영)이라는 한국인에 의해서... 모든 비밀이 밝혀졌다고 생각하고 러닝타임을 보니 영화 시작후 1시간 30분이 흐른 뒤였습니다.
아직도 30분이 남아 있는 상황. 오진우가 이사가미로 살아야 했던 이유도 밝혀지고, 이사가미의 아내의 죽음에 대한 진실도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아직 3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남아 있습니다. '더 할 이야기가 남아 있나?'라는 의문이 생기는 바로 그 순간, [무명인]은 예상 외의 슬픈 반전을 준비시킵니다.
기억은 사라져도 어딘가 추억은 남아 있다.
만약 내가 치매에 걸린다면 그로인하여 가장 고통을 받게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분명 치매에 걸린 당사자는 아닐 것입니다. 점차 자신의 기억을 잃어 가겠지만, 기억을 잃는다고 해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아마도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치매에 걸린 사람을 돌봐야 하는 가족, 특히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기억을 잃어가며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힘든 일일 것입니다. [무명인]의 마지막 반전에 담긴 것은 바로 본의 아니게 치매에 걸린 오진우와 그러한 오진우를 진정 사랑한 한유리의 슬픈 고통이었습니다. 그가 오진우의 기억을 잃고 이사기미로 살아가는 동안에 한유리는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오진우가 이시가미의 기억을 잃고 자신의 기억을 되찾으면 이번엔 새로운 아내인 미유키가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남자의 육체에 깃든 두 남자의 기억, 그리고 그를 사랑한 두 여인. 그녀들의 고통을 알기에 이시가미는 모든 진실을 알고난 후에도 분노대신 "고마워요. 부디 행복하게 살아주세... 정말 미안..."이라는 말 밖에 남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스릴러를 보며 오랜만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쉬운을 잊게 해준 여운
물론 [무명인]에게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한국인 캐릭터를 연기한 일본 배우들의 서투른 한국말이 귀에 거슬렸습니다. 특히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흥분한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국말을 내뱉는 장면. 그 장면은 이시가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결정적인 장면이지만, 니시지마 히데토시의 서툰 한국말 때문에 웃음이 피식 나고 말았습니다. (개그콘서트의 맨붕스쿨에서 서태훈의 발연기가 순간 떠오른...) 하지만 마지막 반전에 의한 슬픈 여운이 너무 좋았기에 그까짓 아쉬움은 그냥 잊어버렸습니다.
[무명인]은 기억이라는 소재를 통해 미스터리한 사건을 완성하고, 그러하 미스터리한 사건의 이면에 감춰진 슬픈 반전을 제시한... 감성 스릴러 영화입니다. 마지막 오진우의 모습을 보며 차라리 슬픈 기억을 잃어 버린다면 최소한 본인은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지만 기억은 사라져도 추억은 남아 있다는 강지원의 한마디는 그러한 제 생각이 틀렸음을 알려줍니다.
슬픈 기억 또한 나를 이루는 하나의 요소인 것을... 슬픈 기억을 잊기 위해 소중한 추억마저 지워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강지원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기에 오진우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줄 것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견딜 수 없는 슬픔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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