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원희
주연 : 최윤영, 박정식, 이재윤, 김종구, 문희경
로맨틱 코미디가 쉽다고? 천만의 말씀!!!
가끔 신인 감독들이 로맨틱 코미디를 통해 장편 영화 데뷔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로맨틱 코미디는 제작비 부담이 다른 장르의 영화들에 비해서 적기 때문에 신인 감독의 등용문으로 적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저예산으로 만들으려다보니 매력적인 배우 캐스팅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로맨틱 코미디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나도 저런 사랑을 해보고 싶다.'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목표임을 감안한다면 관객에게 사랑의 환상을 심어줄 수 있는 A급 배우를 캐스팅할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신인 감독들은 그러한 약점을 독특한 전개로 메꾸려 합니다. 로맨틱 코미디는 대부분 선남선녀가 만나고, 티격태격하다 사랑하고, 이별의 위기를 겪지만 결국 오해를 풀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전형적인 전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로 데뷔하는 신인 감독들은 바로 그러한 전형적인 틀을 깨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함정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로맨틱 코미디의 틀을 깨면서 로맨틱 코미디의 재미도 지켜낼 수 있다면...
독특한 전개에 대한 욕심으로 무리수를 두는 저예산 로맨틱 코미디는 많습니다. 그 중에서 제 기억 속에서 아직도 최악으로 남은 영화가 바로 [통통한 혁명]입니다. [통통한 혁명]은 완벽한 외모와 S라인을 자랑하는 톱모델 도아라(이소정)가 까칠한 포토그래퍼 강도경(이현진)을 짝사랑하게 되고, 강도경의 이상형이 D라인의 통통한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도아라는 살을 찌기 위해 노력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통통한 혁명]은 S라인의 여성이 사랑을 위해 D라인이 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로맨틱 코미디로는 드문 독특한 설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독특함이 로맨틱 코미디의 달콤함으로 변환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댄 나의 뱀파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통통한 혁명]처럼 최악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좀처럼 최악이라는 표현을 안하는데, [통통한 혁명]은 정말 보는 내내 짜증나는 최악의 로맨틱 코미디였습니다.) 이원희 감독은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통해 자신의 장편 영화 데뷔작을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로 포장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이 영화의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의 재미로 변환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시대의 뱀파이어는 무엇일까?
영화의 오프닝에서 작가지망생 규정(최윤영)은 뱀파이어라는 아주 오래된 소재를 소개합니다. 그녀는 뱀파이어는 당시 사회의 불안을 상징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 시대의 뱀파이어는 바로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아주 멋진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흑사병의 창궐이 중세의 뱀파이어를 탄생시켰다면, 과연 2014년 대한민국의 그 무엇이 뱀파이어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춘의 불안함일 것입니다. 규정은 작가지망생이지만 서른이 되어 가도록 어머니의 반찬가게에서 알바를 하는 한심한 청춘입니다. 그녀는 매번 '이번 시나리오만 잘되면...'이라고 변명하지만 그건 그저 그녀의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시나리오는 단 한줄도 쓰지 못했고, 규정의 친구인 지순(김형미)은 허무맹랑 이야기라며 비꼬고, 규정의 어머니 덕희(문희경)는 빨리 시집이나 가라며 닥달합니다. 게다가 규정은 지순의 애인인 주형(이재윤)을 짝사랑하고 있으니 일, 사랑 모두 앞이 안보입니다.
그녀에게는 불안한 미래가 바로 뱀파이어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녀 앞에 진짜 뱀파이어가 아닌지 의심되는 수상한 남자 남걸(박정식)이 나타납니다. 햇빛과 마늘을 싫어하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감춘... 남걸과의 만남으로 규정의 시나리오는 술술 풀리기 시작하고, 남걸의 과거를 알게 되면서 둘은 미묘한 감정에 빠집니다.
불안한 미래를 사랑한 여성
남걸을 모델로 규정은 '그댄 나의 뱀파이어'라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제목이 바뀝니다. 박찬욱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를 패러디한 듯한 '뱀파이어지만 괜찮아'로 말입니다.
만약 영화의 초반 규정의 나래이션대로 뱀파이어가 시대의 불안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규정은 그러한 불안전한 미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당찬 여성으로 성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원희 감독이 이렇게 불안한 미래를 극복하는 규정의 성장기를 충실히 담았다면 [그댄 나의 뱀파이어]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저예산 로맨틱 코미디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원희 감독은 신인 감독 특유의 조급함을 내비칩니다. 그 결과 규정은 불안한 미래의 청춘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볍고, 덤벙됩니다. 그녀가 지닌 청춘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느껴져야 할텐데 아쉽게도 규정에겐, 그리고 최윤영의 연기에겐 그러한 면모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남걸을 연기한 박정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뱀파이어가 상징적인 소재라면 남걸 역시 좀 더 미스터리한 캐릭터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원희 감독은 코미디가 관객에게 좀 더 먹힌다고 생각했는지 남걸의 캐릭터 역시 가볍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이렇게 가벼운 캐릭터로는 시대의 불안을 상징하는 전개를 이끌어낼 수가 없습니다.
갈 길 잃은 저예산 로맨틱 코미디.
이원희 감독은 선택을 했어야 했습니다. 만약 로맨틱 코미디의 재미를 원했다면 규정과 남걸의 캐릭터를 좀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어서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의 재미를 뒤따라야 했습니다. 만약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를 원했다면 규정과 남걸의 캐릭터를 좀 더 진중하고 미스터리하게 만들었어서 로맨틱 코미디의 경계를 허물어야 했습니다. 결국 독특하면서도 로맨틱 코미디의 재미까지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하니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가서 이원희 감독은 남걸의 캐릭터를 좀 더 미스터리하게 바꿔놓으려 애씁니다. 속도위반 카메라게 찍힌 주형의 차 내부에 남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과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남걸의 규정의 모습을 통해...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남걸은 이미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 받고, 고아견병에 걸린 강아지에게 물린 이후 조금 맛이 간 괴짜 천재일 뿐입니다. 이원희 감독이 뒤늦게 남걸이라는 캐릭터의 미스터리를 강조해봤자, 이미 [그댄 나의 뱀파이어]는 갈 길을 잃고 난 후였고, 더이상 돌이킬 수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이렇게 또 독특함을 탐한 저예산 로맨틱 코미디의 안타까운 모습만을 확인하고 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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