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4년 영화이야기

[그녀] -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

쭈니-1 2014. 5. 29. 13:00

 

 

감독 : 스파이크 존즈

주연 : 호아킨 피닉스, 스칼렛 요한슨, 에이미 아담스, 루니 마라, 올리비아 와일드

개봉 : 2014년 5월 22일

관람 : 2014년 5월 28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여운이 짙게 남았다.

 

저는 요즘 정신없이 바쁜 5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4월 말에 터진 저희 회사의 회계 감사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꽤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주말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닙니다.

5월 첫째 주말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 여행을 다녀왔고, 셋째 주말에는 회사 체육대회, 넷째 주말에는 회사에서 우럭 낚시를 다녀왔더니 피곤함이 극에 치닫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루 휴가를 냈습니다. 회계 감사건도 마무리되었고, 회사내 행사도 가을까지는 없기에 마음 편히 하루 쉬겠다며 과감히 연차 휴가계를 제출한 것이죠.

그렇게해서 얻어낸 하루 간의 휴가. 아침 일찍 일어나 먼지 투성이인 집부터 말끔히 청소를 하고, 버스를 타고 극장에 가서 [그녀], [더 바디]를 관람하였습니다. 영화 관람 후 늦은 점심식사는 순대국에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기분좋게 해결했습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도 깔끔하게 잘라버리고, 집에 돌아와 구피가 간절히 원했던 화장실 청소도 해치웠습니다. 남은 시간은 침대에 뒹굴거리며 책도 읽고, 쇼파에 누워 TV를 보다가 무작정 동네 한바퀴를 걷기도 하면서 쌓였던 피로를 말끔히 씻어버렸습니다. 

제가 휴가를 낸다고 하자 회사 동료들은 뭔가 특별한 일이 있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제 대답은 "그냥 하루종일 영화나 보려고요." 입니다. 그러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작 영화를 보려고 휴가를 내? 연차 휴가비 아깝게..."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더군요. 저는 그냥 씨익하고 웃어버렸지만 마음 속으로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여유랍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저는 언제나 그랬듯이 휴가를 위한 영화 보기 계획을 잔뜩 세웠었습니다. 원래의 계획은 [그녀]와 [더 바디]를 본 후, 늦은 점심 식사를 대충 하고 나서 [도희야]를 보는 것입니다. 제가 신작이 개봉하는 목요일이 아닌 굳이 수요일에 휴가를 낸 이유도, 이들 영화가 은근히 기대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를 본 후, 마음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영화에 대한 여운이 너무 짙어서 이 여운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비록 [더 바디]는 예매취소 가능시간이 지나버려서 그냥 관람했지만, [도희야]의 예매를 취소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제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멋진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녀]의 영화 이야기를 곧바로 써내려간 것은 아닙니다. 제가 [그녀]의 영화 이야기를 쓰기 전에 한 것은 화장실 청소입니다. 사실 저는 화장실 청소를 싫어합니다. 화장실 청소를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옷이 물에 젖어버리는데, 젖은 옷을 입는 꿉꿉한 기분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나니 한결같이 내 곁에서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구피에게 좀 더 잘해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휴가를 냈다고하자 "그러면 화장실 청소좀 해주면 안돼?"라며 간절한 눈빛으로 말하던 구피의 애교섞인 모습이 생각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저는 가장 먼저 화장실 청소부터 한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화장실 청소를 할만큼 변하게 한 영화 [그녀]에 대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다운 이야기?

 

[그녀]를 단순하게 소개하자면 인공지능 컴퓨터 운영체제인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와 사랑에 빠진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인공지능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컴퓨터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라니... 지난 3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그녀]의 소식을 듣고 영화의 정보를 검색하면서 저는 참 스파이크 존즈 감독다운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존 말코비치 되기], [어댑테이션] 등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소재의 영화들을 만들었었습니다. [존 말코비치 되기]만 보더라도 존 말코비치의 뇌 속에 머물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한 크레이그(존 쿠삭)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내인 로테(카메론 디아즈)와 함께 존 말코비치가 될 수 있는 통로를 이용하여 돈벌이에 나섭니다. 하지만 사회적 성공을 거둔 존 말코비치가 된다는 것은 또다른 욕망의 시작이었고, 가난한 인형술사인 크레이그는 존 말코비치가 되어 인형술사로서의 명성과 직장 동료 맥신(캐서린 키너)의 사랑을 모두 가지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독특하기로만 따진다면 [어댑테이션]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자신이 쓴 첫 작품이자 아카데미 각본상을 안겨준 [존 말코비치 되기]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스타 작가인 찰리 카우프만(니콜라스 케이지)은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소심남입니다. 그런 그에게 기자인 수잔 올린(메릴 스트립)이 찾아와 진귀한 난초를 찾아 오지를 헤매는 탐험가 존 라로치(크리스 쿠퍼)의 소설을 각색해달라고 맡깁니다. 하지만 각본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고, 결국 찰리는 쌍둥이 동생 도날드(니콜라스 케이지 1인 2역)와 함께 수잔의 집에 몰래 숨어들고, 그곳에서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됩니다.

 

[존 말코비치 되기]와 [어댑테이션]은 독특한 소재를 통해 인간의 숨겨진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영화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녀] 역시 인공지능 컴퓨터 운영체제를 사랑한 테오도르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성을 신랄하게 비튼 영화일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극장을 찾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제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아니, 인공지능 컴퓨터 운영체제와의 사랑을 이렇게 아름답고, 슬프게 만들어 놓다니... 이건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 중의 반전입니다.

애틋한 사랑을 담은 영화라면 영화의 포스터에서부터 그러한 애틋함이 잔뜩 묻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포스터는 콧수염을 한 호아킨 피닉스의 무미건조한 증명 사진과도 같은 사진 한장이 전부입니다. 그것도 결코 매력적이라 할 수 없는...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그러한 포스터만으로도 가슴이 찡해집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무미건조한 증명사진 같았는데, 영화를 보고나니 외로움에 사무친 한 남자의 슬픈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테오도르가 사랑에 빠지는 인공지능 컴퓨터 운영체제 사만다의 목소리만으로도 로마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스칼렛 요한슨.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제 고작 8회를 개최한 걸음마 단계의 로마 국제영화제가 스타 배우의 수상을 통해 명성을 높이려 무리한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저 역시도 사만다와 사랑에 빠져 버렸고, 그녀의 목소리 연기는 그 어떤 연기보다도 완벽하게 느껴졌습니다. 아! 저는 진정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태초의 인간이 사랑을 한 이유

 

[그녀]는 순수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사랑... 몇십년전, 임병수라는 가수가 '사랑이란 말은 너무 너무 흔해~'라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맞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대중가요는 물론, 소설, 영화 등 거의 대부분의 문화 장르에서 광범위하게 쓰여지는 소재입니다. 그만큼 흔하지만, 또 그렇다고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라며 단정지을 수도 없는 참 묘한 단어입니다.

[그녀]를 본 후 제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우리 인간은 왜 사랑을 하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자손 번식의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암컷과 수컷의 짝짓기를 통해 자손을 번식시키고, 대부분의 식물들은 꽃가루와 씨앗을 멀리 날려보내 번식을 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그러한 자손 번식의 본능은 곧 그들의 사랑 방식입니다.

인간이라고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 역시 자손 번식의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서로의 매력에 이끌리게 되고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 자손을 번식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한 이끌림, 그리고 자손 번식을 위한 섹스 행위는 태초의 인간이 행한 순수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진화했고, 문화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면서 본능보다는 이성이 인간을 지배하면서 사랑의 의미 역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자손을 번식하기 위한 순수한 행위에서 사랑의 의미는 광범위하게 발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의미가 발전하면 할수록 사랑의 행위 역시 남과 여라는 한정된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테오도르의 사랑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는 별거중인 아내 캐서린(루니 마라)을 아직 사랑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아내가 보내온 이혼 서류에 쉽사리 사인을 하지 못하고 망설입니다. 

그런 그가 매력적인 여성(올리비아 와일더)을 소개받고 그녀와 즐거운 하루를 보냅니다. 그녀는 테오도르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며 "혹시 나를 하룻밤 상대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라며 묻습니다. 그녀는 테오도르와의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뜨겁게 달아올랐던 그녀를 향한 테오로드의  사랑(혹은 욕정)은 차갑게 식어버립니다.

어쩌면 테오도르는 결혼이라는 사회적 관습이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그렇게 평범하게 한 여자의 남편으로, 아이들의 아버지로 산다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테오도르가 캐서린을 사랑하지만 그 둘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사실과, 소개팅에서 만난 여성이 결혼을 이야기하자 갑자기 주저하기 시작하는 테오도르의 행동은 이를 뒷받침해줍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사랑이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영화 초반, 잠을 이루지 못한 테오도르는 낯선 여성과 폰섹스를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욕정만 채우고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허무한 표정을 짓는 테오도르. 그런데 그러한 장면은 영화의 중반에 재현됩니다. 이번엔 인공지능 컴퓨터 운영체제인 사만다와의 섹스인데, 비록 폰 섹스는 아니지만 목소리만으로 섹스를 한다는 점에서 폰섹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만다와의 섹스를 통해 테오도르는 최고의 쾌감을 느낍니다.

영화 초반의 폰섹스와 영화 중반의 사만다와의 섹스가 다른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소통입니다. 영화 초반의 폰섹스에서 상대 여성은 자신의 욕정만 채우기만 급급하지만, 사만다와의 섹스에서는 서로 소통하며, 서로의 욕정을 어루만져줍니다. 그렇습니다. 테오도르가 필요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소통인 것입니다.

 

 

우리는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사랑한다.

 

우리는 수 많은 사람들의 틈에서 생활합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리고 거리에서도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 따위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외롭습니다. 왜일까요? 그건 저 수많은 사람들이(가족조차도)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테오도르는 편지 대필 작가로 직장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아파트에 절친한 친구인 에이미(에이미 아담스)도 살고 있습니다. 그는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외로워합니다.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인공지능 컴퓨터 운영체제에 불과한 사만다와의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그러한 외로움 때문입니다. 테오도르의 이메일 등을 분석하여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언제 어디서나 그가 부르면 곁에 있어주는 사만다. 그러한 사만다를 통해 테오도르는 외로움을 이겨내고, 그녀와의 사랑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사만다가 인간의 몸을 빌어 테오도르와 섹스를 하려 시도하는 장면에서 테오도르는 강한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에 대한 이끌림이고, 그러한 이끌림은 자연스럽게 육체적 관계로 진행됩니다. 그것은 본능이고, 자연의 섭리입니다. 하지만 테오도르에게 사랑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체적 관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자기 자신을 이해해주고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사만다가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위해 잠시 테오도르의 곁을 떠나자 테오도르는 거의 발작에 가까운 반응을 보입니다. 그녀를 만질 수도 없고, 그녀와 육체적 사랑을 나눌 수도 없지만, 그녀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만다와 사랑을 진행하는 동안 테오도르는 수도 없이 되뇌입니다. "넌 그저 프로그램일 뿐이잖아." 아무리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프로그래머에 의해 창조된 인위적인 존재. 그것이 사만다이지만, 테오도르는 빠져나올 수 없는 사랑의 깊은 수렁에 빠져버립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테오도르의 사랑을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테오도르가 컴퓨터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졌다는 고백을 했을 때, 캐서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왜 우리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니?'라는 억울한 표정을 짓는 테오도르처럼 저 역시도 캐서린에게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완벽한 사랑을 이해시키고 싶은 욕망에 빠져 버렸습니다.

사만다와 함께 해변가를 거닐며 일반 연인들이 하는 데이트를 하고, 회사 동료와 더블 데이트를 하며 즐거운 한때는 보내는 테오도르의 모습을 보며 '참 부럽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은 관객인 제가 보기에도 완벽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을 그저 인간과 컴퓨터 운영체제의 독특한 사랑으로만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사랑을 통해 그는(그녀는) 성장(진화)한다. (영화의 결말 포함)

 

[그녀]는 인간과 컴퓨터 운영체제의 사랑이라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소재를 통해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사랑의 참모습을 탐구하는 영화입니다. 태초에 다른 동, 식물들처럼 자손 번식을 위해 사랑을 했던 인간은 진화하면서 본능이 아닌 이성적 사랑을 추구했습니다. 인간이 진화하면서 사랑의 의미 또한 바뀐 것이죠.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성장 혹은 진화입니다. 그들은 사랑을 통해 점차 자기 자신을 깨고 좀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갑니다. 어쩌면 인간의 진화가 사랑의 의미를 바꾼 것이 아닌, 사랑이 인간의 진화를 촉발시킨 것은 아닐까요? 

테오도르의 경우는 보죠. 그는 편지 대필 작가입니다. 모두들 그의 편지에 감동을 느끼지만, 테오도르만은 "그래봤자 대필 편지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아내인 캐서린은 사회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테오도르는 편지 대필 작가로 자신의 초라함에 움추러듭니다. 그는 자신이라는 벽에 갇혀 있었고, 그것은 스스로를 외롭게 했으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쉽게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옭아맵니다.

그런데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편지에 담긴 감동을 출판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테오도르가 처음으로 자신이 대필한 편지를 통해 직장 안을 넘어 남에게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사만다의 사랑이 테오도르를 성장시킵니다. 그리고 비로서 테오도르는 자신이라는 벽을 깨고 나옵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테오도르는 남의 편지가 아닌, 직접 자신의 편지, 즉 캐서린에게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러한 테오도르의 긍정적인 변화는 사만다와의 사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사만다입니다. 컴퓨터 운영체제에 불과했던 그녀는 테오도르를 사랑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욕망은 그녀를 진화시켰습니다. 물론 그녀의 진화에는 시행착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테오도르를 사랑하기에, 인간의 감정을 느끼고 싶어하는 사만다의 진화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 많은 세월을 통해 서서히 진화하는 인간과는 달리 빠른 시간 안에 급속도의 진화(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는 사만다. 그러한 사만다가 테오도르의 곁을 떠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이 진화하며 사랑에 대한 의미가 바뀌었듯이, 사만다 역시 진화하면서 테오도르에 대한 사랑의 의미가 바뀐 것이니까요.       

[그녀]의 여운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기도 하고, 미움보다 더 무서운 무관심이 되어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시시각각 바뀌기 때문입니다. 진화, 성장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꺼내들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새로운 경험과 교육을 통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존재이니까요.

영화의 마지막에 각각의 컴퓨터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졌던 테오도르와 에이미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그들은 사랑에 빠질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도 있습니다. 그들이 사랑에 빠진다고 해도 그 사랑은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가장 순수하다고 느꼈던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마저 영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하기 위해서... [그녀]가 일깨워준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나는 구피와 사랑에 빠졌고, 영화와 사랑에 빠졌으며, 내 블로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그것들)은 모두 내가 세상에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외롭지 않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