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웨스 앤더슨
주연 : 랄프 파인즈, 토니 레볼로리, 애드리언 브로디, 윌렘 데포, 시얼샤 로넌, 틸다 스윈튼, 에드워드 노튼, 주드 로, 제프 골드브럼, F. 머레이 아브라함
개봉 : 2014년 3월 20일
관람 : 2014년 3월 23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웨스 앤더슨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지난 토요일 아침, 저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로얄 테넌바움], [문라이즈 킹덤]을 통해 제게 독특한 영화적 재미를 안겨줬던 웨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입니다. 이미 그의 전작들을 혼자 봤기에, 저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역시 혼자 볼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구피의 표정이 이상합니다. 이 영화는 분명 구피 취향의 영화가 아님이 분명한데, 구피는 자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보고 싶다는 뉘앙스로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같이 보러 갈래?"라고 넌즈시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왠걸... "오늘은 좀 그렇고, 일요일 밤에 같이 보러가자."라며 제 미끼를 덥썩 물더군요.
일요일, 저희 가족은 2014 프로야구 시범경기의 마지막 날을 즐기기 위해서 잠실 야구장으로 김밥을 싸들고 총출동했습니다. KIA와 LG의 경기. 오랜만에 탁 틔인 잠실 야구장에서 따사로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고, 캔맥주를 즐기면서 프로야구 시범경기를 보니 좋더군요.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일요일 저녁에는 저도, 구피도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결국 머릿 속으로는 '피곤해, 졸리워'를 연발하고 있었지만, 몸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구피 역시 하품을 연신 해댔지만, 토요일 아침에 혼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러 가려했던 저를 막아선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아무 말도 못하고 저와 함께 극장으로 향해 줬습니다.
사실 걱정이 되기는 했습니다. 저는 이미 [로얄 테넌바움]과 [문라이즈 킹덤]을 통해 웨스 앤더슨 감독의 스타일을 익히 알고 있지만, 구피에게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처음이거든요. 혹시라도 구피가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뭐 이딴 영화를 보러가자고 하냐?"며 투덜거리면 어쩌나라는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구피는 아주 조용히 영화 속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 구피에게 "이 영화, 어땠어?"라고 묻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새벽 12시가 넘어 어둠이 내린 거리를 해치고 집으로 향했을 뿐입니다. 사실 저는 그러한 침묵을 좋아합니다. 영화를 본 후에 즉석해서 "이 영화가 저랬네, 이랬네."라며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는, 그저 묵묵히 침묵하며 여운을 즐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구피에게 물어봐야 겠네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세계에 방문한 기분이 어땠는지. 지금쯤 구피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대한 여운을 전부 즐겼겠죠?
파시즘과 나치즘이 지배하던 시절.
자!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아름다운 미스터리 스릴러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주요 시대적 배경은 1930년대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가상의 국가 주브로브카입니다. 우선 193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전 유럽을 전쟁의 포화 속에 몰아 넣었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간입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고작 20여년이 지난 후인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또다시 일어납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세계 최고의 부호 마담D(틸다 스윈튼)가 의문의 살인을 당하는 1927년은 바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중간 지점입니다. 당시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만성적인 공황과 정치적, 사회적 불안 등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등에 업고 등장한 것이 바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주장한 파시즘과 독일의 히틀러가 주장한 나치즘입니다.
그러한 암울한 시대 배경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잘 드러납니다. 마담D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마담D의 아들인 드미트리(애드리언 브로디)는 해결사 조플링(윌렘 데포)을 앞세워 어머니의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죽이기 시작합니다. 마담D의 고문 변호사이자 유산 집행자인 코박스(제프 골드브럼)를 비롯하여 마담D의 집사이자 숨겨진 유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서지X, 그리고 서지X의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까지... 이렇듯 드미트리와 조플링의 폭력은 당시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파시스트와 나치의 폭력을 간접적으로 비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비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신입 벨보이 제로(토니 레볼로리)는 폭력의 희생자입니다. 그는 구스타브(랄프 파인즈)에게 자신의 가족이 군인들에게 몰살당했다고 고백합니다. 겨우 살아 남은 그는 무국적 난민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로를 구스타브는 아버지처럼 감싸줍니다.
마담D의 의문의 죽음으로 살인 용의자로 몰린 구스타브. 그는 폭력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기차에서 마주친 군인들이 제로의 무국적을 문제삼아 데려가려하자 구스타브는 적극적으로 이를 저지합니다. 총을 소지한 군인의 위세로 눌릴만도 하지만 구스타브는 오히려 큰 소리를 치며 이에 맞서 싸웁니다. 제로를 향한 폭력에 용감하게 맞선 구스타브의 용기. 어쩌면 그것이 웨스 앤더슨 감독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통해 그리고자 했던 아름다운 희망일 것입니다.
1930년대.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유럽은 불안에 휩싸였고, 그러한 불안 속에 파시스트와 나치가 암덩어리처럼 세력을 키워나갑니다. 그리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바로 그러한 암울한 시기를 영화적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가 항상 그러하듯이 그러한 암울함을 표현하는 것은 아름다움과 경쾌함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다분히 웨스 앤더슨 감독다운 영화입니다.
암울한 시대, 하지만 아름다운 판타지한 공간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는 항상 그랬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웨스 앤더슨의 세계에 흠뻑 빠졌던 [로얄 테넌바움]은 아버지(진 핵크만)와 어머니(안젤리카 휴스턴)의 별거로 인하여 천부적인 재능을 펼치지 못한채 잊혀진 천재로 몰락하여 불행한 삶을 살고 있던 채스(벤 스틸러), 마고(기네스 팰트로우), 리치(루크 윌슨)의 이야기입니다. 이들 삼남매의 이야기는 해체된 가족의 비극을 담고 있지만 영화의 분위기는 오히려 발랄한 코미디입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최근작인 [문라이즈 킹덤]은 사고로 가족을 잃고 위탁 가정을 전전하는 문제아 샘(자레드 길만)과 가족과의 소통에 실패한 외톨이 소녀 수지(카라 헤이워드)가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찾아 떠나는 모험을 담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세계에 융화되지 못한 그들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도망치려 하지만, 어른들의 집요한 추격은 샘과 수지의 숨통을 조여옵니다. [문라이즈 킹덤]에서 그러한 샘과 수지의 모험은 아름다운 동화처럼 그려져있습니다.
[로얄 테넌바움]과 [문라이즈 킹덤]의 공통점은 슬픈 코미디라는 이상한 장르입니다. 우리나라의 슬픈코미디처럼 초반엔 웃겼다가 후반에 감동 코드를 꺼내드는 것이 아닌,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경쾌한 톤을 유지하지만, 영화가 끝나고나면 관객 스스로 아련한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역시 그러합니다. 시대적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동유럽의 주브로브카라는 작은 나라입니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등에 업은 폭력이 당연시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싸돕니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마치 동화 속의 궁전처럼 아름답고 평화롭기만 합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지배인 구스타브는 살인 용의자로 몰렸습니다. 그는 체크포인트 19 감옥에 갇히지만, 낙천적인 그의 성격은 바뀌지 않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소처럼 행동하는 구스타브. 그 덕분에 루드비히(하비 케이틀) 일행과 탈옥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탈옥을 한 이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를 돕는 것은 어린 벨보이 제로뿐. 드미트리와 그에게 고용된 해결사 조플링의 추격이 시시각각 좁혀오지만 결코 구스타브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미스터리 스릴러의 아슬아슬한 스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유와 유머 그리고 아름다움을 잃지 않습니다. 구스타브가 탈옥을 하는 장면, 구스타브와 제로가 사건의 열쇠를 쥔 서지X를 만나기 위해 산 꼭대기 수도원에 가는 장면들은 마치 코미디, 판타지 영화를 보는 듯한 환상적인 화면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여운, 슬픔
그런 면에서 분명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경쾌한 코미디임과 동시에 아름다운 판타지 영화입니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가 항상 그러하듯이 영화를 보고나면 아련한 여운이 밀려 들어옵니다.
아름답기만 하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군인들에 의해 점령됩니다. 드미트리가 나치를 연상시키는 완장을 차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거들먹거리며 들어서는 장면으로 아름답던 시절이 이제는 지나갔음을 표현합니다.
제로를 향한 군인들의 폭력을 막아내려 하던 구스타브는 결국 죽음을 당합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구스타브는 제로에겐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고, 암울한 시대의 낙천적인 희망의 상징과도 같은 캐릭터였습니다. 하지만 그 마저도 결국 폭력에 희생되고 맙니다. 1930년대의 주브로브카의 희망은 그렇게 사라집니다. 그리고 구스타브의 죽음과 함께 주브로브카 역시 최후의 날을 맞이합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이제는 몰락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지키고 있는 무스타파(F. 머레이 아브라함)에게 젊은 소설가(주드 로)가 옛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한때는 제로라는 이름의 벨보이였지만, 이제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주인인 무스타파. 그는 구스타브가 남겨준 모든 유산을 포기하는 댓가로 낡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소유권을 유지합니다. 마치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노인의 마지막 미련처럼 말입니다.
영화가 끝나면 웨스 앤더슨 감독은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영감을 얻었다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영감을 준 슈테판 츠바이크는 과연 누구일까요?
슈테판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극작가, 전기 작가입니다. 부유한 직물 공장 대표인 아버지 모리츠 츠바이크와 유대계 은행가 가문 출신인 어머니 이다 브레타우어 사이에서 1881년 태어났으며, 20세에 시집 <은(銀)의 현(絃)>(1901)을 통하여 등단하였습니다.
191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그의 친구 로맹 롤랑과 함께 평화주의를 접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츠바이크는 인생 전반에 걸쳐서 평화주의를 주장하며 유럽의 통합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1934년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이 힘을 떨치자 이를 피해 아내 로테 알트만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떠나 런던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1940년 나치 군대가 프랑스를 거쳐 서유럽으로 빠르게 진군하자 츠바이크 부부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으로 옮겼고, 같은 해 8월 20일 다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위성 도시인 페트로폴리스로 옮겼습니다.
편협한 사고와 권위주의 그리고 나치즘에 의해 그의 우울증은 깊어져만 갔고, 인류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감을 느낀 츠바이크 부부는 결국 1942년 2월 23일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그들의 집에서 손을 잡고 죽은 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비극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럽의 비극과 맞닿아 있습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그러한 유럽과 슈테판 츠바이크의 비극을 통해 주브로브카와 구스타브의 비극을 완성해낸 것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고나서 느낀 깊은 여운의 정체입니다. 이래서 제가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잔인한 폭력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저물어 버린
아름다운 나날을 그리워하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감성이
내 마음 깊숙히 파고 들었다.
그것이 바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가진 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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