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스티브 맥퀸
주연 : 치웨텔 에지오프, 마이클 패스벤더, 루피타 니옹, 베네딕트 컴버배치
개봉 : 2014년 2월 27일
관람 : 2014년 3월 3일
등급 : 15세 관람가
2014년 아카데미는 이 영화를 선택했다.
한국시간으로 지난 3월 3일 오전 10시에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습니다. 매번 이야기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이라는 것이 미국내 영화제일 뿐입니다. 하지만 세계 영화계에 미국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기에 전세계 영화광들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일하는 틈틈이 수상작을 체크하였습니다.
[그래비티]가 기술부문을 거의 휩쓸다시피했고, [겨울왕국] 역시 예상대로 장편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을 가져갔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아메리칸 허슬]이 빈 손으로 돌아갔다는 점입니다. 저는 연기상 부문에서 어느정도 수상을 예상했는데, 크리스찬 베일, 에이미 아담스, 제니퍼 로렌스, 브래들리 쿠퍼까지 모두 고배를 마셨네요. (지못미 에이미 아담스)
그리고 결국 [노예 12년]이 남우조연상과 각색상에 이어 작품상까지 수상하며 올해의 승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노예 12년]의 수상은 어느정도 예상된 결과입니다. 아카데미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골든글로브에서 [노예 12년]이 드라마부문 작품상을 수상했기 때문입니다. (뮤지컬 코미디 부문 작품상은 [아메리칸 허슬]이었습니다.)
월요일밤, 저는 주저하지 않고 [노예 12년]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2시간이 훌쩍 넘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 덕분에 영화가 끝나는 시간은 자정이 넘었지만, 아카데미가 어떤 면을 보고 이 영화에 작품상을 수여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에 대한 궁금증으로 [노예 12년]을 보기 시작했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서는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제가 영화 속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영화를 보는 편이라 그런지 노예가 되어 부당한 대우를 받는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프)의 모습은 저를 괴롭게했습니다.
저는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땐 영화에 집중하느라 시계를 보지않습니다. 하지만 [노예 12년]을 보면서는 정확히 두번 시계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에드윈 엡스(마이클 패스벤더)의 폭력이 극에 달할 때 너무 괴로워 시계를 한번 들여다 보았지만 시간이 고작 1시간 밖에 흐르지 않아 좌절했었습니다. (이런 폭력을 1시간은 더 봐야 하다니...)
노섭이 떠돌이 캐나다인인 베스(브래드 피트)를 만나는 장면에서 두번째로 시계를 들여다 보았는데, 거의 2시간이 흐른 뒤여서 '이제 이 괴로움도 끝이 나는구나.'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노예 12년]은 제게 2시간동안 노예가 된 기분을 맛보게 하는 괴로운 영화였습니다.
자유인 노섭, 노예 플랫이 되다.
[노예 12년]의 배경은 1840년대 미국입니다. 노예 수입이 금지되자 미국 내 흑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주(州)의 흑인을 납치해서 남부의 노예주(州)로 팔아넘기는 범죄가 만연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솔로몬 노섭은 자유주인 뉴욕에서 아내와 두명의 아이와 함께 자유로운 삶을 누리던 음악가입니다. 하지만 어느날 그는 납치되어 노예주 중에서도 악명이 높은 루이지애나로 팔려갑니다. 그에게 솔로몬 노섭이라는 이름대신 노예의 이름인 플랫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집니다.
영화의 초반은 꽤 스피드합니다. 자유인 솔로몬 노섭의 삶은 아주 짧게 스쳐지나가 버립니다. 하지만 솔로몬 노섭이 플랫이 된 이후에는 전개가 갑자기 느려집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다짐한 노섭은 자신의 주인인 월리엄 포드(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눈에 들어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하지만 포드가 노섭을 악명높은 농장주인 에드윈 엡스에게 팔아버리며 노섭의 고난은 시작됩니다. 인간적인 포드와는 달리 흑인 노예를 물건 다루듯이 하는 엡스의 폭력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노예 12년]의 괴로움은 바로 그러한 엡스의 폭력에서 비롯됩니다.
[노예 12년]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노섭의 변화입니다. 처음 납치되었을 때 노섭은 모진 몽둥이질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노예가 아니라며 끝까지 버팁니다. 노예선을 타고 남부로 이동하면서는 다른 납치된 흑인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기도합니다.
하지만 그가 포드에게 팔려가고, 포드가 그를 인간적으로 대하자 그는 포드에게 노예로써 충실하며 얌전히 자유인이 될 수있는 기회를 엿보기 시작합니다. 마치 노예 신분에 적응이라도 한 것처럼...
노섭과 함께 노예로 팔려온 흑인 여성은 다른 곳으로 팔려간 아이들 때문에 하루 종일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한 그녀에게 노섭은 그만 징징거리라며 윽박지르기도 합니다. 아마 노섭은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적인 포드가 자신의 사정을 알게 되면 자신을 자유인의 신분으로 되돌려 줄 것이라고. 하지만 울음을 그치지 않던 흑인 여성은 그러한 노섭의 생각을 비웃습니다. "당신은 그저 우량 가축일 뿐이야."라며...
사실 그렇습니다. 포드는 노섭이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나왔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그는 노섭을 자유의 품에 되돌려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빚을 지었고, 노섭의 자유보다는 자신이 진 빚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포드는 "널 살리기 위해서야."라는 변명과 함께 노섭을 엡스에게 팔아버립니다. 포드는 흑인 여성의 말대로 조금 더 인간적인 노예 농장주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점차 노예가 되다.
술주정뱅이인 엡스에게 팔려간 노섭은 점차 자유인 노섭이 아닌 노예 플랫이 됩니다. [노예 12년]은 그러한 노섭의 변화를 2시간 15분 동안 아주 세밀하게 잡아낸 것입니다.
처음에 그는 메리 엡스(사라 폴슨)의 심부름을 위해 시내에 나왔다가 도망칠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점차 그는 자신이 당하는 폭력과 노예로서의 삶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포드의 집에서는 자신에게 부당한 폭력을 가하던 티비츠(폴 다노)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던 노섭이었지만 엡스의 집에서는 그저 순종적인 노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한 노섭의 변화 과정은 스티브 맥퀸 감독의 관객을 향한 질문과도 같습니다. '당신이 노섭과 같은 처지에 처했다면 당신은 과연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엡스에게 성노리개가 되고, 엡스의 부인인 메리에게 모진 학대를 받는 팻시(루피타 니옹)는 노섭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합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합니다. 과연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수있까요? 팻시처럼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용기가 있으신가요? (그녀 조차도 스스로 죽지는 못합니다.) 아마 대부분 그러한 용기가 없을 것입니다. 노섭처럼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작은 희망만을 안고 노예로서의 삶을 수긍하며 살아가겠죠.
제가 [노예 12년]을 보며 괴로웠던 것은 바로 그러한 점입니다. 영화를 보며 나도 모르게 노섭에게 감정이입을 해버렸고, 부당하게 노예가 되어버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저 역시 알 수 없었습니다.
하루 하루를 버티며 그저 살아남는 것. 노섭이 그러했듯이 저 역시 그러했을지도 모릅니다. 노섭이 갇힌 그곳은 비록 쇠창살이 없고, 족쇄도 없지만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지옥입니다. 언젠가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안고 버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은 영화를 보는 저를 섬뜩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노섭이 베스를 만나지 못했다면 노섭의 인생은 그렇게 작은 희망만을 품은채 노예로서 막을 내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에서 베스와 같은 구원자를 만나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실제 [노예 12년]은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서 자막을 통해 노예로 팔려 나갔다가 다시 자유인이 된 노섭의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고 전합니다.
노예로 팔려가서 부당한 폭력에 시달리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 스티브 맥퀸 감독은 제게 그러한 무기력함을 2시간 내내 맛보게 함으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부분을 관객 스스로 체험하도록 만듭니다. 그렇기에 [노예 12년]은 다른 상업영화처럼 즐기는 영화가 아닌 200여년전 흑인 노예들이 느꼈을 괴로움을 함께 느끼는 영화인 것입니다.
이제와서 노예를 이야기하는 이유?
처음 [노예 12년]을 보면서는 '200여년 전에 일어난 노예 제도를 이제와서 꺼낸 이유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는 노섭이 당하는 부당한 폭력이 너무 전형적이어서 영화 자체가 고전적으로만 느껴졌습니다.
이건 마치 학창시절 학교 숙제때문에 억지로 읽게된 해리엇 비처 스토우가 1852년에 쓴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200여년전, 그것도 머나먼 미국에서 벌어진 노예제도의 부당함을 구구절절하게 표현해놓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 노예 제도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던 저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지루함만을 느꼈었습니다.
하지만 [노예 12년]을 보다보면 스스로가 노예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같은 사람들끼리 어떻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성경을 읽으며 독실한 신자임을 자부하는 그들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예 제도는 우리의 삶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때 논란이 되었던 염전 노예 사건이 단적인 예일 것입니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장 내가 그러한 부당한 상황에 처했다고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외면해도 되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셈입니다.
아마 스티브 맥퀸 감독이 [노예 12년]을 통해 바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닐까요? 흑인 감독인 스티브 맥퀸 감독은 [노예 12년]의 실화가 200여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해서 쉽게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 미국의 노예제도는 1865년 국무장관 월리엄 헨리 스어드의 선포로 미국 영토내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켄터키주는 비준을 거부하다가 1976년이 되어서야 허가했고, 델라웨어주는 1901년까지 버텼으며, 미시시피주는 1995년에 비준했다고 합니다. [노예 12년]의 이야기는 200여년전의 옛날 일이 아닌 불과 몇 십년전의 미국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자신보다 육체적 능력, 정신적 능력, 경제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도 부당한 폭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고, 자유를 박탈하는 모든 행위가 [노예 12년]이 경고하는 노예제도인 셈입니다.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대상자가 될 수 있습니다. 스티브 맥퀸 감독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예 12년]을 본 후 한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잠을 이룬 후에도 쫓기는 악몽 속에서 헤매야했습니다. 2시간동안 노예가 되는 경험을 한 후유증이죠. 그런데 12년동안 노예가 되어야했던 솔로몬 노섭은 어떘을까요? 생각만해도 끔찍했습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겠다면 [노예 12년]을 보라.
2시간 동안 노예가 되는 경험을 하고나면
지금 내가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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