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4년 영화이야기

[관능의 법칙] - 불타 죽기 전에 불타오르자!

쭈니-1 2014. 2. 28. 17:34

 

 

감독 : 권칠인

주연 : 엄정화, 문소리, 조민수, 이재윤, 이성민, 이경영

개봉 : 2014년 2월 13일

관람 : 2014년 2월 27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남자혼자 여성영화를 보면 이상해?

 

몇 주동안 독감에 걸려서 끙끙 앓고 있는 구피. 구피에게 영화보러 가자는 말은 당연히 하지 못하고, 평일 밤에 구피를 홀로두고 혼자 영화를 보러가는 것 또한 눈치가 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보고 싶은 영화들은 계속 쌓여만 갑니다.

눈치 빠른 구피는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목요일 밤과 토요일 오전에 자유 시간을 줄테니 보고 싶은 영화를 실컷 보라고 합니다. 속으로 '야호'를 외치며 저는 목요일 밤에 한편, 토요일 오전에 두편의 영화를 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보고싶다고 생각되는 영화만 무려 다섯편. 개봉한지 1주일 이상이 지난 [관능의 법칙]과 [찌라시 : 위험한 소문], 그리고 이번주 개봉 신작인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 [노예 12년], [논스톱]이 제가 점찍어 놓은 영화들입니다. 당연히 영화를 볼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신작 영화보기에 투자할만도 한데 이상하게 [관능의 법칙]이 자꾸만 제 마음을 잡고 놓지 않습니다.

[관능의 법칙]은 지난 2월 22일, 블로그 친구들과의 정모 모임에서 보기로 예정되었던 영화입니다. 하지만 소연님이 신종플루로 나올 수가 없어서 어쩔 수없이 [관능의 법칙]의 예매를 취소해야 했습니다. 결국 저는 예매 인원을 변경해서 [관능의 법칙]을 다시 예매하려 시도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예매가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폼페이 : 최후의 날]로 영화를 변경해야했습니다. 이렇게 저와 한번 인연이 틀어진 영화의 경우는 그 이후에도 계속 저와 인연이 안닿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능의 법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목요일에 볼 영화를 고르면서 저는 자꾸만 [관능의 법칙]에 마음이 갔습니다. 다른 영화들은 다음 주중으로라도 볼 기회가 생기겠지만 [관능의 법칙]의 경우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극장에서 볼 기회가 영영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이 영화를 예매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혼자 보러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혼자 극장 가기는 이제 제 일상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관능의 법칙]의 영화 장르가 문제입니다. 이 영화는 중년 여성의 사랑과 성을 소재로한 영화로 여성 관객을 타깃으로 한 전형적인 여성 영화입니다.

만약 구피와 함께 [관능의 법칙]을 보러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저는 아내를 위해 함께 영화를 보러온 자상한 남편으로 비춰질 것입니다. 하지만 혼자 보러간다면?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변태 아저씨'로 보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던 별 상관이 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소심한 저는 예매 버튼을 누르는 그 순간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변태 아저씨'라며 수근댄다고 해도 [관능의 법칙]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1995년 [사랑하기 좋은 날]을 통해 제 마음을 사로 잡은 후 [싱글즈], [뜨거운 것이 좋아], [원더풀 라디오]등 여성 위주의 영화를 만들며 제게 재미를 안겨준 권칠인 감독. 그리고 믿음직한 여배우 트로이카인 엄정화, 문소리, 조민수 주연. 그것만으로도 [관능의 법칙]은 제가 쪽팔림을 무릅쓰고 봐야할 이유로 충분했습니다.

 

 

40대의 로맨틱 코미디

 

사실 [관능의 법칙]은 구피도 관심을 가졌던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예고편을 본 이후 재미있겠다며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구피. 아마도 구피는 [관능의 법칙]이 저희 부부 세대인 40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기에 관심을 가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자꾸만 [관능의 법칙]에 마음이 갔던 이유는 우리 영화에서 흔치 않은 40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40대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우리 세대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저는 더욱 마음이 갔습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극장 구석에 앉아 낄낄거리며 다른 사람들 눈치보지 않고 맘껏 영화를 즐겼습니다.

[관능의 법칙]은 세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대학시절 같은 기숙사를 쓴 인연을 현재까지 잇고 있는 이들은 40대에 접어들며 하나씩의 사랑에 대한 고민을 갖게 됩니다. 케이블 TV의 예능프로 PD인 신혜(엄정화)는 몸주고 마음도 주고 사랑도 줬지만, 결국 젊은 20대 부하직원과 결혼해버린 이국장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있습니다. 그런데 왠걸... 싱싱한 20대 남자 현승(이재윤)이 들이댑니다.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하며 일주일에 세번은 남편과 섹스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미연(문소리). 그런데 그녀의 남편인 재호(이성민)는 비아그라를 먹으며 힘겹게 미연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과년한 딸 수정(전혜진)과 함께 사는 돌싱녀 해영(조민수)은 목수인 이웃 남자 성재(이경영)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유일한 방해꾼인 수정마저 시집보내 치워버린 해영. 그런데 성재는 해영과 결혼할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성재는 해영에게 말합니다. "우린 결혼을 한번 해봤잖아요. 저는 이대로가 좋아요. 결혼은 생활의 방식이지 사랑의 방식은 아닙니다."

 

[관능의 법칙]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법칙을 따라갑니다. 각각의 사랑을 하던 신혜, 미연, 해영은 각각 다른 위기를 맞이하고 또 각각의 해피엔딩으로 끝맺음을 합니다. 

신혜는 자신이 도와준 기획안으로 PD로 입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는 현승을 바라보며 마음이 미묘해집니다. 혹시 현승은 성공을 위해 나를 이용한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과 함께 말입니다.

미연은 낚시를 핑계로 재호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는 현장을 잡아냅니다. 그런데 재호는 미안하다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네가 나를 얼마나 숨막히게 하는지 알아?"라며 버럭 화를 냅니다. 해영은 병원에서 대장암에 걸렸다는 소리를 듣고, 암으로 아내를 떠나보내며 힘들어 했던 성재에게 더이상 짐이 될 수 없다며 이별을 선언합니다.

서로 티격태격하다 결국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하다 위기를 맞이하고, 결국 그 위기를 딛고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전개입니다. 하지만 [관능의 법칙]은 티격태격하다가 사랑을 하게 되는 첫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사랑을 하다가 위기를 맞이하고, 그 위기를 딛고 사랑을 완성하는 해피엔딩의 구조로 영화를 진행해나갑니다. 비록 첫 부분이 생략되었지만 로맨틱 코미디의 유쾌함은 여전합니다.

그렇기에 [관능의 법칙]은 20대 관객이 봐도 충분히 재미있을 영화입니다. 로맨틱 코미디는 남녀노소를 구분짓지 않는 전세계가 사랑하는 영화 장르니까요. 하지만 여기에 40대 여성들의 솔직한 이야기가 끼어듭니다. 10대의 수줍은 사랑, 20대의 아름다운 사랑, 30대의 성숙한 사랑과는 달리 [관능의 법칙]에서 40대의 사랑은 내숭 따위 필요없다며 솔직한 섹스 이야기를 맘껏 펼쳐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통쾌했고, 더 재미있었습니다.

 

 

40대 남성이 바라본 40대 여성의 사랑 이야기

 

특히 저는 미연과 재호의 이야기가 가장 많이 재미있었습니다. 아마도 40대 부부의 이야기라서 공감되는 부분 이 많았나봅니다. 물론 일주일에 세번의 부부관계를 요구하는 미연과 그러한 미연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비아그라를 먹으며 애쓰는 재호의 모습은 전혀 공감되지 않았지만(ㅋㅋ) 오랜 세월을 함께 산 40대 부부의 소통 부재는 충분히 공감되었습니다.

재호는 미연과 대화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미연은 대화보다는 부부관계를 중시했고, 그러한 상황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겉으로는 좋았지만 속으로는 점점 균열이 되기 시작한 것이죠. 낚시가 취미인 재호가 불륜녀와 낚시를 함께 가는 현장이 들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저는 부부가 취미생활을 함께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취미생활이 같다는 것은 그만큼 대화할 시간, 대화할 소재가 많아진다는 것을 뜻하죠. 미연은 "섹스하면서 이야기하면 돼."라며 재호의 말을 무시하지만, 함께 오래 살면 살수록 대화는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바람을 핀 재호를 변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발기부전에 걸린 재호에게 민간 요법이라며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미연 역시 부부간의 소통 부재에서 책임이 있는 셈입니다.

지금 부부 사이가 안좋으신 분이라면 대화를 시도하세요. "대화해봤자 말이 안통해."라는 변명은 제대로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기에 나오는 비겁한 변명일 뿐입니다. 내 이야기보다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를 한 후, 내 이야기를 들려 준다면 이 세상에 말이 안통하는 부부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찌되었건 한때 사랑했기에 결혼한 사이니까요.

 

미연과 재호의 이야기가 제게 공감을 주었다면 신혜와 현승의 이야기는 제게 부끄러움을 안겨줬습니다. 우리는 나이든 남자가 나이어린 여자와 연애를 하면 능력이 있다며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나이든 여자가 나이어린 남자와 연애를 하면 뒤에서 수근거립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 접근한 것이라며 결국 나이든 여자만 이용당할 것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신혜는 현승과 사랑을 시작하며 그러한 사회적 편견과 싸워야 했습니다. 영화를 보며 왜 신혜가 현승의 순수한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안타까웠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저 역시 신혜와 현승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 방해꾼이기도 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젊었을 때보다 더 신경쓰이기 마련입니다. 제가 [관능의 법칙]을 보러 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썼듯이... 사랑보다 가족, 그리고 지금까지 어렵게 쌓아올린 사회적 위치가 더 소중하기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기도 하죠. 그러한 사정을 알기에 저는 마음 속으로 신혜의 사랑을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해영과 성재의 사랑입니다. "더 늙기 전에 불타는 사랑을 하고 싶었는데, 화장터에서 불타 죽게 생겼네."라는 해영의 대사는 관객들에게 웃음을 안겨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이가 들면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건강이라는 최악의 적을 만난 해영의 한스러운 한탄이었기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 역시 40대가 되며 하루가 다르게 몸이 무거워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구피는 독감에 걸린지 한달이 다되어 가지만 아무리 병원에 다녀도 쉽게 낫지 않습니다. 이게 전부 나이가 들어서겠죠.

 

 

불타 죽기 전에 불타오르자!

 

[관능의 법칙]은 40대인 제게 마음에 와닿는 대사들을 한가득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해영이 대장암 진단을 받은 후 "점쟁이가 나는 요절할 것이라 했어."라고 하자 신혜는 우리가 지금 죽어도 요절이 아니라며 위로아닌 위로를 합니다.

해영이 "우리는 오르가즘보다 암이 더 어울리는 나이인가봐."라고 푸념하는 것은 40대의 섹스라는 [관능의 법칙]의 주제와 40대의 건강이라는 한계를 함께 담은 명대사이며, 퍽치기를 당한 미연에게 "거봐, 우리 나이에 누가 따라오면 퍽치기라니까."라며 놀리는 대사는 저 역시도 슬프게도 심하게 공감(T-T)되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인상깊은 대사는 "불타 죽기 전에 불타오르자!"라는 해영의 마지막 외침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40대가 넘어가며 이제는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욱 적게 남아 있습니다. 제가 건강하게 80세까지 산다고 해도 40대가 넘어간 이상 저는 인생의 꼭지점에서 꺾어져 내리막길을 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화장터에서 불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인생의 열정을 활활 불타오르게 하는 것 또한 멋진 일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늙으면 열정도 사라진다고... 하지만 40대가 되었어도 사랑과 섹스에 더욱 과감한 열정을 불태우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니 늙었다고 열정이 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자신감이 듭니다. 

 

[관능의 법칙]이 끝나고  극장 안의 불이 켜졌습니다. 어두웠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영화 속에 푹 빠졌었던 저는 극장 안의 불이 켜지자 또다시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극장 안은 확실히 여성 관객이 많았습니다. 혼자 온 여성에서부터 여럿이서 같이 온 여성들, 그리고 남녀 커플이 함께 온 관객들도 여럿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남성 혼자, 아니 남성들끼리 온 관객들조차 없었습니다. 아마 리암 니슨의 액션이 돋보인다는 [논스톱]은 남성끼리 온 관객들도 여럿 볼 수 있었겠죠.

솔직히 소심한 저는 극장 밖을 나서며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하지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라고...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맘껏 보면서 이렇게 내 방식대로 불타 오르고 있는 것이라고...

집에 도착해서 독감 때문에 비실거리고 있는 구피를 보니 나 혼자 불타오른 것이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구피도 독감을 훌훌 털어버리고 저와 함께 활활 불타오를 것입니다. 40대. 이제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어려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나이이지만 우리의 열정 만큼은 20대 못지 않습니다. "나도 불타 죽기 전에 불타오를테닷!"이라고 다짐하며 하루 하루를 열정적으로, 그리고 소중히 살아야겠습니다.  

 

언젠가는 50대의 사랑을 다룬 영화도 나오겠지?

50대가 된 나는 그 영화를 보며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