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05년 영화이야기

[아무도 모른다] - 정말 아무도 몰랐던걸까?

쭈니-1 2009. 12. 8. 18:03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주연 : 야기라 유야, 기타우라 아유, 키무라 히에이, 시미즈 모토코
개봉 : 2005년 4월 1일
관람 : 2005년 3월 29일

2004년 깐느 영화제에서 역대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낯설은 일본 영화는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과연 어떤 영화이길래 세계 영화제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는 깐느에서 쟁쟁한 배우들을 제치고 14살의 어린 소년 야기라 유야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것일까? 워낙 단순한 까닭에 골치아픈 영화제 수상작은 왠만하면 보지 않는 저로써도 그런 이유로 [아무도 모른다]는 은근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별다른 지식없이 단지 어린 배우들의 눈물 연기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저는 영화가 진행되며 점점 오싹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무도 모른다]의 포스터에는 '어른들은 모르는 도시의 슬픈 동화'라고 쓰여있건만 이 영화는 동화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영화였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의 소재가 된 일본에서 실제 벌어진 사건의 진상을 알게되면 차라리 영화의 제목처럼 '차라리 모르고 싶다'라는 생각이들 정도죠. 저는 이 영화를 본 후 꽤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마지막에 이런 질문이 떠오르더군요. '정말 아무도 몰랐던 걸까?'


 



1. 그들은 알고 있었다. 단지 모르는척 했을 뿐이다.

제가 결혼을 하기위해 셋방을 구하러 다니던 2년전. 집주인은 저와 제 와이프에게 어린 아이들이 없는지 먼저 묻곤 했습니다. 아이들이 있으면 냄새도 나고, 시끄럽고, 집이 망가진다는 이유였습니다. 그 순간 저는 우리 아기가 태어난후 집주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야할 내 모습이 저절로 그려지더군요. 순간 너무나도 서글퍼졌습니다. 내 아기가 주변사람들의 축복속에서 크지 못하고 갖난아기때부터 남의 눈치를 보며 커야한다는 사실이... 여기저기에서 '아기를 낳자'며 캠페인을 벌어고 있지만 실제 우리 사회는 아주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아기를 낳지 말라'며 강요하고 있었던 겁니다.(그래서 홧김에 집을 아예 사버렸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 허리가 휘고 있지만... ^^;)
[아무도 모른다]를 보면 일본 역시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넷이나 된다는 이유로 번번히 셋방에서 쫓겨나는 야키라(야기라 유야) 가족. 젊은 엄마는 아파트에서 쫓겨나지 않기위해 집주인에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야키라만 있다고 속이고 다른 아이들은 짐속에 숨어서 집안에 들어옵니다.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아 실제로 존재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아이들은 그렇게 집안에 갇혀 혹시라도 이웃에게 그 존재가 들킬까봐 조바심을 내며 하루하루를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발생합니다. 어린 네남매의 든든한 울타리였던 엄마가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린 겁니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살아가는 것에 익숙했던 아이들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한채 그렇게 방치됩니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영화는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아이들의 일상을 잡아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그렇게 방치되었어도 무관심한 일본 사회를 안타깝게 바라만 봅니다. 실제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던 사건에서 이웃 주민들은 전혀 아이들의 존재를 몰랐다고 진술했다는 군요. 하지만 과연 그들은 몰랐던 걸까요? 혹시 알고 있었지만 참견하기 싫어서 모르는 척하지는 않았을까요? 영화를 보며 아이의 엄마에게 필요한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며 친절한 미소를 짓던 이웃 노부부의 표정이 생각났습니다. '아이는 없죠? 아이들이 있으면 냄새나고 시끄러워서...'라며 사람좋은 웃음을 짓던 2년전 그 집주인의 모습처럼... 아무도 모른다고요? 아뇨 모두들 모르는척 할뿐입니다.


 



2. 그녀는 정말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 벌어지고 일본 사회가 떠들썩하게 충격에 휩싸였을때 모든 비난의 화살은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간 아이의 엄마에게 쏠렸습니다. 어떻게 어린 아이들을 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되찾겠다며 새출발을 할 수 있냐는 것이죠.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은 아이들을 버린 그 철없는 엄마탓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비정한 엄마를 욕하며 흥분했던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시키고 싶었던 겁니다. 이 사건의 원인은 엄마가 아이들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그리고 사람들이, 이 불우한 엄마와 아이들을 모르는척 했기 때문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영화는 엄마에게 모든 비난의 화살을 전가시키지 않은채 매우 객관적인 자세로 사건을 조명합니다.
사랑을 믿었지만 남자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림당했던 그녀. 그리고 그 댓가로 각기 아버지가 다른 네명의 아이들을 떠맡을 수 밖에 없었던 그녀. 그러면서도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도 못했고, 사랑에 대한 감정도 버릴수 없었던 그녀. 사랑하는 아이들을 출생신고조차 할 수 없었으며 학교에 보내달라는 아이들의 성화에 '학교에 가면 아빠없는 자식이라고 놀림만 당한다'며 '지금 이대로도 행복하잖아'라고 웃었던 그녀. 자면서 한줄기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큰 희생자는 아이들이 아니라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 행복해지면 안되니?'라며 야키라를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과연 모든 비난의 화살이 그녀에게 쏟아지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스스로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한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어느정도 포기하고 아이들을 위해서 희생해야 된다는 것을 뜻하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부모의 손길과 사랑을 원합니다.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선 부모들은 돈을 벌어야하고, 피곤하지만 아이들과 놀아줘야하며,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쳐다봐줘야 합니다.
어쩌면 [아무도 모른다]의 그녀 역시도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했는지도 모릅니다. 낙태수술을 받지도 않았다는 것은 아이들을 어떻게든 키워보겠다는 의지를 지녔음을 의미하며, 아이들을 고아원에 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가정을 이루어 나갔다는 사실은 결과가 어찌되었건 그녀는 최소한의 노력을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며, 나이에 비해서 성숙한 야키라에게 이 모든 짐을 맡겨도 될지 모른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버렸던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녀도 그랬겠죠. 비록 그 행복을 위해서 아이들을 버리는 천인공노할 짓을 벌였지만... 행복해지고 싶다는 그녀의 아이같은 천진한 미소가 자꾸 생각나네요. 어쩌면 그녀는 너무 커다란 짐을 짊어진 미숙한 어른일 뿐인데... 그 짐을 거들어줄 생각은 않고 비난만 하는 사회의 이중적인 면모가 오히려 저는 더욱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3.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엄마의 가출로 빈집에 남겨진 네명의 아이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이 살기위해 해야할 일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이웃에게 그 존재가 알려져서 바깥 출입을 할 수 있었던 첫째인 야키라는 생존을 위해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고, 피아노를 사고 싶었던 둘째 교코(기타우라 아유)는 집에서 엄마 노릇을 하며 동생들을 돌봅니다. 말썽꾸러기인 셋째 시게루(키무라 히에이)는 밖에 나가서 맘껏 뛰어놀고 싶은 것을 참고 집안에 갇혀있으며, 막내 유키(시미즈 모토코)는 그 좋아하는 아폴로 초코렛을 아껴 먹을 줄 아는 슬기로움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엄마가 세워놓은 규칙들을 엄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착실하게 지키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 영화는 자극적인 소재를 모티브로 했으면서도 결코 영화를 자극적으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일상은 한때 행복하다고 느낄 정도로 오히려 평온합니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태풍의 눈처럼 아슬아슬하여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오히려 조바심나게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그렇게 서서히 무너집니다. 나이에 비해서 성숙했던 야키라는 또래 아이들처럼 뛰어놀고 싶은 욕망을 참지못하고 방황합니다. 그 역시도 엄마가 그랬던것처럼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라는 욕망에 빠져버렸으며 자신에게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었던 동생들을 놓아버리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그나마 엄마를 대신하여 아이들의 든든한 울타리였던 야키라가 서서히 무너지자 교코, 시게루, 유키 역시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전기도, 물도 끊긴 집에서 축 늘어진채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못한 그들의 눈빛은 관객들의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습니다. 마치 '당신이 모르는척 했던 댓가로 이 아이들이 치뤄야하는 비극을 느껴보라'며...
그렇게 이 영화는 처참한 비극으로 치닫지만 여전히 영화는 담담하기만 합니다. 그 흔한 슬픈 멜로디조차도 최대한 자제하고(아마도 이 영화처럼 음악을 자제한 영화도 드물겁니다.) 마지막 비극조차도 마치 아이들의 다른 일상처럼 보일뿐입니다. 그 비극앞에서 야키라의 그 담담한 표정을 보며 느낍니다.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엄마에게 버림받고 사회의 무관심속에 방치되어야만 했던 자신들의 일상이 결국 이런 비극을 몰고 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영화의 초반 초롱초롱하던 그 믿음직하던 눈빛이 서서히 흐려지던 그가 비극의 앞에서 다시 힘을 찾습니다. 자신이 희망의 끈을 놓으면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모르는척 무관심한 사회속에서 자신과 동생들이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2004년 깐느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이었던 쿠엔틴 타란티노는 '영화제 기간동안 수많은 영화를 봤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야기라 유아의 표정뿐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과연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4. 때론 모르는 것이 약이다.

[네버랜드를 찾아서]를 본 후 제임스 배리와 아이들의 실제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이리저리 검색을 하다가 그들의 실제 이야기가 영화처럼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제 글에 써넣었다가 '영화에 대한 꿈과 상상이 깨졌다'며 어떤 분의 원망을 들었습니다.
[아무도 모른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사실에 저는 또다시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았고 그 사건의 끔찍한 실상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느낀 것은 '차라리 모르는 편이 좋았을 뻔했다'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엽기적인 사건을 상당히 미화시켰습니다. 도대체 이 영화가 미화된 것이라면 실제의 사건을 어땠을까라는 궁금증이 들만도 하지만 제가 충고하고 싶은 것은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겁니다. 실제 사건을 알고난 후엔 야키라의 그 마지막 눈빛이 무서워 질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어린 아이였기에, 세상의 무관심속에 단절된채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기에 벌인 그의 행위는 비난보다는 감싸안아야할 사회의 상처겠지만 영화와는 너무나도 달라 당혹스럽기만 했습니다.
아무도 모른다지만 어른들은 모르는척 했고, 아이들은 알고 있었던 그 날의 그 사건. 멀고도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이기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치부하기엔 우리 사회도 결코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냥 이 영화만으로 우리나라에선 결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어떨까요? 실제 사건이 들춰지는 그 순간 이 영화는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봐야할 사회 드라마가 아닌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공포 영화가 되어버립니다. 이럴땐 정말로 모르는 것이 약이죠.


 





IP Address : 211.176.48.67 
Lachesis
무관심... 그것이야 말로...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한 것이 아닐까 하네요...

 2005/04/04   
쭈니 네. 맞습니다. 증오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죠. 현대사회의 가장 큰 병폐가 아닐까요?  2005/04/04   
허클베리
제가 쭈니님의 홈페이지를 찾아오게 한 영화리뷰!!
바로 '아무도 모른다'
이거 꼭 볼 겁니다.
남자주인공, 뭔가 꿰뚫어보는 눈빛과 모호한 부드러움을 동시에 지닌 것 같아요.
 2006/06/09   
허클베리
덧붙여,
우리가 사는 사회, 우리가 만들어가는 사회가 얼마나 오싹할 정도로 냉랭한지 느껴지는 리뷰였습니다.
 2006/06/09   
쭈니 감사합니다.
뒤늦게 발견한 덧글이지만 괜시리 뿌듯...
그나저나 덧글을 쓰신지 1년이 지나셨으니 보셨겠죠? ^^
 2007/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