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지운
주연 : 이병헌, 김영철, 신민아, 황정민
개봉 : 2005년 4월 1일
관람 : 2005년 3월 25일
4월 1일은 영화사상 유례가 없었던 우리 영화의 대접전이 벌어질 전망입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혜성같이 나타나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 대작전]을 거치며 점차 그 능력을 키워나가고 있는 류승완 감독의 범상치않은 휴먼 드라마 [주먹이 운다]와 [조용한 가족], [반칙왕], [장화, 홍련]등 공포와 코미디 장르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하던 김지운 감독이 느와르 액션이라는 우리 영화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색다른 장르를 개척해낸 [달콤한 인생]이 바로 소위 만우절 대첩의 주인공입니다.
[주먹이 운다]와 [달콤한 인생]이 이처럼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가벼운 코미디 영화 일색인 우리 영화계에 속깊은 휴먼 드라마와 묵직한 느와르 액션으로 장르의 다변화를 시도했다는 점과 우리 영화계를 이끌어나갈 류승완, 김지운이라는 젊은 두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올드보이]를 통해 우리나라 최고의 연기파 배우로 강한 인상을 남긴 최민식과 한류 열풍의 주인공 이병헌이 맞붙었다는 점등 그 이유는 많습니다.
저 역시 이 두 영화를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장르의 영화인데다가 영화적인 색깔이 뚜렷한 감독에 의해서 만들어진 만큼 어떤 영화가 더 좋다는 식의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지만, [마파도], [잠복근무]등 여전히 코미디 영화가 극장가를 장악하고 있는 요즘 [주먹이 운다]와 [달콤한 인생]의 맞대결은 분명 우리 영화에 좋은 활력소가 될것입니다.
며칠전 [주먹이 운다]를 봤던 저는 비로서 [달콤한 인생]을 보며 만우절 대첩의 두 주인공을 섭렵하였습니다. 우리의 옛말에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번 만우절 대첩의 두 주인공에게는 그런 속담이 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먹이 운다]가 진한 감동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희망을 제게 안겨주더니만, [달콤한 인생]은 제대로된 느와르 액션의 진수를 보여주며 순수와 잔인이라는 야누스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120분동안 절 영화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했습니다. 우리 영화가 어느새 이처럼 질적으로 성장을 하다니 관객의 입장으로써 흐뭇하기만 합니다.
1. 이병헌... 순수와 광기, 두가지의 눈동자
[달콤한 인생]은 제게 야누스와도 같은 영화였습니다. 김지운 감독의 연출력도 그렇고, 영화의 매력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병헌의 연기야말로 순수와 광기를 동시에 지닌 완벽한 야누스적인 매력을 물씬 풍겼습니다.
이병헌, 그가 [내일은 사랑]이라는 TV 청춘 드라마로 스타가 될때만해도 그는 전도유망한 잘생긴 배우였습니다. 그런 그가 [런 어웨이]로 활동무대를 영화계로 옮기고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 [그들만의 세상], [지상만가]등의 영화에 연달아 출연했을때 이상하게도 관객들은 그를 외면했습니다. 그의 매력은 여전히 [아스팔트 사나이], [백야 3.98], [해피 투게더]등 TV 드라마에선 꾸준히 인기를 얻었지만 영화에서만은 처참한 흥행을 겪어야 했습니다. [내 마음의 풍금]으로 흥행에 성공하며 비로서 흥행배우로 발돋음했지만 솔직히 [내 마음의 풍금]은 이병헌의 영화라기 보다는 전도연의 영화였습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공동경비구역 JSA]입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송강호, 신하균과 함께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웃고 떠들던 그의 모습은 남북한의 대치상황속에 벌어진 총기살인사건이라는 영화속의 팽팽한 긴장감과는 별도로 그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결국 그의 매력은 바로 순수함이었으며 이병헌은 그런 자신의 색깔을 찾은 겁니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의 이병헌의 연기는 그러한 그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 그가 [중독]에서는 순수함에 광기어린 집착을 추가보여주며 진정한 연기파 배우로 성장합니다. [달콤한 인생]은 바로 그런 이병헌의 매력이 정점에 오른 영화입니다.
[달콤한 인생]의 선우(이병헌)는 영화의 제목 그대로 달콤한 인생을 즐기던 매력남입니다. 조직의 2인자인 그는 보스인 강사장(김영철)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으며, 세상 그 무엇하나 부러울것이 없는 자신만의 세상에서 달콤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그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것은 바로 희수(신민아)라는 보스의 젊은 애인입니다. 자신만의 세상을 헤치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희수를 처치해야만 하지만 선우는 알수없는 감정으로 인하여 결국 희수를 놓아줍니다. 그리고 그 댓가로 그의 달콤한 인생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여기에서 이병헌의 연기는 사랑에 빠진 [번지점프를 하다]의 인우의 모습입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사랑의 감정. 그 새로운 감정속에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당황해하는 그 미숙한 모습은 이병헌의 순수함과 함께 효과적으로 영화속에 투영됩니다. 그러나 조직의 배신으로 죽음의 문턱에 선 그의 눈동자는 갑자기 변합니다. 그 선한 순수의 눈동자는 갑자기 악만 남아버린 광기의 눈동자가 되어 버립니다. 마치 사랑을 얻기위해 자신의 인생을 버린 [중독]의 대진처럼...
자신에게는 아버지와도 같았던 강사장 앞에서 '도대체 왜?'를 외치던 선우의 모습은 영락없이 순수한 어린 아이의 투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총알이 빗발치는 잔인한 현장속에서 그는 다시 악귀로 돌변합니다. 한때 잘생긴 배우에 불과했던 그가 몇년간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룩해낸 그 야누스적인 매력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네요.
2. 김지운... 그는 진정 야누스적인 감독이다.
이병헌이 야누스적인 연기로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들었다면 김지운 감독의 야누스적인 연출력은 [달콤한 인생]을 진정한 느와르 액션으로 완성시켰습니다.
김지운 감독이 [조용한 가족]이라는 코믹 잔혹극으로 데뷔했을때만해도 저는 그저 재기발랄한 감독 한명이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두번째 영화인 [반칙왕]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김지운 감독이 코미디에 능하고만 믿었습니다.(코미디에 능한 감독은 우리나라엔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장화, 홍련]으로 김지운 감독은 그런 제 생각을 완벽하게 뒤집어 엎었습니다. 그는 코미디 장르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장르에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을 완벽하게 발휘할줄 아는 감독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장르의 영화속에서도 김지운 감독의 영화들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순수함입니다.
그의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은 비록 잔혹극을 표방했지만 그 이면에는 순수함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 잔혹하게만 일이 풀려가는 억세게 운도 없는 가족들을 중심으로 김지운 감독은 순수함(혹은 순진함)이 무서움으로 돌변하는 그 과정을 코믹하게 보여줬습니다. [반칙왕]은 순수함을 정면으로 내세운 영화입니다. 이젠 잊혀진 스포츠인 레슬링을 갑자기 스크린 속으로 불러들여놓고 그 속에 순수한 소시민을 밀어 넣은 후 관객들을 순수의 쾌감 속으로 초대했었습니다.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이 순수함을 코미디로 버무린 영화라면, [장화, 홍련]은 코믹 요소를 쫘악 빼고 순수함과 공포로 승부를 건 영화였습니다. 어느덧 스타급 배우가 되어버린 문근영과 임수정의 그 순수한 이미지는 마치 [조용한 가족]이 그랬던것처럼 순수함이 서서히 공포로 돌변하는 과정을 아주 섬뜩하게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 [달콤한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는 느와르 액션 영화입니다. 우리에겐 홍콩 느와르 영화들로 친숙한 이 장르는 사나이들의 세계, 비정한 배신, 아픈 사랑과 안타까운 우정, 그리고 총과 죽음, 비극으로 대변되는 장르입니다. 김지운 감독은 바로 이러한 느와르의 속성을 고소란히 [달콤한 인생]으로 끌어들입니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이 느와르 영화와 어울리지 않은 한가지 요소도 가지고 왔으니 그것이 바로 순수함입니다.
선우가 희수를 진정으로 뜨겁게 사랑했다면 어땠을까요? 강사장에게 배신당한 선우가 치밀한 준비끝에 복수를 실행에 옮겼으면 어땠을까요? 만약 전자의 경우였다면 영락없는 홍콩 느와르 영화의 의미없는 베끼기가 되었을 것이며, 후자의 경우는 [올드보이]로 성공한 박찬욱 감독의 따라하기로 전락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은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고 느와르 액션이라는 장르에서도 자신만의 색깔인 순수함을 고스란히 지켜냅니다.
선우가 강사장에게 배신을 당한 것은 바로 그 순수함 때문입니다. 그가 희수와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획득할 욕심을 부렸다면 그는 그렇게 어이없이 당하지는 않았을겁니다. 선우가 허무하게 죽음을 당하는 이유 역시 순수함 때문입니다. 그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복수를 실행했다면 그런 결과는 오지 않았을겁니다. 그러나 선우라는 캐릭터는 그런 계산을 하기엔 너무 순수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도 깨닫지 못할 뿐더러 복수를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강사장에게 달려듭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이 영화를 두고 '스토리가 빈약하다'라고 하지만 전 김지운 감독만의 그 매력이 너무 좋았습니다. 느와르 영화에 순수함이라니... 그 믿을 수 없는 양면성을 그가 해낸겁니다.
3. [달콤한 인생]... 이 진정한 야누스적 매력의 달콤함이여!
김지운 감독의 야누스적인 연출력과 이병헌의 야누스적인 연기력이 만들어낸 영화이니 만큼 [달콤한 인생]은 순수함과 잔혹함을 동시에 지닌 야누스적인 매력의 영화입니다.
[달콤한 인생]은 느와르 영화이 전형적인 매력인 남성다움을 강조합니다. 이병헌, 김영철, 황정민 등 자신의 색깔이 확연한 남성 배우들의 맹활약은 [달콤한 인생]의 남성다움을 대변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강한 남성다움은 희수라는 약한 여성에 의해서 무너집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이 가냘픈 여성 캐릭터는 견고하게만 보였던 선우의 달콤한 인생을 무너뜨리고, 선우와 강사장의 강한 유대 관계를 깨뜨리며, 결국 강사장의 카리스마마저도 산산조각내버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희수가 영화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영화속에 등장하는 것은 단 몇장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몇장면에 의해서 이 영화의 남성다움은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럴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순수함입니다. 조직의 카리스마 넘치는 보스였던 강사장은 희수의 이야기를 선우에게 해주며 수줍게 웃습니다. 그는 사랑에만큼은 너무 순수했고 서툴렀던 겁니다. 그런 순수함은 극단적인 질투심으로 변조되고 결국 자신의 오른팔인 선우를 배신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과연 희수는 강사장을 사랑했을까요? 아니면 선우를 사랑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녀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으며 이용했을 뿐입니다. 결국 이 영화에서 순수하지 않았던 인물은 바로 희수입니다. 그녀야말로 진정한 팜므파탈이죠. 직접적으로 남자들을 파멸에 몰아넣지는 않지만 남자들의 순수한 사랑을 이용해서 그들을 파멸로 이끌어낸거죠.
선우의 복수의 막바지에서 그가 희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에 대한 회상에 잠기는 장면은 이 영화의 순수함이 절정에 치닫습니다. 시체가 난무하고 피가 홍건하며 선우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그 순간에 비로서 희수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모습을 회상합니다. 어떤 지하철 무료 신문에선 그 장면이 생뚱맞다라고 표현했지만 저는 이 영화의 순수함을 잘 표현해준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이제 막 깨닫기 시작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흠뻑 취한 선우의 모습은 자신의 세계속에 갇혀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그 속에 숨은채 달콤한 인생을 꿈꾸던 그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그는 난생처음 사랑을 깨닫고 그녀의 목소리에 잠시 잠깁니다. 바로 그 짧은 순간이 선우의 진정한 달콤한 인생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비록 에릭의 등장으로 후반부가 조금 어이없어지기는 했지만, 이병헌의 순수와 광기를 동시에 지닌 눈동자가 좋았으며, 느와르 장르에 어울리지 않는 순수함을 지켜낸 김지운 감독의 연출력이 좋았고, 잔인한 총격전 속에서도 사랑이라는 순수함을 느끼는 영화의 이중적인 면모가 좋았습니다. 이젠 4월 1일이 기다려지네요. [주먹이 운다]와 [달콤한 인생], 이 멋진 우리 영화를 맞이하는 우리 관객들의 놀라운 환호를 느끼고 싶습니다. 그리고 [주먹이 운다]와 [달콤한 인생] 모두 진정한 승자가 되어 우리 영화의 역사에 길이 남겨지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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