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류승완
주연 : 최민식, 류승범
개봉 : 2005년 4월 1일
관람 : 2005년 3월 16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평단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류승완 감독. 그는 그 이후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 대작전]을 통해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액션 감독으로 발돋음하고 있습니다. 류승완 감독의 무한한 가능성은 그의 젊음과 패기에서 비롯됩니다. 이제겨우 30대 초반인 그는 앞으로 연륜이 쌓일수록 더욱 멋진 영화를 만들 가능성이 농후하며, 그의 젊음 패기는 아무도 만들 엄두를 못낼 영화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값싼 코미디 영화가 판을 치는 우리 영화계에 묵직한 액션 영화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한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상업 영화 감독이면서 아직 이렇다할 흥행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경우는 당시 거의 무명과도 같은 배우들만이 모여 만든 영화였기에 어쩌면 흥행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고는 하지만, 전도연, 이혜영, 정재영이 출연했던 [피도 눈물도 없이], 류승범, 윤소이, 안성기가 주연을 맡았던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미지근한 흥행 성적은 그의 명성에 비춰보았을때 분명 초라하기만 합니다.
여기에 류승완 감독에 대해서 한가지 터져나오는 불만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액션에만 능할뿐 스토리에는 취약하다는 겁니다. 분명 멋진 범죄 스릴러가 될수도 있었을 [피도 눈물도 없이]는 범죄 스릴러 장르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치밀함이 부족했으며, [아라한 장풍 대작전]은 그 매력적인 액션씬과는 별도로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뒷심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류승완 감독의 열렬한 팬이지만 이쯤에서 그에게 대박 흥행 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그도 마음껏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만한 자본적인 역량을 갖추게 될테니...
그런 의미에서 [주먹이 운다]는 류승완 감독에게도, 류승완 감독의 열렬한 팬인 제게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영화입니다. 어느덧 우리 영화계에서 대표적인 성격파 배우의 자리에 올라선 최민식과 류승완 감독의 영화와 함께 스스로 배우로써의 역량을 키워온 류승범의 하모니는 앞뒤 사정을 모두 버리더라도 분명 매력적인 조합임에 분명합니다. 게다가 액션에 능한 류승완 감독이 선택한 소재는 바로 권투입니다. 일찌기 [챔프], [록키]등의 영화에서부터 최근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이르기까지 액션과 감동을 두루 겸비한 영화들의 주메뉴였던 권투. 이제 류승완 감독은 자신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자신의 약점을 완벽하게 보완해줄 배우와 소재를 찾아낸 셈이며, 그렇기에 [주먹이 운다]는 분명 젊은 류승완 감독에게 하나의 분기점이 될만한 영화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주먹이 운다]는 결코 액션 영화는 아닙니다. 남자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액션 영화들을 주로 만들었던 류승완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역시 남자 냄새를 물씬 풍기지만 이전 영화들처럼 노골적으로 시원시원한 액션을 펼쳐 보이지는 않습니다.
[주먹이 운다]는 두 남자의 인간 승리를 담은 드라마입니다.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을 땄지만 지금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살던 집에서도 쫓겨날 처지에 몰렸으며,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위해 거리에서 얻어터지며 돈을 버는 3류 인생으로 전락한 강태식(최민식)과 가난한 살림에 어렸을때부터 문제아로 낙인찍히고 결국 소년원에 들어오게된 불량 청년 유상환(류승범)의 인생 역정은 마치 서로 평행선을 그으며 관객들에게 번갈아가며 소개됩니다. 자신의 약점으로 지목되었던 빈약한 스토리를 류승완 감독은 독한 마음으로 극복하려는 듯이 처음부터 자신의 장기인 액션을 버리고 완벽한 드라마로 관객을 사로잡은 겁니다.
물론 여기에 캐스팅에서부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최민식과 류승범의 연기 하모니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최민식의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은 그 어떤 영화에서보다 더욱 아프게 느껴집니다. 자존심 하나만으로 힘든 인생을 버티며 서있었건만 자신의 자존심이 하나씩 무너지는 것을 보며 느꼈을 강태식의 자괴감. 그러나 그는 결코 쓰러지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돈 많은 남자와 재혼하려할때에도, 어린 아들이 자신을 창피해 할때에도 그는 '나, 강태식이야!'를 외치며 다시 일어서려 합니다. [올드보이]에서의 최민식의 연기가 정점에 올랐다면 [주먹이 운다]에서의 그는 마치 연기의 신이 된듯한 느낌입니다. 관객의 마음을 쥐었다 놓았다하며 자유자재로 관객의 감정을 지배하는 그 놀라운 연기를 보며 저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류승범의 연기 역시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언제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닌 개구장이 소년같은 이미지의 그가 어느덧 연기의 대선배인 최민식에게 조금도 눌리지 않는 당당한 카리스마를 표출하고 있었던 겁니다. 얼굴 가득히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사회에 대한 불만과 증오심.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과 할머니의 병과 마주친 이후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과 참회의 눈물이 가슴깊이 느껴집니다. 한 배우의 얼굴에서, 그것도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이런 극단적인 내면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움이며, 관객의 입장에서는 축복입니다. 류승완 감독은 이 완벽한 스토리 속에 완벽한 배우들을 배치해놓음으로써 앞으로 그에게 '스토리가 약하다'라는 말이 절대 나올 수 없게끔 만드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주먹이 운다]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라스트의 권투씬입니다. 관객들에게 강태식과 유상환, 이 두 캐릭터를 똑같이 사랑하게끔 만들어놓고 류승완 감독은 권투 신인왕전에 이 두 캐릭터를 맞닥뜨립니다. 무너진 자존심과 금전적인 여유와 무엇보다도 아내와 아들에게서 실추된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신인왕 타이틀이 꼭 필요한 강태식과 죽은 아버지에 대한 참회와 병마와 싸우는 할머니에 대한 뒤늦은 효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게 자신이 인간 쓰레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유상환의 도전. 관객들은 그 누구의 편이 되지도 못한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집니다.
어쩌면 그것은 류승완 감독이 노린 것일수도 있습니다. 두 캐릭터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펼쳐놓고 관객 스스로 그들이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게끔 바라게 만든후 펼쳐지는 둘의 마지막 대결. 지금까지의 스포츠 영화에선 주인공이 있었고, 그 주인공이 넘어서야하는 상대 선수가 있었습니다. 관객들은 일방적으로 주인공을 응원하게 되며 상대 선수는 철저하게 악역 또는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은 스포츠의 세계가 그런 흑과 백이 명맥하게 나눠진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내 자신이 내 인생의 주인공이듯이, 상대 역시 그 자신의 인생에 주인공인 겁니다. 이 세상에 사연없는 사람은 없다는 영화속 대사처럼 단순한 흑과 백의 논리만으로는 이 세상은 설명될수 없는 거죠.
아무리 나이가 지긋한 감독들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세상의 논리를 영화속에서 실천하기는 힘듭니다. 그것은 선과 악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영화이어야만 흥행이 잘 된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특히 승부의 세계를 다룬 스포츠 영화의 경우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심한데 관객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열렬히 응원하듯이 영화를 보면서도 주인공을 응원하며 마치 스포츠의 현장에 뛰어든 느낌을 주어야만 영화가 흥행한다는 사실은 흥행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류승완 감독은 그러한 흥행의 법칙을 처음부터 거스릅니다. 스포츠 영화에서 관객이 서로 꺾어야만 하는 두 선수를 똑같이 응원한다는 것은 어쩌면 취약점이 될수도 있지만 그는 젊은 패기로 그러한 위험을 감수합니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의 그러한 도전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때로는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라는 이 영화의 카피처럼 영화가 끝나고 승부가 결정되면 관객들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감동의 진수를 느끼게 됩니다. 둘중 한명은 이기고 나머지 한명은 분명 패배를 하지만 영화는 이 두 캐릭터에게 똑같은 희망을 안겨줍니다. 세상은 승자만 기억하다지만 인생에서도 승자만이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했다면 패자에게도 희망은 있는 겁니다. 이제 겨우 서른 중반의 이 젊은 감독이 벌써 그러한 놀라운 진리를 깨닫고 과감하게 영화속에서 표현한 겁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저는 이 영화를 보며 최근에 아카데미 주요상을 휩쓴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비교가 되더군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역시 권투를 소재로 했으며 마지막에 진한 감동을 안겨주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이 노장을 진정한 거장으로 만든 영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주먹이 운다]를 두고 선택하라하면 단연코 [주먹이 운다]를 선택할 것입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분명 좋은 영화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너무 정치적입니다. 안락사라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감동적인 드라마로 치장했으며 결국 안락사에 대한 미화로 결과가 드러납니다. 안락사... 이 문제는 완벽한 정답이 없습니다. 누구는 그들에게도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고 하고, 또 다른 누구는 사람의 생명을 사람 스스로 결정짓는 것은 오만이라고 합니다. 안락사라는 이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 선택해야하는 불행이 제겐 없었기에 어떤 것이 옳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줘야한다며 관객을 설득합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 문제를 자신의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거죠.
하지만 [주먹이 운다]는 순수합니다. 이 영화는 두 사람의 인생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그들이 어떻게 밑바닥 인생에서 그것을 극복하는지 그려냅니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감동을 주지만 결코 눈물을 지향하지는 않습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마지막 장면에서 진한 눈물을 흘리게 한다면, [주먹이 운다]는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진정한 감동이라는 것은 바로 미소가 아닐까요?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리고 승부를 떠나 최선을 다한 이 두 남자의 마지막 혼혈의 펀치를 보며 느껴지는 이 행복감. 눈물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미소라고 믿기에 제게 눈물보다도 미소를 안겨준 [주먹이 운다]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보다도 휠씬 좋은 느낌의 영화였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를 보며 저는 류승완 감독에게 가능성을 발견했었습니다. [아라한 장풍 대작전]을 보며 저는 그가 가능성을 넘어 어느새 대가의 위치에 올라섰다고 느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먹이 운다]를 보며 저는 류승완 감독이라는 이 완벽한 감독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영화를 만들때마다 한단계씩 나아가는 이 젊은 감독은 이젠 우리 영화를 이끌어나갈 젊은 감독의 위치를 선점했으며, 그가 있는한 저는 결코 헐리우드가 부럽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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