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3년 영화이야기

[언어의 정원] - 최소한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는 찬사만큼은 아깝지 않다.

쭈니-1 2013. 8. 22. 16:42

 

 

감독 : 신카이 마코토

더빙 : 이리노 마유, 하나자와 카나

개봉 : 2013년 8월 14일

관람 : 2013년 8월 20일

등급 : 12세 관람가

 

 

어긋남도 습관이 된다.

 

2007년 6월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실직자가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지만, 회사에서의 스트레스가 너무 극에 치달아서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구피와 상의해서 회사에 사표를 내고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충전의 시간 동안 저는 구직 활동도 열심히 했지만, 그 동안 회사 생활이 바빠서 보지 못했던 영화들도 열심히 챙겨 보았습니다. 특히 <제11회 서울국제만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과 <일본인디필름 페스티벌 리턴>에서 하루종일 색다른 영화들을 보내 지낸 하루는 결코 잊기 힘든 추억입니다.

그 중 <제11회 서울국제만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세계 각국의 단편 애니메이션과 콘 사토시 감독의 [파프리카]를 볼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아마 제가 실직 상태가 아니었다면 결코 그들 영화를 볼 수 없었겠죠. 하지만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애초에 [파프리카]와 함께 보고 싶은 애니메이션 1순위였던 [초속 5센티미터]는 일찌감치 매진이 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초속 5센티미터]는 그러한 아쉬운 놓침의 순간이 있었기에 더욱 제게 애틋한 영화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저는 [초속 5센티미터]가 정식으로 국내 개봉이 된 이후에 집에서 먼 상영관까지 굳이 찾아가 [초속 5센티미터]를 보고야 말았습니다.

 

사실 [초속 5센티미터]에 대한 제 첫 느낌은 '영상미는 좋았지만 영화의 내용은 아쉽다.'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갑자기 오래 전에 잊었던 첫사랑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찡해졌습니다. 그것은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제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만큼이나 꼭 극장에서 봐야할 애니메이션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하지만 [초속 5센티미터]에서도 그러했듯이 그의 영화는 이상하게 저와의 인연이 자꾸만 어긋났습니다.

2011년에 개봉한 [별을 쫓는 아이 : 아가르타의 전설]도 극장에서 놓쳤고, [언어의 정원] 역시 보기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예매를 취소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초속 5센티미터]가 상영했을 때에는 제가 실직 상태여서 시간적 여유가 많았지만, [별을 쫓는 아이 : 아가르타의 전설]과 [언어의 정원]은 한번 볼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없을 만큼 제게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별을 쫓는 아이 : 아가르타의 전설]은 놓쳤지만 (지금 제 스마트폰에 다운로드 받은 상태입니다. 컨디션이 굉장히 좋은 날 보려고 아끼고 있습니다.) [언어의 정원]까지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에 평일, 무리하게 시간을 내서 회사 근처 CGV에서 [언어의 정원]을 봤습니다.  

 

 

[숨바꼭질]과 [언어의 정원]의 상관관계

 

이 세상에는 악연이라는 것이 있긴 있나봅니다. 그리고 제게 [숨바꼭질]과 [언어의 정원]은 서로 악연이라 생각이 들 정도로 묘한 인연으로 엮여져 있습니다.

[숨바꼭질]의 영화 이야기에서도 밝혔듯이 지난 8월 16일 [언어의 정원]을 보기 위해 상영관 밖에서 기다리던 저는 우연찮게 [숨바꼭질]의 스포일러를 듣고 말았고, 그것은 [숨바꼭질]에 대한 영화적 재미를 반감시켰었습니다. 그날은 [언어의 정원]도 끝내 못보고, [숨바꼭질]의 스포일러도 듣게된 최악의 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악연은 [언어의 정원]을 본 8월 20일에도 이어졌습니다. 교차 상영 탓에 회사 근처 CGV에서도 밤 9시35분에 상영하던 [언어의 정원]. 저는 [언어의 정원]을 기다리며 먼저 [숨바꼭질]을 봤습니다. [숨바꼭질]이 끝난 시간은 9시 37분. 저는 숨 돌릴 틈도 없이 곧장 [언어의 정원]을 보기 위해 다시 극장 안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은 최악의 결과를 제게 안겨줬습니다. [숨바꼭질]은 [숨바꼭질]대로 스포일러를 들은 상태에서 영화를 본 탓에 영화의 마지막 반전도 예상되었고, 그만큼 영화 자체도 기대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숨바꼭질]을 본 직후 곧바로 전혀 분위기가 다른 [언어의 정원]을 보려니 이것 또한 적응이 잘 안되더군요. [언어의 정원]을 보는 내내 저는 마치 바늘 방석에 앉은 것 마냥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 머리 속에는 [숨바꼭질]의 비명 소리가 떠나질 않았습니다.

 

네, 맞습니다. 저는 지금 [언어의 정원]이 재미없었다며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것이 작은 소원인 제게 8월 20일에 본 [숨바꼭질]과 [언어의 정원]이 연달아 기대이하여서 매우 당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영화가 악연이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할 만큼...

분명 [언어의 정원]은 제가 기대했던 것 만큼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입니다. 이미 [초속 5센티미터]를 통해 경험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상미는 이번 [언어의 정원]에서도 유효합니다. 특히 비가 내리는 공원의 풍경은 제게 빗속을 맘껏 달리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켰습니다. 지금은 두발 보호를 위해 자제하지만 한때 저는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언어의 정원]을 보다보면 우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산을 접고 비를 맞던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게다가 비가 내리고 난 후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너무 눈이 부셔 눈을 찡그리게 만들었습니다. 애니메이션을 보며 영화 속의 풍경에 매료된다는 것은 그만큼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이룩해놓은 [언어의 정원]의 영상미가 특출나다는 것을 뜻합니다.

분명 저는 [언어의 정원]을 보러가며 영화의 내용보다는 영화의 영상미를 기대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언어의 정원]은 제 기대감을 채워줬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이미 [초속 5센티미터]의 여운을 경험했으며, [언어의 정원]에 아름다운 영상미 말고도 [초속 5센티미터]에서 느낀 여운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어의 정원]으 그러한 기대감 만큼은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스토리의 풍성함보다 공감이 문제이다.

 

따지고 보면 [초속 5센티미터]에서도 특별한 스토리 라인은 없었습니다. 그저 고등학생인 타카키가 첫사랑인 아카리를 성인이 되어서도 잊지 못하는 아련한 풍경만 펼쳐졌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초속 5센티미터]에는 특별한 스토리 라인은 없지만 누구나 한번쯤 간직하고 있을 첫사랑의 추억이 아름다운 영상미와 함께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초속 5센티미터]를 보고 여운을 가득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첫사랑과 짝사랑을 동시에 했었는데, 그 기간이 무려 3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속 5센티미터]에서 펼쳐지는 첫사랑 이야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어의 정원] 역시 사랑 이야기입니다. 구두 디자이너가 꿈인 고등학생 다카오(이리노 미유)는 비가 오는 날 오전에는 학교 수업을 빼먹고 도심의 공원에서 구두 스케치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유키노(하나자와 카나)라는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비가 오는 공원에서 맥주와 초콜릿을 먹는 그녀. 장마가 계속되고 다카오와 유키노의 만남은 계속 이어집니다. 하지만 장마가 그치며 다카오는 더이상 유키노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유키노가 안고 있는 마음의 상처를 알게 되고,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합니다.

 

어찌보면 [언어의 정원]은 [초속 5센티미터]와 비교해서 스토리 자체는 좀 더 풍성해졌습니다. 특별한 내용 없이 첫사랑의 아련함을 영상화했던 [초속 5센티미터]와는 달리 [언어의 정원]은 유키노가 당한 아픔을 통해 좀 더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공감입니다. 영화를 보며 얼마나 그들의 사랑 이야기에 공감하느냐... 그것의 차이가 [초속 5센티미터]에게는 아련한 여운을 느꼈고, [언어의 정원]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언어의 정원]의 러닝타임은 고작 45분. 장편이라 하기보다는 중편 영화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벗꽃이야기', '코스모나우트', '초속 5센티미터' 이렇게 세개의 챕터를 통해 타카키의 첫사랑을 묘사했던 [초속 5센티미터]와는 달리 45분이라는 짧은 러닝 타임동안 [언어의 정원]은 다카오와 유키노의 사랑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좀 더 러닝타임을 늘려서 부모님의 부재 속에 스스로 나이에 비해 성인이 되어야 했던 다카오의 상황과 학교 선생이었지만 아이들의 농간 속에 깊은 상처를 입고 홀로 설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유키노의 아픔을 상세하게 그려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홀로 선 이후 두 사람의 사랑은 시작될 것이다.

 

결국 이렇게 영화 이야기를 쓰고나니 제가 [언어의 정원]에 실망한 것은 [숨바꼭질]과의 악연 때문이 아닌, [초속 5센티미터]와의 비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제가 [초속 5센티미터]를 보지 않았다면 이 영화의 압도적인 영상미만으로도 매료되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네요. [에픽 : 숲속의 전설]에서 그랬듯이...

비록 [초속 5센티미터]와 비교해서 영화 속의 사랑이 제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햇지만 그래도 한가지 좋았던 것은 첫사랑의 기억을 습관이 되어 버린 그리움만으로 간직하던 [초속 5센티미터]와는 달리, [언어의 정원]의 사랑에는 희망이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제자들에게 받은 상처로 인하여 맛을 잃은 유키노. 그녀가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맥주와 초콜릿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카오가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맛의 즐거움을 되찾습니다. 유키노의 상처는 그렇게 다카오로 인하여 치유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몇 년후 당당히 구두 디자이너가 된 다카오와 과거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버리고 다카오가 만들어준 구두를 신고 당당히 걸을 수 있는 유키노는 다시 만나 사랑을 이룰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이 만나 홀로 서는 것이 아닌, 홀로 선 이후 둘이 다시 만나 사랑을 이루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언어의 정원]은 인상 깊은 영화였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이 멋진 표현이 정말로 어울리는 감독이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