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성수
주연 : 장혁, 수애, 박민하, 유해진, 이희준, 마동석, 차인표
개봉 : 2013년 8월 14일
관람 : 2013년 8월 14일
등급 : 15세 관람가
감기가 얼마나 무서운줄 알아?
저희 가족은 요며칠동안 개도 안걸린다는 오뉴월 감기에 걸려 있습니다. 가장 먼저 지난 8월 2일 웅이가 갑자기 고열이 나는 바람에 새벽에 구피와 저는 해열제를 찾아 동네를 헤매야 했습니다.
최근에는 너무 더워 거실에서 에어컨을 켜고 잤다가 구피가 목이 아프다며 며칠 동안 감기약을 입에 달고 사는 신세입니다.
저는 다행히 아직 감기에 걸리지 않았지만 웅이와 구피가 감기에 걸려 있으니 제게 옮기는 것은 시간 문제겠죠. 그래서인지 저도 요즘들어서 자꾸 콧물이 나옵니다. 오뉴월 감기에 저희 가족 모두 골골거리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감기는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흔한 병입니다. 감기의 정의를 보면 바이러스에 의해 코와 목 부분을 포함한 상부 호흡기계의 감염증상으로 재채기, 코막힘, 콧물, 기침, 두통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지만 대개는 특별한 치료없이 저절로 치유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흔한 질병이고, 대부분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저절로 치유가 된다고 해도 감기를 우습게 보면 안됩니다. 감기의 무서운 점은 우리들의 면역력을 약화시켜 또다른 질병에 2차 감염을 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나 노약자의 경우는 감기라고 우습게 여겼다가는 큰 코를 다칠 수 있습니다.
영화 [감기]를 봤습니다. 8월 15일 광복절이 목요일인 덕분에 샌드위치 데이인 금요일까지 임시 휴가를 얻었습니다. 갑자기 4일 간의 연휴가 생겨버린 것입니다.
'감기'로 인하여 수요일 오전에 병원으로 간 구피는 의사가 연휴 동안 집에서 푹 쉬면 금방 나을 것이라며 약을 처방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깟 '감기' 때문에 오랜만의 연휴를 집에서 보낼 수 없다며 목, 금, 토 연속으로 놀러 갈 계획을 세워 놓은 상태. 그러한 상황에서 수요일밤에 구피와 저는 [감기]를 보겠다며 극장으로 향한 것이죠.
하지만 [감기]를 보다보니 '감기'에 걸린 구피가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구피와 저는 '감기'를 우습게 보고 푹 쉬라는 의사의 말을 무시한채 한 밤중에 극장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스크린 속에 펼쳐진 광경은 신종 조류독감 바이러스로 인하여 분당에 사는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물론 [감기] 속의 처참한 사태는 영화의 제목인 '감기' 때문이 아닌 독감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감기'와 독감을 같은 질병으로 오해하시지만, '감기'와 독감은 원인균과 병의 경과가 다르기 때문에 엄연히 다른 질병입니다. [감기]의 영어 제목인 'The Flu'는 독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제목은 '감기'이지만 막상 [감기] 속에서는 '감기'가 등장하지 않는 셈이죠. 그러한 사실을 알지만 '감기'와 독감은 증상이 비슷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내내 콜록거리는 구피를 보며 '괜히 영화보러 가자고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곳에 우리의 가족이 있다면...
[감기]는 '만약 대한민국에 감염속도 초당 3.4명, 치사율 100%의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발생한다면?' 이라는 상상력에서 시작됩니다.
변종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치료약은 없는 상황. 의사들은 갈팡질팡하고, 질병이 발생한 지역의 정치인들은 사태를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문제를 키웁니다.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곧바로 바이러스 발생 지역인 분당을 폐쇄조치하지만, 분당 폐쇄조치의 주도권을 미국에서 쥐는 바람에 우리나라 정부는 꼭두각시 노릇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지만, 영화 속의 상황은 처참하기만합니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분당을 페쇄조치하는 것까지는 합당한 조치라고 생각하지만, 폐쇄조치된 분당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의 현장은 '설마 저렇게까지 할리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물론, 감염이 안된 사람들조차 이 죽음의 땅에 갇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사실 분당에서의 학살을 묵인하는 국무총리(김기현)의 논리 역시 틀리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40만명이 사는 분당. 하지만 만약 바이러스가 분당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로 확산된다면 5천만명의 국민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국무총리는 40만명의 희생보다는 5천만명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대통령(차인표)에게 말합니다. 분명 국무총리 입장에서는 자신의 결정이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해서 옳은 결정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만약 우리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대다수에 낄 수 있다면 '그래,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라고 애써 정당화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대다수가 아닌 희생당해야 하는 소수라면?
실제로 영화에서도 그러한 상황이 나옵니다. 처음엔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들을 사람이 아닌, 그저 조만간 죽을 존재로만 생각하던 군인이, 자신의 어머니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상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분당을 빠져 나가기 위해 반란군에 합세합니다.
국가는 국민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단 1%의 가능성이라도 국민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러한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영화 속의 대통령은 그러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분당에 폭탄을 투여하려는 미국에 대항합니다. 하지만 나머지 99%의 위험부담을 안아야 합니다. 대통령은 모든 책임을 자신이 떠안겠다며 미국을 설득합니다.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 그에게 국민은 최고의 권한을 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은 최고의 권한과 맞먹는 의무와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과연 현실의 대통령 역시 그러한 결정을 할 수 있을까요?
[감기]를 보며 가장 섬뜩했던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치명적 바이러스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내 가족이 그 어떤 상황에서 희생당해야 하는 소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아무런 잘못도 없이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할 국가로부터 버림을 받고, '대다수를 위해 희생하라'라는 불합리한 요구에 내몰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저를 섬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타심을 가진 캐릭터들
'내가 살아야하니 너는 죽어라!'라고 요구하는 대다수에 속한 사람들. 우리는 그것을 이기심이라 부릅니다. 이기심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마음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기심이 모여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강요하는 [감기]의 섬뜩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 인간들에게는 이기심만 있는 것일까요? 이기심의 반댓말로 이타심이 있습니다. 남을 위한 마음으로 정의할 수 있는 이타심. [감기]의 주인공을 이루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타심을 가진 이들입니다.
분당 소방서 대원인 강지구(장혁)는 이타심의 대표적인 캐릭터입니다. 사실 그는 너무 비현실적으로 자기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합니다. 물론 소방대원이라는 지구의 직업과 김인해(수애)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설정이 뒷받침해주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을 위한 지구의 행동은 과해도 너무 과했습니다.
영화의 초반부터 인해의 가방을 찾아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인해의 어린 딸인 김미르(박민하)를 위해 휴일을 반납하며, 바이러스로 인하여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분당을 빠져나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당에 남아 사람들을 돕겠다고 선언합니다.
대피소에서는 미르 대신 감염자 캠프로 가는 위험한 선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며 지구라는 캐릭터 자체가 워낙 비현실적이라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지구의 이타심이 이해되지 않을 만큼 저 역시도 이기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감기]에서 이타심을 가진 캐릭터는 지구 뿐만이 아닙니다. 미르 역시 이타심의 대표적인 아이콘입니다. 영화의 초반 미르가 항체를 가진 밀입국 노동자를 도와주는 장면은 어린이의 순수함을 보여줍니다. 우리 역시 사회에 때묻지 않았을 때에는 미르처럼 이타심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그러한 지구, 미르와는 반대로 인해는 이기적인 캐릭터입니다. 영화의 초반 지구에 의해 목숨을 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맙다는 인사 대신 '당신의 일을 했으면서 뭘 그렇게 생색내냐?'며 쏘아 붙입니다.
미르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르를 데리고 분당을 빠져 나가려 하고, 분당의 임시 대피소에서도 미르를 감염자 격리 대피소가 아닌 미감염자 대피소로 몰래 데려갑니다. 물론 엄마의 입장에서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의사의 입장에서 인해의 선택은 모두를 바이러스의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최악의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이렇듯 인해는 철저하게 미르를 위해서만 행동합니다. 국민을 최악의 바이러스로부터 구할 의무가 있는 전문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든 선택은 미르를 구하기 위한 개인적인 목적으로 이뤄집니다. 미르를 구하기 위한 인해의 위험한 모험에서 만약 결과가 나빴다면 그녀의 이기심은 대한민국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감기]는 최악의 바이러스라는 위기의 상황에서 이기적으로 변하는 일반인들과, 그러한 이기적인 사람들 틈에서 이타적인 지구와 미르의 활약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최악의 바이러스는 이타적인 지구와 미르 덕분에 수습됩니다. 김성수 감독은 이타심에서 우리 대한민국의 희망을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연가시]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한국형 재난영화
여러모로 [감기]는 [연가시]를 연상하게 하는 재난영화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연가시]와 비교해서 [감기]는 분명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연가시'에 감염된 사람들이 대피소에 모여 있는 장면은 [감기]에서 분당의 대피소에 갇힌 분당 시민들로 확장되고, 여기에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해서 분당을 희생시키려는 정부 각료들과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분당에 폭탄을 투여하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미국의 음모가 추가되며 영화의 스케일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러면서도 [감기]는 [연가시]가 완성해 놓은 한국형 재난영화의 틀을 충실하게 따라갑니다. '연가시'에 감염된 가족을 지키기 위한 재혁(김명민)의 고군분투는 미르를 구하기 위한 인해의 사투와 연결되고, '연가시'를 이용하여 돈을 벌려는 인간의 사악한 욕심은 살기위해 악귀로 변해가는 전국환(마동석)의 섬뜩한 모습으로 재현됩니다.
섬뜩함 속에서도 간간히 웃음을 안겨주는 지구의 동료 소방대원 배경업(유해진)이라는 캐릭터 역시 잊지 않음으로서 [감기]는 재난 영화의 섬뜩함과 가족애, 그리고 대박 한국영화의 공통된 특징인 코믹한 감초 캐릭터에 의한 웃음 또한 잊지 않는 영특함을 보여줍니다.
[감기]는 분당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허락하는 미국의 횡포에 찍소리도 하지 못하는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지지 못한 힘 없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여주다가도 대통령의 당찬 결정에 속이 다 시원해지는 쾌감도 안겨줍니다.
과하게 이타적인 지구의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지 못했지만 그가 펼치는 비현실적인 활약에 마음 속으로 박수를 보내게 되고, 후반부 미르의 결정적인 활약은 귀여운 아역 배우를 내세운 뻔한 감동 코드임을 잘 알면서도 코 끝이 찡해졌습니다.
결국 [감기]는 [연가시]를 잇는 뻔한 한국형 재난영화이면서도 [연가시]보다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줬고, 객관적으로 따지고 보면 허술한 부분이 많이 보이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빠져드는 힘을 가진 영특한 영화입니다.
연일 계속 되는 폭염 속에 [감기]를 보며 저는 잠시 동안이라도 무더위를 잊었습니다. 지구상에서 인간의 유일한 천적은 바이러스라고 생각하기에 언젠가는 나타날지도 모를 치명적인 변종 바이러스에 두려움을 느꼈고, 나와 내 가족이 희생당해야 하는 소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분당 종합운동장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장면의 끔찍한 비주얼은 아마 며칠 동안 제 뇌리를 빙빙 돌며 저를 오싹하게 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재난영화를 보는 이유겠죠. 그런 면에서 [감기]는 제게 재난영화의 재미를 듬뿍 안겨준 영화였습니다.
[감기]로 인하여 잠시 잊은 무더위 속에 오늘도 나는 하루를 보낸다.
어쩌면 치명적일지도 모를 '감기'를 몸에 달고서...
이 놈의 감기는 1년 내내 내 몸을 떠날 줄을 모른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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