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마크 포스터
주연 : 브래드 피트, 미레일리 이노스, 다니엘라 케르테스
개봉 : 2013년 6월 20일
관람 : 2013년 6월 20일
등급 : 15세이상 관람가
또 좀비? 그런데 이번 좀비는 다르다.
요즘 들어서 심심치 않게 좀비 영화들이 개봉하는 것 같습니다. 2012년 4월에 개봉한 [인류멸망보고서] 중에서 첫번째 이야기인 [멋진 신세계]는 좀비 바이러스가 서울을 덥친다는 설정의 이야기였습니다.
2013년 2월에 개봉한 [파라노만]은 마녀의 저주로 인하여 마을을 공격하는 좀비들에 맞서 유령을 보는 소년 노만이 마을을 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급기야 2013년 3월에 개봉한 [웜 바디스]에서는 좀비 소년과 인간 소녀의 로맨스라는 파격적인 소재까지 등장했습니다. 이쯤되면 좀비의 전성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또 좀비입니다. 이번에 좀비 열풍에 뛰어든 영화는 바로 [월드워Z]입니다.
[월드워Z]는 국내에서는 <세계 대전 Z>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맥스 브룩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 대전 Z>는 가상의 전염병이 불러온 대재난을 인터뷰 방식으로 풀어낸 소설로 재난에 대처하는 인류의 생존 보고서 형식을 띄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계 대전 Z>는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며, 좀비에 맞서 싸우는 전UN소속 조사관 제리(브래드 피트)의 영웅담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러면 기존의 좀비 영화와 다를 것이 없잖아?'라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월드워Z]는 분명 기존의 좀비 영화와 확연하게 다릅니다. 그 다름의 이유는 바로 좀비의 걸음걸이에서 비롯됩니다.
좀비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어그적거리는 걸음입니다. 좀비 자체가 되살아난 시체이기 때문에 신체적 능력은 아무래도 인간보다 떨어집니다. 단지 수적 우세와 강력한 전염성으로 인간을 위협합니다.
기존의 좀비 영화들은 그러한 특성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하지만 [월드워Z]는 좀비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어그적거리는 걸음을 없앴습니다. [월드워Z]의 좀비는 인간보다 빠르고 강한 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빠른 좀비라니... 솔직히 조금 낯설지만, 그 효과만큼은 탁월합니다. 죽여도 죽지 않고, 한번 물리면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강력한 전염성. 그것도 모자라 기존의 좀비에게는 없었던 뛰어난 신체적 능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월드워Z]의 좀비는 좀비 영화를 통털어서 가장 강력한 좀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의 주인공 제리는 좀비를 퇴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과연 제리는 좀비를 퇴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인류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낼까요?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월드워Z]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아빠다.
한때 UN의 조사관으로 위험한 상황에서도 뛰어난 위기대처 능력을 보였던 제리 레인. 하지만 그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UN 조사관을 그만둡니다.
사랑하는 아내(미레일리 이노스)와 천식에 걸린 첫째딸, 그리고 아직은 너무 어린 둘째딸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제리. 그런 그에게 어느날 재난이 닥쳐옵니다. 아니, 그 재앙은 제리에게만 닥쳐 온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닥칩니다. 바로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것입니다.
[월드워Z]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좀비로 인하여 아수라장이 된 필라델피아를 보여줍니다. 제리는 이 아수라의 현장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빠져 나옵니다. 그에게는 오직 가족을 지켜야한다는 가장의 의무만이 지배합니다. 그러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UN사무총장인 티에리는 제리의 가족을 좀비로부터 안전한 미항공모함으로 데려옵니다. 자! 이제 제리의 가족에게 닥친 모든 위험은 끝이 난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족을 지키고 싶은 제리. 하지만 그는 좀비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떠납니다. 만약 그가 이 일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제리의 가족들은 안전한 항공모함에서 쫓겨나 난민촌으로 옮겨야 합니다. 결국 제리의 입장에서는 가족을 위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죠.
이렇듯 [월드워Z]를 이루고 있는 것은 제리의 가장으로서의 의무감입니다. 그는 인류를 좀비 바이러스로부터 구하겠다는 영웅심으로 똘똘 뭉친 캐릭터가 아닙니다. 오히려 티에리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할 정도로, 영웅심보다는 가족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보통의 가장일 뿐입니다.
어쩌면 제리의 가족들이 계속 항공모함에서 안전하게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제리는 좀비를 퇴치하는 방법을 찾는 것보다 가족의 곁에서 좀비가 퇴치되기를 바라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리는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좀비로부터 인류를 구하겠다는 영웅심도 아니고, 단지 아내와 딸들이 안전한 항공모함에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한 제리의 결정은 제가 이 영화에 감정이입을 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영화의 후반, 제리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며칠만에 의식이 돌아옵니다. 하지만 제리가 죽은 것으로 판단한 미국 정부는 제리의 가족을 난민촌으로 옮깁니다. 가족이 안전한 항공모함이 아닌 위험한 난민촌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제리. 그가 영화의 후반부에 좀비 퇴치법을 찾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입니다.
인류를 구하겠다는 큰 포부를 가진 영웅이 아닌, 가족을 지키겠다는 가장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소망을 가진 제리의 눈물겨운 모험이 그렇기에 더욱 영화를 보는 제게 와닿았습니다. 나도 아빠이기 때문에...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다.
저는 2시간에 육박하는 상영 시간 내내 거의 심장이 멎을 듯한 느낌을 받으며 [월드워Z]를 봤습니다. 그만큼 [월드워Z]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를 긴장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습니다.
제가 [월드워Z]를 극도의 긴장감 속에 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영화의 재난이 너무 극단적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재난은 재난 지역을 벗어나면 안전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월드워Z]에는 그러한 희망이 없습니다.
재난 영화를 보며 극한의 재난을 체험한 것은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2012]가 처음이었습니다. [2012]는 지구의 지각 변동으로 인한 재난을 소재로 하였습니다. 지구 자체가 재난의 공간이었기에 인간이 그러한 재난을 피하고 도망칠 공간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2012]에서도 단 한 곳, 안전한 곳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극비리에 제작한 거대한 배입니다. 그러나 그 배의 탑승료는 무려 10억 유로. 제겐 그러한 재력이 없기에 안전한 곳이 없는 [2012]를 보면서 저는 두려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월드워Z]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월드워Z]에서 안전한 곳이라고는 고작 미항공모함 뿐입니다. 가족이 그곳에서 생활을 하려면 제리는 스스로 위험한 공간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리의 가족들은 항공모함에서 쫓겨납니다. 영화를 보며 제리가 느꼈을 좌절감을 저 역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월드워Z]가 뛰어난 점은 이런 식으로 안전한 곳을 하나씩 없애며 제게 극한의 재난을 체험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도시가 좀비로 인하여 쑥대밭이 됩니다.
좀비 바이러스의 근원을 찾기 위해 우리나라의 평택 미군 기지를 방문한 제리는 이스라엘은 오래 전부터 좀비를 막을 수 있는 거대한 벽을 세웠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또한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좀비와는 다른 뛰어난 육체적 능력을 가진 [월드워Z]의 좀비들은 이스라엘이 세운 거대한 벽마저 뛰어 넘습니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안전하다고 믿은 이스라엘 마저 좀비들에게 함락 당하자 좀비에 의한 공포는 극에 치닫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을 벗어나기 위해 올라탄 비행기마저 좀비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며 [월드워Z]는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극한의 공포를 제게 안겨줍니다. 이제 방법은 좀비를 퇴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내는 것.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 되어 버립니다.
소리에 반응하는 좀비. 고요의 긴장감을 이용하다.
[월드워Z]의 좀비는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대한 장벽을 스스로의 탑을 세워 뛰어 넘고, 하늘 위의 헬기 마저 추락시킬 정도로 그들의 신체적 능력은 뛰어 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소리에 반응을 한다는 것. 다시말해 조용히 한다면 좀비에게서 안전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월드워Z]는 그러한 설정을 잘 이용합니다. 제리가 좀비를 뚫고 목적지로 가는 장면의 정적은 그렇기에 중요합니다. 그 흔한 배경 음악조차 자제한채 고요함 속에서 제리는 목적지로 향합니다. 자칫 누군가의 실수로 깡통을 차버리는 순간이면 좀비들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득달같이 제리 일행을 덮칩니다.
아파트 옥상으로 가는 장면, 평택의 미군 기지에서 비행기에 주유하는 장면 등에서 그러한 고요함의 긴장감은 효과적으로 이용됩니다. 그 중에서 역시 최고는 웨일즈의 의료 센터에서 좀비로 득실거리는 B동에 가는 장면입니다. 고요함 속에 내딛는 제리 일행의 한걸음 한걸음이 얼마나 긴장되던지... 그러한 와중에 실수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도 저는 손에 땀을 쥐며 좀비가 달려올까봐 바짝 긴장해야 했습니다.
사실 [월드워Z]의 마지막 장면은 조금은 허무했습니다. 좀비 퇴치법을 과학적으로 차근 차근 접근하는 것이 아닌, 제리의 짐작에 의해 '모아니면 도'라는 심정을 모험을 하는 제리. 그러한 제리의 모험이 성공을 거두며 [월드워Z]는 서둘러 끝내는 모양새를 보입니다.
하지만 가족이 위험한 난민촌으로 쫓겨난 상황에서 제리의 극단적인 모험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으며, 2시간 내내 쉬지 않고 달려온 영화의 긴장감 탓에 영화의 후반부에 저는 이미 지쳐 있었기에 다른 한편으로는 [월드워Z]의 성급한 결말이 반갑기도 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공포 영화를 잘 보지 못하는 저도, 구피도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서늘한 기운 때문에 집으로 가는 길의 차에서는 에어컨을 끄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정말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다면 나는 제리처럼 가족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월드워Z]는 진정 제게 극한의 재난을 체험하게 만든 영화였습니다.
도말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재난의 상황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러한 상상만으로도 나는 무기력한 가장이 되었으며,
나를 무기력한 가장으로 만든 [월드워Z]는 충분히 무서운 재난영화였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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