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3년 영화이야기

[비포 미드나잇] - 사랑을 이루고나니 가족이 보이더라!

쭈니-1 2013. 5. 29. 11:30

 

 

감독 : 리차드 링클레이터

주연 : 에단 호크, 줄리 델피

개봉 : 2013년 5월 22일

관람 : 2013년 5월 28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비포 선라이즈]에서 [비포 선셋]까지...

 

1995년 유럽 횡단 열차. 소르본느의 대학생인 셀린느(줄리 델피)는 부다페스트에 사는 할머니를 만나고 가을 학기 개강에 맞춰 파리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미국인 청년 제시(에단 호크)는 마드리드에 유학온 여자 친구를 만나려고 유럽에 왔다가 오히려 실연의 상처만 안고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비엔나로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 두사람은 우연히 만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비엔나에서 짧은 하룻밤의 동행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비엔나의 거리를 거닐며 사랑과 실연의 아픔, 결혼과 인생의 의미, 죽음 등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풋풋한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제시는 미국으로, 셀린느는 파리로 떠나야할 날이 밝아옵니다. 결국 두 사람은 6개월 후 다시만날 약속을 하고 아쉬운 이별을 맞이합니다.

20대 미국인 청년 제시와 프랑스인 대학생 셀린느의 하룻밤의 셀렌 사랑을 담아낸 [비포 선라이즈]는 비엔나의 아름다운 풍경과 에단 호크, 줄리 델피의 풋풋한 모습이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당시 저는 이 영화를 본 후 낯선 곳으로 혼자 여행을 가면 [비포 선라이즈]와 같은 운명적인 사랑을 만날 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고속버스나 기차의 내 옆자리에는 언제나 아저씨나, 아줌마 뿐... 영화와는 다른 현실을 느끼며 좌절해야 했죠.

 

2004년 파리의 오래된 서점에서 제시와 셀린느는 재회합니다. 9년 전, 셀린느와의 짧은 사랑을 소설로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된 제시.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은 셀린느가 출판 홍보 여행중인 제시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두 사람은 9년전 비엔나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파리를 함께 거닐며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제시는 결혼을 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지만 아내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셀린느는 능력있는 애인을 가졌지만 사랑에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이 두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9년전, 비엔나의 대화와는 사뭇 다릅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두 사람은 사랑, 이별, 인생, 죽음 등 철학적이고, 감성적인 이야기를 나눴다면, [비포 선셋]에서 30대가 된 두 사람은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비포 선라이즈]를 볼 당시 혼자 여행을 가면 운명적인 사랑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순진한 생각을 가진 20대 청년이었던 저는 [비포 선셋]을 볼 당시에는 구피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고, 사랑이라는 이상보다는 결혼이라는 현실에 치여 살았습니다. 그만큼 제게 [비포 선셋]에서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는 마음에 와닿은 것이죠.

만약 제가 30대가 되어 [비포 선라이즈]를 봤다면, 아니 20대에 [비포 선셋]을 봤다면 이 두 영화에 대한 제 느낌은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었을테니까요. 하지만 영화 속의 제시, 셀린느의 나이와 실제 제 나이가 거의 비슷했고, 그 덕분에 저는 그들의 대화에 공감하며 영화 속에 푹 빠질 수 있었습니다.

 

 

내가 [비포 미드나잇]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

 

[비포 마드나잇]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던 저는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도중에 웅이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웅이는 학교에서 2박3일 동안 영어캠프를 갔습니다. 처음으로 부모와 함께가 아닌 친구들과 낯선 곳에서 잠을 자는 여행을 간 셈이죠.

영어캠프를 가기 전에 구피는 웅이를 붙잡고 하루에 한번씩 꼭 전화를 걸라며 몇번이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그날 웅이는 제게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말라는 전화를 한 것입니다. 비록 이틀 동안이지만 웅이를 보지 못했던 저는 웅이의 그런 전화가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몇몇 아이들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었다는데, 웅이는 씩씩하게 처음 겪는 친구들과의 밤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웅이와의 통화가 끝나고 곧바로 영화가 시작되었는데, [비포 미드나잇]은 아들과 제시의 긴 대화로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비포 선셋]에서 아내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던 제시는 결국 이혼하고, 셀린느와 결혼하였습니다. 셀린느와의 결혼으로 파리에서 살게된 제시는 미국에서 전처와 함께 살고 있는 아들과 방학 동안 짧은 휴가를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인 것이죠.

아들과 제시의 대화는 마치 저와 웅이의 대화와도 같았습니다. 아들에 대해서 이것 저것 걱정이 많은 제시. 한참 성장기인 아들의 곁에서 함께 하지 못한다는 제시의 죄책감은 아들에게 대한 지나친 걱정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시에게 아들은 시큰둥한 반응으로 보입니다. 대답은 항상 단답식으로 짧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최고의 휴가였다며 제시의 마음을 풀어줍니다. 

 

돌이켜보면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통털어 제시, 혹은 셀린느의 가족은 그들의 대화 속에만 존재해왔습니다. 그런데 [비포 미드나잇]은 영화의 첫 장면부터 제시와 그의 아들을 보여주며 제시와 셀린느의 가족을 처음으로 영화 속에 끌여 들인 것입니다.

아들을 미국으로 보낸 이후의 장면도 의미심장합니다. 셀린느와 결혼을 하여 귀여운 쌍둥이 딸을 낳은 제시와 셀린느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이제 더이상 제시와 셀린느는 사랑에 빠진 남녀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부양해야할 가족이 있습니다. 제시와 셀린느의 이야기를 하는데 있어서 이제 더이상 그들의 가족은 대화 속에만 있는 그런 가벼운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제가 [비포 미드나잇]을 보며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영화 속의 상황입니다. [비포 선라이즈]가 개봉했을 당시의 저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순진한 20대 초반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비포 선셋]이 개봉했을 당시의 저는 결혼한지 1년이 이제 막 지난, 아직은 가장으로서의 의무가 낯선 30대 초반의 아저씨였습니다. 하지만 [비포 미드나잇]을 보는 저는 40대 초반의 중년으로 가족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 있습니다. 영화 속의 제시와 셀린느가 그러하듯이.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그리고 [비포 미드나잇]은 바로 제 이야기입니다. 물론 영화 속의 제시와 현실의 저는 많이 차이가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공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제가 [비포 미드나잇]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공감입니다. 영화적 재미? 그런 것은 이 영화에서 필요없습니다. 애초에 영화적 재미를 담보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니까요.

 

 

더이상 낭만적이지 않은 그들의 사랑

 

[비포 선라이즈]가 그랬듯이, 그리고 [비포 선셋]도 그랬듯이, [비포 미드나잇] 역시 수 많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유럽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비포 선라이즈]는 비엔나였고, [비포 선셋]은 파리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비포 미드나잇]은 그리스의 카르다밀라입니다.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곳, 그곳에서 제시와 셀린느는 40대 중년이 가질만한 고민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눕니다. 만약 [비포 선라이즈]의 설램을 기대하고 [비포 미드나잇]을 본다면 분명 실망할 것입니다. 20대의 풋풋함을 간직한 [비포 선라이즈]의 대화와는 달리 [비포 미드나잇]의 대화는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분명 [비포 선셋]도 현실적이지만 [비포 미드나잇]의 대화는 [비포 선셋]보다 훨씬 직설적입니다.

가령 카르다밀라에서 만난 이들과의 저녁 식사 시간의 대화만 봐도 그렇습니다. 대화의 주요 소재는 섹스입니다. 노골적으로 성적 농담과 상대방의 성적 취향까지 적나라하게 까발려집니다. 이렇게 대놓고 하는 섹스의 이야기가 낭만적일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40대 중년에게 섹스는 더이상의 짜릿한 낭만이 아닌 어쩌면 배우자와의 당연한 현실인 것입니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의 국내 관람 등급은 15세 관람가였습니다. 하지만 [비포 미드나잇]의 관람 등급은 청소년 관람불가입니다. 그런만큼 [비포 미드나잇]은 이전의 영화들과는 다른 섹스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을 보여줍니다.

쌍둥이 딸을 맡기고 호텔에서 둘 만의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기 위해 길을 나서는 제시와 셀린느의 모습에서 섹스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은 여과없이 드러납니다. 셀린느의 옷을 벗기고, 제시는 그녀의 가슴을 애무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장면에서조차 낭만은 없습니다.

섹스를 하기 바로 전에 미국으로 돌아가던 제시의 아들이 전화를 겁니다. 셀린느는 가슴을 드러낸채 태연하게 전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사소한 다툼을 시작합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제시와 셀린느의 사랑은 아련하게 표현되었고, [비포 선셋]에서조차 제시와 셀린느의 사랑은 조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혼을 하였고, 이제 두사람에게 사랑은 아련하지도, 조심스럽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연한 것이죠. 섹스 역시 당연한 일상의 하나일 뿐인 것입니다.

줄리 델피는 이 영화를 위해서 일부러 살을 찌운 것인지, 아니면 이제 40대 중반에 접어둔 그녀로서는 아주 당연한 몸매인 것인지는 알수 없지만 [비포 선라이즈]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그녀의 푸근한 아줌마로서의 노출이 제겐 정겹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의 부부싸움에 나혼자 웃음을 참지 못하다.

 

두 사람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던 제시와 셀린느의 애초 계획과는 달리 결국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한 그들의 사소한 말다툼은 점점 큰 부부싸움으로 번집니다.

처음 시작은 아들의 전화를 바뀌주지 않은 것에 대한 제시의 섭섭함이었고, 미국에서 살 수는 없다는 셀린느의 반격이 이어지며 그들의 부부싸움에는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쌓였던 모든 불평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와 구피가 다툼을 벌어는 모습이 묘하게 겹쳤기 때문입니다. 먼저 시작한 제시는 계속 '이제 그만하자.'라며 끝을 내려 하지만 한번 시작한 셀린느의 불만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처음엔 가족 문제로 시작된 말다툼이 셀린느가 쌍둥이 딸을 출산했을때 소홀했던 제시의 행동으로 번지고, 결국 수년 전 제시가 했을지도 모르는 외도에 대한 의심으로 번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셀린느에 대항하는 제시의 태도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셀린느에게 '그만하자.'라며 재촉하지만, 결코 자신의 잘못에 대해 '미안하다'라는 사과는 하지 않고, 셀린느의 불만에 반격을 해댑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불리해지면 '그만하자.'라며 자꾸 옛 이야기를 꺼내는 셀린느를 비난합니다. 

구피가 그러더군요. 자신은 이제 저와 말다툼을 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절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저와 싸우는 것이 지쳤다고... 제시와 셀린느의 호텔에서의 말다툼은 저와 구피에겐 언젠가 한번은 겪었을 당연한 일과였던 것입니다.

 

셀린느는 제시에게 '이제 더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라고 선언하며 호텔 방을 나갑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그것은 이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으로서의 인연은 이런 사소한 다툼으로 끝이 날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다시 사랑을 하며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수도 없이 다툼을 벌일 것이고, 이별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족이라는 테두리안에서 화해하고 서로를 이해하거나 참아가며 살아갈 것입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제 친구에게 이 영화를 추천했습니다. 비록 나는 혼자 봤지만, 너는 아내와 함께 보라고... 제 친구는 [비포 선라이즈]의 줄리 델피에 대한 환상을 깨기 싫다며 [비포 미드나잇]의 관람을 거부하더군요.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40대의 제게도 20대의 순수한 사랑은 깨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추억이니까요.

제시와 셀린느는 그러한 20대의 아름다운 사랑을 거쳐 30대의 조심스러운 만남을 이루고, 40대에서는 서로 지지고 볶는 부부로서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비포 미드나잇]의 영화로서의 가치는 이렇게 세대별로의 사랑을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20대의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을 깨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환상에 머물 것입니다. 하지만 환상은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환상보다는 현실이 더 좋습니다. 비록 구피와 저는 지지고 볶으며 서로 싸우고, 그러면서 함께 살아가지만, 환상 속의 아름다운 사랑보다 현실의 구피와 지금의 가족이 더욱 소중하기에... 그것이 제가 제시와 셀린느의 [비포 미드나잇]에서 보여준 아름답지 않은 사랑을 끝까지 응원하는 이유입니다.

 

 

[비포 미드나잇]이후 10년이 흘러 50대가 된 제시와 셀린느는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그 영화를 보는 나는 또 어떤 모습일까?

더 이상 [비포 시리즈]는 없다는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선언이 그래서 더욱 아쉽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