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민규동
주연 : 엄정화, 김효진, 황정민
[오감도]에서 미처 못한 이야기.
2009년에 개봉했던 [오감도]라는 제목의 옴니버스 영화가 있습니다. 변혁, 허진호, 유영식, 민규동, 오지환 등 나름 잘 나가는 감독들이 섹스를 주제로 연출한 단편 영화들을 한데 묶은 영화입니다. 유명 감독들이 연출을 했기 때문인지 출연 배우들도 나름 빵빵합니다. 장혁, 김강우, 김수로, 배종옥, 김민선, 송중기, 신세경, 이시영 등등...
그 중에서도 민규동 감독이 연출한 <끝과 시작>은 엄정화, 김효진, 황정민이라는 그야말로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끝과 시작>이 가장 돋보였던 것은 [오감도]의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파격적인 영화의 내용입니다. 남편의 죽음이후 남편과 불륜관계를 맺었던 후배와 동거를 하게되는 어느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불륜, 동성애, 가학적인 사랑 등 우리나라 영화로서는 담기 힘든 소재들이 <끝과 시작>에서는 한꺼번에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파격적인 소재는 단편 영화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채 겉돌았습니다. 특히 캐릭터들의 심리를 제대로 잡지 못한 까닭에 영화 속에서 파격적인 상황을 맞이하는 정하(엄정화)와 나루(김효진)의 상황이 제겐 어리둥절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민규동 감독은 단편 <끝과 시작>을 장편으로 확장시킵니다.
애초에 호감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솔직히 호기심이 생기긴 했습니다. [오감도]를 재미있게 보지도 못했고, 단편 <끝과 시작> 역시도 그다지 재미없었던 저로서는 사실 [끝과 시작]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엄정화, 황정민, 김효진이라는 여전히 매력적인 초호화 캐스팅과 단편을 장편으로 확장시키면서까지 민규동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는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끝과 시작]을 보기 시작하니 이 영화의 파격적인 소재가 조금은 짜증을 불러 일으키더군요. 저는 영화 속의 캐릭터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면서 영화를 감상하는 편인데 [끝과 시작]에서는 감정을 이입할만한 캐릭터가 없습니다. 아내를 놔두고 아내의 후배와 바람을 피우는 재인(황정민). 그가 나루와 나누는 가학적인 섹스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위험한 도로에서 나누는 재인과 나루의 섹스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한 재인의 행동은 마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정하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불륜을 저지르다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도 이해가 안되는데 어느날 갑자기 집에 찾아온 나루를 받아 들이고, 그녀를 학대하는 모습은 '도대체 왜 저러지?'라는 생각만 들게 했습니다. 나루에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고요.
파격적인 소재가 불편하지 않은 이유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니 나도 모르게 [끝과 시작]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재인도, 정하도, 나루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영화를 보는 동안에 파격적인 소재로 인한 불편함은 없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의 파격적인 이야기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순진한 소설 지망생 재인이 자유분방한 정하와 와인을 마시면서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소설 이야기를 합니다. 간이 좋지 않다며 술을 거부하고 화초를 끼고 있는 재인의 모습과 그런 재인을 노골적으로 유혹하며 재인이 와인 한잔을 마실 때마다 옷을 하나씩 벗는 정하의 모습은 꽤나 유쾌하게 그려집니다.
바로 그러한 재인이 정하에게 털어놓는 자신이 구상 중인 소설 속의 이야기가 바로 재인과 나루의 불륜, 그리고 재인의 죽음, 나루와 정하의 동성애를 담은 파격적인 이야기인 것입니다. 애초에 이 파격적인 이야기는 관객 앞에 현실의 이야기가 아닌 재인이 정하에게 들려주는 소설 속 이야기의 형식을 띠고 있는 셈입니다. 바로 그러한 점이 이 영화의 캐릭터들에 감정이입을 할 수는 없지만 영화속 파격적인 이야기가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이유입니다.
필요한 것이 자라나는 화분
민규동 감독은 소설 속의 이야기라는 특성을 잘 살려 파격적인 이야기를 판타지적인 화면 속에 담아 냅니다. 죽은 남편을 보내지 못하는 정하의 심정은 죽은 재인이 정하와 나루의 주위를 맴돌게 만들고, 나루가 보여주는 마술 장면은 파격적인 이야기가 불편해질때쯤 '이건 현실이 아냐.'라고 이야기하는 듯했습니다.
[끝과 시작]의 판타지한 분위기가 잘 살아나는 부분은 정하에게 배달되는 필요한 것이 자라나는 카드 화분 장면입니다. 정하는 카드 화분에 관심을 두지 않지만, 유령인 재인이 정하 대신 카드 화분에 물을 줍니다. 결국 카드 화분은 순식간에 싹을 틔우고, 그 싹에서 나루가 나옵니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서 감각적인 화면을 선보였던 민규동 감독의 능력이 마음껏 발휘된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분명 필요한 것이 나온다고 했는데, 카드 화분에서 나온 것은 나루입니다. 과연 정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나루일까요? 소재는 조금 파격적이지만 나루가 정하의 집에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실제로 정하에겐 나루가 필요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정하는 남편과 불륜의 관계였던 나루에게 온갖 학대를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이 재인이 죽은 후 마치 시체처럼 아무 것도 못하는 그녀의 모습 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아니 다시 시작이다. (스포 포함)
영화가 후반으로 진행되면 될수록 [끝과 시작]은 파격적인 소재 뒤에 숨겨 놓았던 진짜 이야기를 펼쳐 보입니다. 정하와 나루가 오래전 동성애 관계였다는 점, 나루가 진정 사랑했던 것은 재인이 아닌 정하였다는 점.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정하와 나루의 동성애 섹스 장면은 숨겨놨던 그들의 감정이 폭발하며 애틋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제목이 의미하는 '끝과 시작'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처음 시작은 순진한 소설 지망생 재인과 자유분방한 정하의 만남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사랑은 결혼과 동시에 끝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두번째 시작은 정하와의 너무 안정적인 삶으로 인하여 오히려 글을 쓸 수 없게된 재인의 고뇌입니다. 그는 나루를 만났고, 나루와의 가학적인 섹스를 통해 글을 다시 쓸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재인의 탈출구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그가 죽음을 맞이하며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하에겐 또다른 시작입니다.
세번째 시작은 재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정하입니다. 그녀는 그리워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합니다. 남편이 남긴 유물 속에서 그가 자필로 쓴 소설을 발견한 정하는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에 빠집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사회의 금기속에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둔 나루를 향한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재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정하의 고통의 끝입니다.
영화에서 나루가 실제로 정하의 집 초인종을 누르며 영화는 끝납니다. 그 순간 정하의 입가에 머금은 미묘한 표정, 그것이 남편과 불륜 관계를 맺어온 후배에 대한 분노인지,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둔 사랑이 다시 찾아온 것에 대한 기쁨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것은 또다른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의외로 매력적인 이야기
앞서 언급했듯이 [오감도]를 재미없게 본 저로서는 [끝과 시작]은 애초부터 호감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영화 속의 캐릭터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는 제게 그들이 펼치는 파격적인 이야기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민규동 감독은 파격적인 이야기의 불편함을 최소화시키고, 특유의 판타지한 화면을 꾸며냈으며, 그에 맞게 배우들 역시 혼신을 다해 연기를 해냅니다. 그러한 가운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이야기가 매력적이다.'라고 느끼게 만드는 힘을 발휘합니다.
결코 영화 속의 캐릭터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매력적인 이야기... 그렇기에 [끝과 시작]은 제게 굉장히 독특한 영화였습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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