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안노 히데아키, 마사유키, 마에다 마사히로, 츠루마키 카즈야
더빙 : 오가타 메구미, 하야시바라 메구미, 미야무라 유코
개봉 : 2013년 4월 25일
관람 : 2013년 4월 28일
등급 : 15세 관람가
성장이 멈춰버린 아저씨의 한계
지난주 내내 기침 감기로 고생을 했던 저는 금요일에는 부하 직원이 사다준 약과 구피가 정성껏 끓여준 레몬차 덕분에 기침 감기는 어느정도 회복하였습니다. 이제 주말에 집에서 푹 쉬면 기침 감기는 뚝하고 떨어져 나갈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금요일 저녁에는 회식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회식에 참가했다가는 떨어질 기미가 보이는 기침 감기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직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회식에 참가했습니다. '내가 한때는 며칠 동안 밤샘을 해도 끄덕없는 체력이었어. 그깟 감기쯤은...'이라는 똥고집을 부리며...
그 결과, 저는 토요일 하루종일 침대에서 누워 지냈습니다. 기침 감기가 심해진 것은 당연했고, 두통까지 겹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더군요.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는 남편 때문에 혼자 밀린 집안일을 하랴, 주말만 손꼽아 기다리는 웅이와 놀아주랴, 구피만 죽도록 고생했습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몸이 아프니 어쩔 수가 없더군요.
토요일 밤에 약을 먹은 후 식은 땀을 흠뻑 흘리며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이제 내 체력이 예전같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운동을 하던가, 아니면 술을 줄여서 체력 관리를 하던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결국 40대에 접어든 내 한계인 셈이죠.
토요일에 아파서 끙끙 앓으면서도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에반게리온 : Q]입니다. [에반게리온 : Q]의 개봉 소식을 들은 저는 일요일 저녁 시간대로 미리 예매를 해놓은 것입니다.
[에반게리온 : Q]는 메가박스에서 독점 상영합니다. 그런데 저희 동네 메가박스의 [에반게리온 : Q] 상영 시간을 보니 일요일 저녁 시간대를 놓치면 평일 시간대는 저와 스케줄이 맞지 않아 극장에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에반게리온 : Q]가 1주 이상 상영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 결국 일찌감치 예매해놓은 일요일은 제가 [에반게리온 : Q]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게다가 [에반게리온 : Q]를 보기 전에 복습하려했던 [에반게리온 : 서]와 [에반게리온 : 파]도 아직 못 본 상태입니다. 원래는 토요일 밤에 몰아서 볼 계획이었고, 실제로 토요일 밤에 보겠다고 우겼다가 구피한테 혼났습니다. 아픈데 빨리 잠이나 자라며...
금요일 회식에 참가만 하지 않았다면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밤에 [에반게리온 : 서]와 [에반게리온 : 파]를 여유있게 보고, 일요일 저녁에 구피와 오붓하게 [에반게리온 : Q]를 볼 수 있었는데... 그깟 회식을 포기하지 못한 미련한 제 자신이 너무나도 미워지고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에반게리온 : Q]를 포기할 수는 없는 상황. 결국 저는 몸이 조금 나아진 일요일 낮에 웅이와 놀아준다는 핑계로 웅이와 함께 [에반게리온 : 서]와 [에반게리온 : 파]를 봤습니다. 그리고 예매를 취소하라는 구피한테 우기고 우겨서 결국 [에반게리온 : Q]를 보러 갔습니다.
신지의 성장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버렸다.
결코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었습니다. 토요일에 구피의 배려로 푹 쉬긴 했지만 여전히 감기 기운은 저를 괴롭혔으니까요. 그래도 계획했던대로 [에반게리온 : 서]와 [에반게리온 : 파]를 복습했고, [에반게리온 : Q]를 보기 위해 극장에 앉으니 기분은 좋았습니다.
[에반게리온 : 파]를 복습하면서 느낀 것은 신지(오가타 메구미)의 성장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원작이라 할 수있는 TV 시리즈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에반게리온 : 서]에서 신지는 아버지인 네르프의 사령관 겐도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트라우마로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줬었습니다. 에바 초호기를 타고 사도라는 무시무시한 존재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도망치려 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네르프의 작전과장인 미사토와 함께 지내면서 점차 성장합니다. 혼자인 것이 당연했던 소년은 소중한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에반게리온 : 파]에서 그러한 신지의 변화는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에반게리온 : 파]는 신지의 학교 생활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그가 친구들과의 우정을 통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줬으며, 아스카(미야무라 유코)와 레이(하야시바라 메구미)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더이상 원작의 찌질한 소년 신지가 아님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에반게리온 : 파]에서도 신지의 성장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에바 초호기의 더미 시스템으로 인하여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스카가 타고 있는 에바 3호기(사실은 사도였죠)를 잔인하게 부수는 장면에서 신지의 성장은 첫번째 위기를 맞이합니다.
신지의 성장은 레이로 인하여 두번째 위기를 맞이하는데 신지에게 '더이상 에바를 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주겠다.'며 사도를 향해 자폭을 시도하는 레이. 신지는 두려워하고, 도망치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레이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사도를 향해 폭주합니다. 그렇게 [에반게리온 : 파]는 막을 내립니다. 레이를 구하는 신지. 신지의 성장과 함께 각성하는 에바 초호기. 그리고 맞이하게 되는 서든 임팩트.
그러나 [에반게리온 : Q]에서는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립니다. [에반게리온 : 파]에서 14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고, 신지의 주변 인물 또한 모두 변했습니다. 신지의 성장을 이끌어주던 멘토와도 같았던 미사토는 이제 네르프의 배후인 제레와 맞서 싸우는 뷜레라는 조직의 함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14년 만에 눈을 뜬 신지에게 차가운 눈빛만 보냅니다.
죽은줄 알았던 아스카는 여전히 거만한 표정으로 펄펄 날뛰고 있었으며, 신지로 인하여 조금씩 인간의 마음을 가지기 시작하던 레이는 다시 감정 따위는 없는 차가운 인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화에서 신지는 또다시 두려워하고, 도망치려는 소년으로 돌아갑니다. [에반게리온 : Q]는 [에반게리온 : 파]에서 애써 이룩해놓은 신지의 성장을 다시 원상태로 돌려 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에게 극도의 혼란을 선사하다.
게다가 [에반게리온 : Q]에서 의문이 해소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에반게리온 : 파]에서 첫 선을 보이며 뭔가 굉장한 역할을 할 것 같았던 마리는 여전히 의문 투성이의 미소만을 지을 뿐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어른들을 이용한다던 [에반게리온 : 파]에서의 그녀의 독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에반게리온 : Q]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냥 미끼일 뿐인지, 아니면 새로운 극장판의 마지막편에서 마리가 정말 어떤 역할을 해낼 것인지 혼란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한 혼란은 영화의 초반 극에 달합니다. 14년만에 눈을 뜬 신지. 모든 상황이 바뀌었는데 아무도 설명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답답해하는 신지와 더불어 영화를 보는 저 역시 이러한 [에반게리온 : Q]의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당연히 저는 신지의 성장과 에바 초호기의 각성, 그리고 서든 임팩트가 그려질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에반게리온 : Q]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뛰어 넘고 14년 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패기(?)에 경악해야 했습니다. 그렇지않아도 감기 기운으로 인한 두통이 남아 있던 제 머릿속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뷜레의 인질로 잡혀 있던 신지를 레이의 목소리와 함께 에바 0호기가 구하는 장면에서 뭔가 이 혼란스러운 상황이 조금은 정리되겠구나 싶었는데 그럴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겐도는 여전히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한채 신지를 외면하고, 레이 역시 영혼이 없는 인형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카오루의 등장입니다. 사실 카오루는 [에반게리온 : 파]에서 엔딩 크레딧이 끝난 후의 한마디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장본입니다. "약속한 시간이 왔다 신지. 이번엔 반드시 너만은 행복하게 해주겠어."
저는 이 장면을 본 후 [에반게리온 : Q]에서 카오루에 대한 기대감이 가장 컸습니다. 그러한 제 기대감에 부흥이라도 하듯이 카오루는 신지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줍니다. 아무도 신지에게 서든 임팩트에 대한 설명을 안해줬지만, 카오루만큼은 친절하게 신지의 손을 잡고 서든 임팩트의 실체에 대해서 차근 차근 설명해줍니다. 만약 카오루마저 없었다면 [에반게리온 : Q]로 인한 제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을만큼 커져버렸을 듯...
하지만 그것도 함정입니다. 모든 것이 뒤바뀐 상황. 자신에게 친절했던 이들마저 신지를 외면하는 상황에서 신지는 더욱 카오루에게 기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카오루가 모든 것을 되돌리자며 신지와 함께 롱기누스의 창을 회수하는 장면은 카오루마저도 [에반게리온 : Q]가 파놓은 함정임을 보여줍니다.
리리스에 의해 봉인된 두개의 창만 회수하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는 말에 신지는 희망을 갖습니다. 모든 것을 되돌리고, 다시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희망. 그렇기에 롱기누스의 창에 뭔가 함정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카오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지는 롱기누스의 창을 뽑아버립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신지의 모든 것은 붕괴되고, [에반게리온 : Q]를 감상하던 저 역시 극도의 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
You Can (Not) Redo
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에반게리온 : Q]를 보고 '이게 뭐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에반게리온 : Q]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바꿔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변화의 순간은 [에반게리온 : 파]에서부터였습니다. [에반게리온 : 서]가 기존 TV판의 압축판이라고 한다면 [에반게리온 : 파]는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키며 기존의 TV 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전개를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반게리온 : 파]에서 느꼈던 혼란은 [에반게리온 : Q]처럼 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에반게리온 : Q]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의 시작은 14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입니다. 당연히 중요시될 것이라 예상되었던 서든 임팩트가 14년이라는 세월의 간극 사이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14년만에 잠에서 깨어나 어리둥절한 신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에반게리온 : Q]는 관객에게 친절한 설명은 하지 않고 오히려 완전히 바뀌어 버린 스토리 전개로 극도의 혼란을 느끼게 했습니다.
다시 14년 전으로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신지의 간절함 만큼이나 [에반게리온 : Q]를 보는 저 역시도 다시 모든 것을 [에반게리온 : 파]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영화 중반에 공개되는 부제인 'You Can (Not) Redo'는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넌 다시 되돌릴 수 있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괄호 안의 (Not)을 넣어버리면 '넌 다시 되돌릴 수 없어'가 됩니다. 다시 14년으로 되돌리고 싶은 신지. 하지만 신지는 이 모든 것을 다시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완전히 붕괴됩니다.
자! 이쯤되면 신극장판의 마지막편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져만 갑니다. 한가지 희망적인 것은 신지, 아스카, 레이가 다시 뭉쳤다는 점입니다.
완전히 붕괴된 신지를 부축한 두 소녀. 비록 아스카는 뷜레 소속이고, 레이는 여전히 영혼이 없는 상태이며, 신지는 정신이 붕괴된 상태이긴 하지만 원작 TV 시리즈의 오리지널 주인공인 이들이 함께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위안이 되었습니다.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말만 되풀이하다가 "네 탓이 아니야. 내가 13사도가 되었기 때문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라며 신지를 위로한 후, "다시 만날 수 있어. 신지."라는 여운을 남긴채 사라진 카오루 역시 신극장판의 마지막편에 대한 기대를 놓칠 수 없게 만듭니다. 저는 여전히 [에반게리온 : 파]의 마지막에서 카오루가 신지에게 한 '이번엔 반드시 너만은 행복하게 해주겠어.'라는 약속을 굳게 믿고 싶습니다. (카오루... 어서 약속을 지키란 말이야!!!)
게다가 논란이 되고 있는 후속편 예고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되돌이표(:∥)는 그러한 제 기대감을 더욱 부채질합니다. 서든 임팩트가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신지. 저 역시 [에번게리온 : Q]가 아닌 [에반게리온 : 파]로 되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만큼 신극장판 마지막편의 되돌이표는 놓칠 수 없는 마지막 희망일 될 듯합니다.
물론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제 희망대로 신극장판의 마지막을 만들지는 않겠죠. [에반게리온 : Q]를 통해 저를 완벽하게 혼란에 빠뜨린 그였기에 이번에는 잔뜩 긴장하며 신극장판 마지막편을 기다려야 겠습니다.
신지의 성장에 대한 기대를 완벽하게 무너뜨리다.
에바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한 내 노력에 혼란을 가중시키다.
그래, 싸우자! 안노 히데아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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