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다크 서티]를 포기하다.
지난 주에 개봉한 영화 중에서 이제 제가 보고 싶었던 기대작은 할리우드의 여장부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제로 다크 서티]뿐입니다. 하지만 [제로 다크 서티]는 국내 흥행이 부진해서 신작이 개봉하는 목요일에는 극장에서 거의 내려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제로 다크 서티]를 보려면 서둘러야 했습니다.
월요일과 화요일은 야근을 하느라 [제로 다크 서티]를 놓친 제게 수요일은 [제로 다크 서티]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손엔 3월 13일 수요일에 딱 하루만 열리는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PIANO BOULEVARD> 창단 연주회의 VIP 티켓이 쥐어줘있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가 연주회를 후원했다고 하네요. 딱 하루만 열리는 연주회라 수요일이 아니면 VIP 티켓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립니다. 이러니 제가 고민을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로 다크 서티]를 볼 것인가? 아니면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PIANO BOULEVARD> 창단 연주회에 갈 것인가? 결국 제 선택은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PIANO BOULEVARD>였습니다. 피아노 연주회를 단 한번도 가본적이 없어서 호기심도 들었고, 회사에서 후원한 행사라서 가야한다는 의무감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피아노의 대중화를 선언하다.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PIANO BOULEVARD>는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7명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모여, 그동안 독주와 반주 위주로 사용했던 피아노를 장르와 시대를 넘어 피아노를 포함하여 피아노와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악기와의 공연을 기획하며 새로운 피아노 연주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날의 공연은 제가 예상했던 피아노 연주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일단 두 대의 피아노와 세 대의 신디사이저가 배치된 공연 배치부터 남다른 포스를 풍기더니 피아졸라의 사계중 <여름>으로 시작해서 비발디의 사계중 <가을>과 <겨울>을 거쳐 다시 피아졸라의 <봄>으로 마무리하는 1부 프로그램도 굉장히 색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비발디의 사계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음악가 파이졸라는 제겐 너무나도 낯선 존재입니다. 피아졸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나 비발디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를 1965년에서부터 70년에 걸쳐 작곡했다고 합니다. 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으로 이어지는 순서는 피아졸라가 작곡한 순서대로이며, 이번 음악회에서는 피어졸라의 사계와 비발디의 사계를 함께 들려줌으로서 좋은 음악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듬을 표현했습니다.
2부의 시작은 충격. 하지만 이어진 따뜻함
2부의 시작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트리오 op. 67>은 좀 충격적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에 쓰여진 곡으로 그해 나치 수용소에서 죽은 평론가 겸 음악학자이며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솔레르틴스키를 애도하며 헌정한 이 곡은 죽은 시체들이 일어나 걷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음악이라 합니다.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PIANO BOULEVARD>는 이 곡을 위해 무대의 오른쪽에 화면에 우리나라의 젊은 작가의 죽음을 소재로한 그림들을 선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피아노 트리오 op. 67>를 듣는 제 마음에 한껏 무거워졌습니다.
하지만 두번째 곡부터는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영화 음악을 주제로한 곡들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첫번째 순서는 역시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왈츠 No. 2>였는데 이 음악은 우리나라 영화인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OST로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했던, 하지만 이젠 이 세상에 없는 배우 이은주의 생전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회상하며 <왈츠 No. 2>를 듣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찡해졌습니다.
영화음악의 향연... 행복했다.
<왈츠 No. 2>에 이어진 곡들은 본격적인 영화 OST의 곡들입니다.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 <인생의 회전목마>는 피아노를 배제하고 신시사이저만으로 연주하는 파격을 보여줬고, 류이치 사카모토가 작곡한 [마지막 황제]의 OST <Rain>은 영화의 웅장함을 고스란히 표현해서 들려줬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OST 작곡가인 엔니오 모리꼬네의 곡이 연달아 이어졌는데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OST인 <Piaying Love>이 연주될 때에는 임미정이 여행하며 찍은 풍경 사진들이 오른쪽 화면에 펼쳐졌고, [시네마 천국]의 OST인 <사랑의 테마>가 연주될 때에는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PIANO BOULEVARD>의 멤버들의 개인 사진과 가족 사진들이 마치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처럼 객석을 감동에 빠뜨렸습니다.
음악회가 끝나고 앵콜 무대도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PIANO BOULEVARD>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냈는데, 한 연주자가 멜로디언을 가지고 나와 피아노와 협주하는 모습은 관객과함께 호흡하고 싶어하는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PIANO BOULEVARD>의 의지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객석의 가족 음악회 수준은 벗어나야...
연주회 자체만 놓고본다면 [제로 다크 서티]를 포기하고 간 것이 전혀 후회가 없을 정도로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PIANO BOULEVARD>는 완벽했습니다. 피아노 연주회가 처음인 저 역시도 즐겁게 들을 수 있는 여러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피아노 연주회는 어렵고 딱딱하며 졸리울 것이라는 편견을 확실하게 벗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객석의 분위기는 정말 많이 아쉬웠습니다. 이번 연주회가 창단 연주회이다보니 연주회 멤버들의 가족들이 대거 찾아온 듯합니다. 객석의 분위기는 완전히 가족 음악회 수준이었는데, 제 옆의 9살난 남자 아이는 연주회에 집중하지 못하고 시끄럽게 떠들었고, 그 옆에 앉은 아이의 어머니는 조용히 시키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소리와 어머니의 소리가 합쳐서 음악에 빠져드는 저를 방해하더군요.
더 큰 문제는 카메라 세례였습니다. 연주 시작 전에 임미정이 비디오 촬영을 허락하겠다는 멘트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 카메라가 '찰칵'거리며 터지기 시작하더군요. 피아노의 섬세한 선율을 들어야 하는 자리에서 '찰칵'거리는 소리와 후레쉬의 번쩍거림은 들어야 하는 저는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뿌듯함은 사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연주를 경청하는 자세에서 나온다.
제 뒤의 중년 남성은 연주회 멤버의 아버지인 듯했는데, 연주를 듣는 것보다는 사진 찍는 것과 박수치는 것에 더 열중하시더군요. 연주가 끝나고 연주의 여운을 느끼려고 하는 순간 앞에 앉은 제 귀청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박수를 치시는 그 분 덕분에 여운을 느낄 여유가 없었습니다. 박수는 연주자가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 순간 쳐도 충분할텐데, 굳이 연주가 끝나자마자 그렇게 손바닥이 퍼렇게 멍들겠다 싶을 정도로 박수를 쳐야 하는 것인지...
물론 그 마음은 압니다. 자신의 가족이, 자신의 자식이 이 큰 무대에서 연주를 하는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뿌듯하셨겠습니까? 하지만 정녕 그러시다면 조용히 연주를 경청하고 연주의 감동을 느끼셔야 했습니다.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순간 연주를 듣는 것은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뿌듯함은 사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으로 느끼셨어야 했습니다.
이번 연주회는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PIANO BOULEVARD>의 창단 연주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회 멤버들 가족들로 구성된 객석의 이러한 반응을 참고 넘어간다고 해도, 저처럼 온전히 연주를 듣고 싶은 관객마저 방해를 하는 행동은 그 분들이 뿌듯해하는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PIANO BOULEVARD>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감동을 반감시키는 것임을 정녕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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