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007 제임스 본드'
저희 부모님은 양복점을 운영하셨습니다. 모든 자영업자들이 그러하듯이 양복점을 운영하시면서 주말도 없이 쉼 없이 일을 하셨습니다. 주말도 없이 일을 하셨기 때문에 가족 여행을 간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자연스럽게 제 놀이터는 아버지의 양복점이었습니다.
영화가 보고 싶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제가 처음 '저 영화 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려면 버스를 타고 시내로 한참 나가야 했기 때문에 어린 제가 혼자 극장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졸랐습니다. 영화 보러 가자고... 하지만 저는 결국 [E.T.]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제게는 손가락에서 빨간 불빛이 반짝거리는 'ET' 피규어가 쥐어졌습니다.
제가 중학생이 되고 드디어 저희 집에도 비디오비젼을 구입했습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영화광이 되는 계기가 마련된 셈입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영화에 관심이 없어 보였던 아버지는 비디오비젼을 보시면서 '영화는 뭐니뭐니해도 007 영화지!'라고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제가 극장에 한번 데려가 달라고 그렇게 졸랐을 때에도 '돈 아깝게 뭐하러 영화를 극장에서 보냐?'며 윽박만 지르시던 아버지도 젊은 시절에는 극장에서 007 영화를 보시며 열광하셨던 것입니다.
나의 첫 도전의 실패... [007 살인면허]
비디오비젼을 처음 구입하던 날, 저는 설레는 마음으로 동네 비디오 대여점으로 달려가 [그렘린]이라는 영화를 빌려왔습니다. 하지만 [그렘린]을 보시던 아버지는 '뭐 이런 망가같은 영화를 빌려 왔냐?'며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러시던 아버지께서 007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저는 아버지께서 좋아하는 영화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007 영화에 도전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비디오 대여점에 있는 007 영화는 너무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저는 기왕 도전을 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차근 차근 도전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빌려 온 영화가 007 영화의 제 1탄인 [007 살인면허]였습니다.
그러나 한창 혈기왕성하던 제게 [007 살인면허]는 굉장히 지루한 영화였습니다. 뭔가 굉장한 액션을 기대했지만 영화 속에 펼쳐지는 것은 그저 제임스 본드의 밋밋한 활약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굉장히 실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E.T.]도 안보여주고, 그렇게 재미있었던 [그렘린]은 유치한 영화라고 비난하시던 아버지께서 좋아하는 영화가 고작 이런 밋밋한 액션 영화라니... 그날로 저는 007 영화에 대한 도전을 멈춰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나는 영화 코드가 안맞아'라고 단정지어 버렸습니다.
나의 첫 데이트 영화... [007 리빙 데이 나이트]
[007 살인번호]에 실망한 저는 007 영화에 대한 도전을 멈추었습니다. 사실 제가 007 영화에 대한 도전을 멈춘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비디오 대여점의 007 영화는 상, 하로 나눠 있어서 비디오 대여금액이 두 배로 든다는 점도 한 몫했습니다. 용돈이 한정되어 있던 제게 007 영화를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리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던 셈입니다. (솔직히 [007 뷰 투 어 킬]은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영화 포스터에서의 본드걸 그레이스 존스의 그 위엄은 정말 대단했거든요. 하지만 상, 하로 나눠진 [007 뷰 투 어 킬] 비디오 케이스를 저는 결코 집어들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와 007 영화의 인연은 이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저는 제 빼어난 외모(?)를 앞세워 활발하게 연애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녀와 함께 보러간 첫 영화 데이트가 바로 [007 리빙 데이 나이트]였습니다.
제가 왜 [007 리빙 데이 나이트]를 선택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단지 영화를 보고나서 영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고가의 영화 팜플렛을 구입했고(지금도 집에 잘 모셔두고 있습니다.) 영화 팜플렛을 구입하는 바람에 돈이 없어서 데이트를 서둘로 마쳤던 기억은 선명합니다.(성은아, 미안!) 그날 이후로 007 영화는 제게 꼭 극장에서 관람해야 하는 영화 목록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007 영화의 새로운 쾌감 [007 카지노 로얄]
사실 007 영화가 오랫동안 진행되면서 약간은 매너리즘에 빠진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특히 피어스 브로스넌이 5대 제임스 본드로 취임을 한 이후에는 제임스 본드는 너무 가벼운 액션 영웅의 이미지가 씌워졌습니다. 그래서일까요? 007 영화의 흥행도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죠.
바로 그때 혜성같이 등장한 영화가 있으니 바로 [007 카지노 로얄]입니다. [007 카지노 로얄]은 007 영화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제임스 본드가 살인면허를 받기 전의 활약을 소개합니다. 말 그대로 아예 처음부터 다시 007 영화를 시작한 셈입니다.
특히한 것은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점입니다. 이전의 제임스 본드는 휜칠한 영국 신사, 혹은 바람둥이 모습이었다면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는 날 것 그대로의 짐승같은 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007 카지노 로얄]과 [007 퀀텀 오브 솔러스]를 거치며 왜 그가 이토록 냉소적이고, 자신의 본능만을 믿는 짐승같은 남자가 되었는지, 차근 차근 설명해 낸 것입니다.
[007 살인면허]에 대한 도전 실패의 댓가로 007 영화를 처음부터 즐기지 못한 저는 [007 카지노 로얄]을 통해 비로서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저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유쾌한 영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가 살인면허를 지닌 전설적인 스파이가 되기까지, 그는 많은 아픔과 상처를 지닌 것입니다. 제가 제임스 본드를 진정으로 사랑하게된 계기입니다.(아직도 저는 [007 카지노 로얄]에서 제임스 본드의 마지막 절규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50주년을 맞이한 007 영화
[007 살인번호]가 만들어진 것이 1962년이니 007 영화는 어느덧 5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이번 주에 개봉하는 [007 스카이폴]까지 23편의 007 영화가 만들어졌고(비공식 007 영화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더욱 많아지겠지만 비공식 007 영화들은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숀 코네리부터 다니엘 크레이그까지 6명의 제임스 본드가 멋진 활약을 했습니다.
사실 제게 1대 제임스 본드인 숀 코네리에 대한 기억은 희미합니다. 그저 [007 살인면허]를 봤을 때의 실망감 정도만 기억이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세대의 제임스 본드라는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아 있습니다.
2대 제임스 본드인 조지 라젠비는 [007 여왕폐하 대작전] 단 한편으로 단명했으니 논외로 치고, 3대 제임스 본드인 로저 무어의 경우는 그저 비디오 대여점의 포스터로만 기억이 됩니다. 왜 그가 주연을 맡은 007 영화는 러닝타임이 그토록 길었던 걸까요? (상, 하로 나눠진 영화 비디오에 대한 아픈 기억이...)
제가 본격적으로 007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4대 제임스 본드 티모시 달큰의 영화들과 5대 제임스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의 영화들은 그저 신나는 액션 영화였습니다. 극장의 큰 화면에서 이들 영화의 스펙타클한 액션이 터질 때의 쾌감은 젊은 시절의 제겐 엄청난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6대 제임스 본드인 다니엘 크레이그는 제게 감정이입의 대상입니다. 그의 액션은 더이상 제게 무한 쾌감을 주지 못합니다. 대신 그의 처절한 액션의 의미를 알고 있기에 그저 마음 한 구석이 짠합니다.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영화가 변했고, 제임스 본드가 바뀌었 듯이 007 영화를 바라보는 제 시선 역시 많은 변화를 맞이했네요.
나는 기다린다. [007 스카이폴]의 슬픈 처절한 액션을...
2012년 10월 26일... 바로 007 영화의 23번째 영화인 [007 스카이폴]이 개봉하는 날입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6대 제임스 본드로 취임한 이후 세번째 영화이기도 합니다.
저는 007 영화의 50주년을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엔 제 나이가 너무 어립니다. 하지만 저희 가족을 위해서 하루종일 미싱을 돌리시던 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기쁨이 007 영화에 담겨 있습니다. 비디오비젼을 처음 사던 날 '영화는 뭐니뭐니해도 007 영화가 최고'라던 아버지의 그 미소. 저는 왜 좀 더 일찍 아버지를 모시고 007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지 못한 걸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년이 지난 지금 그것이 가장 후회스럽습니다.
그리고 007 영화는 젊은 시절의 제 추억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녀와의 첫 영화 데이트. 그런데 저는 그녀의 미소보다 [007 리빙 데이 나이트]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녀와의 데이트를 위해 소중히 모아둔 용돈을 영화 팜플렛 사는데 모두 투자하고는 '돈이 없으니 오늘 그냥 집에 가자'는 저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 23년 전의 일인데 그녀의 실망감 가득한 얼굴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007 카지노 로얄]을 극장의 한 구석에서 혼자 본 후 남 몰래 눈물을 삼켰던 기억까지... 어쩌면 007 영화가 있었기에 모두 가능한 추억일 것입니다. 과연 [007 스카이폴]은 제게 또 어떤 추억을 안겨줄까요? 제가 10월 26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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