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선욱
주연 : 주상욱, 장미인애, 고정민
다운로드용 영화라도 품격이 있어야 한다.
요즘은 영화 다운로드가 다양한 경로로 시스템화되면서 극장 개봉이 무산된 영화들이 다운로드 시장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부쩍 많아 졌습니다. 예전에 비디오 시장으로 직행했던 영화들의 경우와 비슷한데, 비디오 시장으로의 직행 영화의 경우는 대부분 B급 액션이나 에로 영화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다운로드 시장으로 직행하는 영화의 경우는 장르가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지난 일요일 밤에 본 [통통한 혁명]도 그 중 하나입니다. 신인 배우를 캐스팅한 이 로맨틱 코미디는 극장 개봉이 무산되자 다운로드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했습니다. 어제 본 [90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상욱과 장미인애라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배우들을 캐스팅한 이 스릴러 영화는 다운로드 시장에서 꽤 인기를 얻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틀동안 연달아 [통통한 혁명]과 [90분]을 본 저는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다운로드 시장으로 직행한 영화들이라 할지라도 장르 영화로서의 기본적인 재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비디오 시장으로 직행한 영화들의 경우는 B급 액션, 에로라는 장르에 만큼은 충실했었습니다. 그러나 [통통한 혁명]과 [90분]은 로맨틱 코미디와 스릴러라는 각각의 장르를 제대로 이해못한채 제게 지루함만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남자 정말 나쁜 남자이다.
[90분]은 성공한 CF 감독이자, 재벌가의 외동딸과 결혼한 덕분에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그야말로 잘 나가는 남자 상희(주상욱)를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하지만 그는 주인공이라 하기엔 너무 과한 나쁜 남자입니다. 집에선 자상한 남편인척 연기를 하지만 밖에선 자신의 욕망과 성공만을 뒤쫓는 야비한 남자입니다. 그는 성공을 위해 아내 정연(고정민)과 대치 관계에 있는 젊은 장모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기까지합니다.
[90분]은 연예계의 성상납 풍조를 영화를 통해 은근히 표현하며 논란의 중심이 되고자 합니다. 실제로 [90분]의 인터넷 홍보 기사를 보면 이 영화가 故 장자연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며 연예계의 병페를 과감하게 드러낸 작품이라 추켜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90분]은 그러한 연예계의 병폐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이는 단지 상희라는 캐릭터를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며 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 관객들에게 눈요기거리를 제공하려고 하는 얄팍한 상술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그렇게해서 구축된 상희라는 캐릭터가 참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캐릭터 자체는 참 못된 놈인데 주상욱이라는 배우의 매력을 입혀 놓으니 또 멋져 보이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애매한 상희의 캐릭터는 영화 중반부의 영화적 재미를 방해합니다. 상희의 파멸을 지켜보는 쾌감도, 그렇다고 상희를 응원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혜리가 90분 동안 상희에게 원한 것은?
암튼 나쁜 남자인 상희가 드디어 장인의 후계자로 지목되기 하루 전. 상희에게 혜리(장미인애)라는 정체불명의 여인이 나타나며 영화는 본격적으로 달립니다. 혜리와 짜릿한 하룻밤을 보낸 상희. 하지만 혜리는 자신과의 섹스 동영상을 무기로 상희에게 협박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그토록 어렵게 이루어낸 것들이 단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상희는 90분 동안 혜리가 시키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 범인이 시키는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주인공.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에서 자주 보는 장치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관객과 주인공의 감정이입이 중요합니다. 주인공이 시간에 쫓기며 범인이 시킨 임무를 완수할 때, 관객들 역시 조마조마하며 그 여정을 쫓아가야 이 장치는 비로서 성공을 거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희라는 캐릭터 자체가 관객과의 감정이입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가 아니니 9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과 임무는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아무런 긴장감을 안겨주지 못합니다.
게다가 혜리가 상희에게 내건 임무라는 것도 긴장감 부재의 원인이 됩니다. 혜리가 원한 것은 고작 상희가 상처를 준 연예 지망생에게 사과를 하고, 잘 나가는 배우의 과거를 까발리는 것. 영화를 보며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예계의 병폐를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스릴러 장르보다 다른 장르를 선택했어야 했습니다. 기껏 스릴러 장르를 선택해놓고 영화 자체는 이렇게 긴장감 부재로 끌고가니 어이가 없을 따름입니다.
긴장감을 불어 넣기 위한 무리한 장치 (이후 스포 포함)
박선욱 감독도 연예계의 병폐에 대한 이야기로 영화를 이끌고 가기엔 스릴러 영화로서의 긴장감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한 듯이 보입니다. 그는 마지막 임무에서 상희에게 살인자의 누명을 씌움으로서 영화의 긴장감을 높이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러한 시도는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었습니다. 살인 무명을 쓴 주인공. 이것 역시 스릴러 영화에서 자주 써 먹는 장치인데, [90분]의 경우는 이 장치를 써먹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입니다.
이 영화가 무리수를 둔 것은 보라의 자살입니다. 수 많은 여인을 거느리던 상희에게 유일한 사랑으로 표현된 보라는 혜리가 전해준 상희의 섹스 비디오를 보고 자살합니다. 상희가 살인자의 누명을 쓰는 것은 그러한 보라가 자살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혜리는 상희의 섹스 비디오를 보면 보라가 자살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되죠.
자살... [90분]은 이것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혜리의 계획이 무리수로 느껴졌던 것은 자살을 너무 쉽게 생각한 안일함 때문입니다. 완벽한 계획이라는 것은 그 어떤 돌발 변수에도 대처할 수 있는 계획을 말합니다. 보라의 자살은 돌발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보라가 섹스 비디오를 보고 자살할 것이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혜리는 돌발 변수에 대한 대처를 전혀 안했습니다. 만약 보라가 자살을 하지 않았다면 혜리의 계획은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돌발 변수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영화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안일한 선택을 한 박선욱 감독도 참 안쓰럽습니다.
이 남자를 파멸시키는데 걸린 90분이라는 시간.
[90분]은 그야말로 스릴러라는 장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든 김 빠진 콜라 같은 영화입니다. 9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이라는 장치를 마련해 놓고 주인공과 관객의 감정이입을 처음부터 불가능하게 만든 것도 한심하지만, 9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주인공인 상희가 겪어야 하는 사건 들 역시 긴장감은 커녕 헛웃음만 나오게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해 집니다. 정연에 의한 첫번째 반전은 꽤 좋았습니다.(물론 놀랄만한 반전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재우에 의한 두번째 반전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 뻔했습니다.
상희의 자살이라는 마지막 선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는 자살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과연 상희가 자살을 할만한 상황인지는 여전히 이해가 안됩니다.(보라의 자살도 역시 이해가 안됩니다.) 주인공의 자살이라는 결말은 잘만 하면 영화를 극적으로 끝낼 수 있는 좋은 장치이지만 잘못하면 억지스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90분]의 경우는 후자입니다. 상희를 파멸시키고 자살에 이르게 하는데 고작 90분이라는 시간이면 될 것이라는 판단 자체가 억지인 것이죠.
상희를 제외하고는 다른 조연 캐릭터들이 제대로 구축되지 못했던 점 역시 아쉽습니다. 정연에게 대놓고 악담을 퍼붓는 새어머니는 '나는 악역이요.'라고 아예 얼굴에 써붙이고, 상희와 다른 한 축을 담당해야할 혜리는 아예 캐릭터 자체가 불분명합니다. 이렇게 [통통한 혁명]에 이어 [90분]까지 실망하고나니 앞으로 다운로드용 영화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순전히 시간 낭비만 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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